11. Call my name (6)2020.09.05.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 오빠와 같은 황금색 머리카락을 멋스럽게 손질한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오빠를 쳐다보았다.
“이 도둑새끼야.”
“그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도 딱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이 나이에 저 어린 토끼를 신부로 맞은 게 도둑놈이지 뭐겠나.
“좀 애가 혼자 다니게 내버려둬! 충분히 즐길 자격은 있잖아.”
“네가 공주님의 권리까지 신경 써줄 줄은 몰랐는데.”
샤를렌은 물고 있던 담배를 뺐다.
“권리고 자시고 매그놀리아 칼리지에 넣겠다는 것도 모자라 오빠가 신입생들 수업에 직접 들어가겠다니, 그게 무슨 미친 짓이야?”
글래스턴 대학 중에서도 매그놀리아 칼리지는 철저히 여학생들로만 구성된 곳이었다. 명문이기도 했거니와, 금남의 구역인지라 보수적인 집안에서 딸들을 그곳에 보내 졸업시켰다. 그런데 저 미친 뱀파이어가 토끼 공주님을 매그놀리아 칼리지에서 졸업시키시겠단다!
“정신 나갔어? 아니, 그 헬레인 공주가 매그놀리아 칼리지에서 졸업을 하긴 하겠대? 중간에 다른 칼리지로 가서 다른 거 공부하고 싶다고 하면 어쩌려고?”
“공주님은 내 말 잘 들어.”
샤를렌은 결국 질색했다.
“넌 진짜 미친놈이야.”
아직까지 얼굴도 보지 않은 내 올케, 불쌍하기도 하지. 어쩌다 저런 미친놈에게 걸려가지고. 샤를렌은 고개를 흔들다가도 제 오빠를 다시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뱀파이어가 왜 저러지?
“아니면 그 공주 때문에 미치기라도 한 거야?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벨파이어 칼리지 소속 교수는 수업도 안 하는데.”
“카메론 셀레스트가 우리 공주님을 봤어. 성을 알아내는 건 시간 문제겠고, 엘펜하임 놈들이 달려드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 다 예상했던 거잖아. 근데 그게 왜? 매그놀리아 칼리지에서 졸업하는 것과, 그 공주를 엘펜하임에게서 지키는 게 무슨 상관이야?”
저건 순전히 사심이었다.
“올케가 그렇게 귀여워?”
라이킨은 여동생의 질문에 픽 웃었다.
“조그만데 귀엽긴 하지. 조만간 자리를 마련할 테니 오도록 해.”
“왜, 그 공주가 오빠 닮은 뱀파이어는 안 무섭대?”
“상처가 거의 다 나았거든. 그리고 네가 ‘그 공주’라고 불러대는 게 영 듣기 싫어서.”
푸른 눈이 번뜩이자 샤를렌은 양손을 들어 보였다.
“와서 만나고 호칭정리 똑바로 해. 아무리 그래도 펠릭스의 딸이야.”
“그래서 오빠는 아내한테 공주님이라고 불러?”
“공주님 맞잖아.”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고리타분하고 호칭 확실하게 따지는 사람이 바로 아버지랑 오빠니까.”
샤를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녀는 갈색 펜슬 스커트와 흰 블라우스를 아주 근사하게 입고 있었는데, 호리호리한 키와 더불어 굉장히 잘 어울렸다.
“언제 초대할 건데?”
“정식으로는 다음 주. 아마. 그런데 펜싱도 가르칠 생각이라서.”
“기대할게. 날 보고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네. 오빠보고는 안 놀라?”
샤를렌의 말에 라이킨은 약간 입술을 당겼다.
“아직 겁먹어.”
토끼의 경계심은 상상을 초월했다.
* 소렐은 원서에 서명했고, 라이킨은 언제나 그랬듯 손쉽게 소렐의 추천서를 손에 넣어 원서와 함께 동봉했다. 소렐 이드리스는 숙녀들을 위한 글래스턴 대학 예비과정에 등록할 것이다. 그뿐이었다. 책도 다 샀고, 부드러운 실크 장갑이며 양산, 질 좋고 튼튼한 가죽가방 등을 잔뜩 샀다. 날마다 배달부들이 마차에 물건을 가득 싣고 타운하우스 앞에 섰다.
