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Call my name (5)2020.09.02.
환하게 웃는 모습을 제대로 보인 건 처음이라지만, 소렐 이드리스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이 무척 강했다. 끌려가서 다쳤으니 에벌린이나 라이킨을 조금이나마 의지하고, 또 도움을 받은 것뿐이지 아니었다면 엄청나게 두꺼운 벽을 쳤을 거다. 토끼가 뱀파이어나 호랑이를 무서워하는 거야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옷이요?”
방문 사이로 고개만 빼꼼 내민 소렐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녀의 눈은 다 가라앉았고, 이젠 흔적도 거의 찾기 힘든 상태였다.
“옷은 많이 있어요.”
“집에서만 입는 옷 다섯 벌 말이군요. 학교에 가려면 제대로 된 외출복이 필요해요.”
“그건 저도 알지만, 깨끗하게 입으면 되는 거고……, 그리고 저는 예비과정에 갈 때 필요한 책이나 필기구가 더 필요해요.”
“그건 당연한 거예요, 공주님.”
에벌린은 자그마한 토끼에게 친절하게 말했다. 소렐은 조금 시무룩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그럼, 저번처럼 또 재단사가 집으로 오나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어쨌든 옷은 중요한 거예요. 신발도 새로 사야 한답니다. 가방도 아주 질 좋은 것으로 고르도록 해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단호하게 말했다.
“책이며 공책 같은 것들을 넣을 수 있는 게 좋잖아요.”
“아, 그런 가방이에요?”
소렐의 눈이 또 반짝거렸다.
“언제 사러 가요? 에벌린이랑 가요?”
토끼의 경계심은 지금 조금 풀어졌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까 은행부터 가야 할 텐데…….”
“하루에 하나씩 하는 게 좋겠어요. 그리고, 공주님?”
에벌린은 단호하게 소렐을 불렀다.
“네, 네?”
조금 움츠러든 소렐이 대답했다.
“앞으로 공주님이 입고, 신고, 들고, 사용할 물건들을 고르는 안목은 아주 중요해요. 잘 모르겠다 싶을 때는 무조건 가장 비싸고 예쁜 걸 사도록 해요. 사용하다 보면 어떤 것이 좋은 물건인지 알게 될 거예요.”
“……중요한 건가요?”
“네. 매우 중요해요. 좋지 않은 가방을 사서 책이며 필기구를 잔뜩 담았는데 가방끈이 뚝 끊어진다면 그거만큼 속상한 것도 없겠지요?”
소렐은 으, 하고 인상을 찌푸렸다.
“옷을 고르는 건 내가 도와줄게요. 가방이나 필기구, 그리고 책은 제임스 교수님이 잘 아실 테니 함께 외출해요.”
뱀파이어랑 또 외출을 한다고? 소렐은 깜짝 놀랐다.
“같이요?”
“그럼 혼자 갈 수 있어요?”