“굳이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사야 해요?”
“예, 공주님.”
소렐은 방을 가득 채우는 옷더미를 보다가 자신만만하게 대답하는 라이킨을 쳐다보았다.
“많으면 좋습니다.”
“관리하기도 힘들 것 같아요.”
“공주님이 관리를 왜 합니까. 관리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 거지.”
그의 곁에서 세 발자국 정도 떨어져서 선 소렐은 입술을 뾰족하게 모았다.
“어째서 이렇게 많이 사야 해요?”
다 입을 수는 있을까?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어릴 때는 그래도 제법 많은 옷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서부터는 그냥 간단하게 옷 몇 벌을 돌려 입었다. 그녀는 아직 상류층의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다.
“그리고 제 돈은 한 푼도 쓰지 않았잖아요.”
그녀가 너무 사고 싶어 한 물건까지도 라이킨이 다 사줬다. 덕분에 소렐이 물려받은 헬레인 왕가와 이드리스의 유산은 여태까지 사탕과 초콜릿 몇 개를 사는 것 외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공주님이니 많이 가지고 있어야지요. 아직 없는 게 훨씬 더 많습니다. 이를테면 저 금고 안에 있는 보석이라든가. 좀 가지고 와야겠군요.”
“보석을 어딜 가지고 가요?”
“그럴 자리가 앞으로 많이 생길 겁니다. 여학생들끼리 모임도 있을 테고, 대학에서도 무도회를 주최하니까요.”
무도회! 토끼의 눈이 동그래졌다. 라이킨은 소렐의 풍성한 머리카락 위로 보이지 않는 귀여운 토끼 귀가 쫑긋 솟아오르는 상상을 했다. 물론 당연히 귀여웠다.
“그럼 진짜 그럴 때 다들 보석을 하고 나와요?”
“물론입니다. 그리고…….”
라이킨은 여전히 정확하게 세 걸음 떨어져 있는 소렐을 보며 싱긋 웃었다.
“아내가 물건을 사는 거야 남편이 감당할 일 아닙니까.”
“아닌데요.”
그의 청량한 미소도 소렐 이드리스의 야무진 얼굴 앞에서는 전혀 소용이 없었다.
“……아닙니까?”
“네. 아내가 돈이 있으면 그 돈을 쓰는 게 맞다고 보는데요.”
“나는 옛날 사람이어서 좀 더 보수적입니다. 얼마 되지 않는 지출이니 내가 감당하겠습니다. 남편이란 그러라고 있는 존재니까요.”
뱀파이어와 토끼 사이에서 말이 쉴 새 없이 오고 갔다. 소렐은 겁이 난다고 해서 이 차가운 냉혈동물과 아예 말을 않으려고 하는 편은 아니었다.
“그럼 라이킨에게 아내란 뭘 하라고 있는 존재인데요?”
“공주님은 일단 하고 싶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건강히 있어주면 되겠군요.”
라이킨은 픽 웃었다.
“내가 공주님에게 뭘 바라기엔 아직 공주님은 학생이잖습니까.”
“돈은 많은데요!”
“나도 많습니다.”
아, 그런가? 소렐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무튼 공주님이 앞으로 무척 바쁘겠군요. 예비과정도 등록했으니 꼬박꼬박 참석해야 할 거고, 친구도 많이 사귈 거고, 좋아하는 책도 많이 읽을 테고…….”
그렇지! 그렇지! 소렐은 그의 말을 따라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그녀는 어디에든 열심이다. 라이킨은 저 모습을 글래스턴 대학의 학생을 가장한 놈팽이들이 본다고 생각해보았다. 그래. 절대 안 되겠다.
“나와 승마도 하고, 펜싱도 배워야 할 텐데요.”
그는 특히 ‘나와’라는 단어를 강조했다.
“너무 바빠서 날 잊어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제가 어떤 위치인지는 잘 알고 있어요.”
토끼는 아주 야무지게 대답했다. 빨간 입술이 세모로 벌어졌다.
‘아니, 모르는데.’
라이킨은 속으로 조용히 대답했다. 그녀는 몰라야 하고, 앞으로도 웬만하면 몰랐으면 좋겠다.
“그렇군요.”
그러나 겉으로는 그러냐고, 선선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다.
“그럼 일단 펜싱부터 하러 갑시다. 우리 바쁘신 공주님.”
우리 공주님이라니. 소렐은 속을 모르겠는 뱀파이어가 그녀의 부츠를 직접 집어 들어서 신겨주러 오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저씨는 사람 마음을 참 잘 들었다 놨다 하네.’
* 펜싱하우스는 글래스턴 대학의 수많은 칼리지 근처에 있었다. 그곳은 수많은 신사와 숙녀들이 들러서 무예를 익히고, 또 사교를 나누는 장이기도 했다. 뾰족하고, 동시에 유연하게 휘는 칼들이 날카롭게 맞부딪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옷을 갈아입고 온 소렐은 눈이 동그래져서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아저씨, 라이킨은 어디에 있는 거지?’
얼굴보호구를 쓰고 상대방을 몰아붙이고 있는 신사숙녀들과 가장자리에 서서 담소를 나누고 있는 이들은 전부 그녀 같은 시골뜨기는 상대도 해주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토끼는 커다란 눈으로 주변을 불안하게 바라보며 목적지가 없는 걸음을 옮겼다. 가장자리로 조그맣게 움직이면 괜찮지 않을까?
“펜싱연습복이 아주 잘 어울립니다.”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훤칠한 라이킨이 그녀를 내려다보며 웃고 있었다. 그들의 앞에 커다랗게 난 창으로 햇볕이 쏟아져 들어와, 그의 눈부신 금발을 더 빛나게 했다. 푸른 눈도 시리게 빛났다.
“라이킨……도요.”
소렐은 조금 늦게 대답했다. 그야말로 흰 펜싱복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소렐은 초보 중의 초보인지라 주의해달라는 표식까지 달고 있는데 말이다. 그녀는 입술을 조금 앙다물었다가 다시 열었다.
“열심히 잘 배워서, 제 한 몸 잘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라이킨은 얼굴보호구를 꼭 쥐고 있는 토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렐은 고대마법에 대해서는 쳐다도 보지 않는다. 그의 서재에는 마법에 관한 책도 제법 많았지만, 그녀는 결코 꺼내 보지 않았다.
“일단 이거 하나만 분명하게 짚고 넘어갈까요, 공주님.”
그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공주님이 아무리 펜싱을 배우고, 승마를 배운다 해도 그건 공주님의 체력을 늘리기만 할 뿐이지, 엘펜하임 기사단원을 상대로 결코 이길 수는 없습니다. 그건 타고난 힘의 차이 때문이라,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건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했다. 악력도 약한 토끼가 휘두르는 검이 아무리 날카롭다 해도, 엘펜하임 기사단원을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소렐은 울 것 같은 눈으로 고집스럽게 말했다.
“예, 그렇지요.”
그러니 마법을 다시 한번 들여다봤으면 좋겠는데. 뱀파이어는 빙긋 웃으며 그녀에게 끝이 뭉툭한 검을 들려주었다.
“자, 한번 들어봐요. 무겁지는 않습니까?”
“……괜찮은데, 저기, 라이킨?”
“예, 공주님.”
그는 누가 들으면 분명히 문제가 될 호칭을 나지막하지만 분명하게 붙였다. 사실 여기에서 문제가 될 호칭은 ‘공주님’보다는 그녀가 부르는 ‘라이킨’이었지만, 그는 그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라이킨이 절 가르치는 거예요?”
펜싱도? 소렐은 살짝 미간을 찌푸린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분간은 위험하니 그러는 편이 낫겠습니다만……, 다른 선생을 기대했던 겁니까?”
“네. 새로운 사람을 만날 줄 알았어요. 새로운……, 뱀파이어라거나.”
어쨌든 새로운 사람 말이다.
“제임스?”
새로운 뱀파이어 말이다! 지금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폴리아나 그린 말고! 이미 아는 사람 말고! 소렐은 약간 부루퉁해져서, 마찬가지로 짜증이 난 라이킨이 어쩔 수 없이 폴리아나와 그 일행을 상대하는 걸 지켜보았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내가 펜싱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인사해. 소렐, 이쪽은 폴리아나 그린. 같은 칼리지에서 일하는 교수입니다.”
먼저 소렐에게 폴리아나를 서둘러 소개시키고 끝내려는 라이킨의 말투는 그 와중에도 정중했다. 존대까지 쓰다니, 폴리아나가 놀라는 사이 라이킨의 시선은 다시 폴리아나에게로 돌아갔다.
“폴리아나, 이쪽은 소렐 칼리에르. 내 아내.”
언제 그녀의 이름이 그렇게 바뀐 건진 모르겠지만 소렐은 일단은 가만히 있었다. 라이킨은 저번에 폴리아나가 찾아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척 싸늘했기 때문이다.
“만나서 반가워요.”
폴리아나의 웃는 얼굴에 소렐 역시 화답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그럼 아쉽지만 다음에 또 보는 걸로 하지. 우리가 조금 바빠서.”
“아, 그러세요.”
그녀의 동행인과는 인사도 나누지 않은 라이킨이 쌩하니 돌아섰다.
“미안합니다. 다시 계속할까요?”
소렐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이킨의 크고 넓은 체구에 가려 그의 뒤에 있는 폴리아나는 더 이상 보이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라이킨이 가르쳐주는 펜싱의 기본을 배우느라 정신도 없었다.
“아주 조심해야 합니다. 다치지 않게.”
그는 좋은 선생이었다. 시종일관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녀를 상대해줬고, 차근차근 아주 쉬운 것부터 가르쳤다.
“뻗어봐요. 힘껏. 그렇지요. 잘하는군요.”
라이킨은 팔만 곧게 뻗어도 잘한다고 칭찬했다. 소렐은 때때로 그녀가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는 건 전혀 모른 채 새로운 운동을 배우는 데 열중했다. 뺨이 발갛게 물들도록 라이킨의 방어를 피해 검을 찔러보려 애썼다.
“발을 잘 내딛고요. 가볍게.”
라이킨은 너무 신나하는 소렐의 표정을 보며 같이 웃고 있었다. 그래. 그녀는 저렇게 신나서 몰두하는 게 가장 잘 어울렸다.
“여기 허점이 있지요.”
“으…….”
지기 싫어하는구나. 그가 그걸 알아차리고 웃을 때쯤이었다. 소렐의 눈에 갑자기 모든 것이 느리게 보였다. 그녀를 향해 찔러 들어오는 뾰족한 칼끝이 있었다. 라이킨이 아니다. 바깥쪽에서 그녀를 향해 휘어지는 칼끝은 또 달랐다. 소렐은 다치는 게 너무 싫었다.
‘막아야…….’
막을 거다. 막고야 말 거다. 또 당할 줄 알고? 하지만 그녀의 검이 움직이는 것보다 그녀를 공격하는 쪽이 더 빨랐다. 소렐의 손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움직였다. 소렐이 그 속도가 짜증나고 화가 났을 때였다. 그녀를 공격하는 검을 막으려 함께 달려드는 검들이 있었다. 라이킨이 그랬고, 소렐의 뒤쪽에서 흘러드는 검 두 개도 그랬다. 순식간에 검 다섯 개가 뒤얽혔다.
‘치워!’
밝은 빛이 번쩍거렸다. 챙! 시끄럽게 쇠붙이가 부딪치는 소리 뒤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검은 살짝, 아주 살짝 밀렸다. 다른 쇠붙이가 아닌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밀렸다.
“조심해야지요.”
여유 있는 여성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샤를렌은 검을 걷어내며 웃었다. 그녀의 검은 폴리아나와 라이킨, 그리고 폴리아나의 동행인인 자의 검과 얽혀 있었다. 얼핏 보면 폴리아나 일행의 검이 소렐에게 우연히 날아든 것을, 샤를렌이 걷어내고 약간 늦게 라이킨이 합세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렐은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뭐지?’
그녀를 공격하던 검을 밀어낸 보이지 않는 힘, 그걸 아빠는 보통 ‘마법’이라고 불렀다. 마법이 소렐을 보호했을 때, 그녀는 자신과 라이킨 사이에 길게 이어진 황금색 실을 발견했다. 마치 그의 머리카락처럼 찬란하게 빛나는 실이 분명하게 이어져 있었다.
“……괜찮습니까?”
소렐은 가장 먼저 그녀에게 물어보는 라이킨의 표정을 보며 저도 모르게 확신했다. 그도 그 황금색 실을 본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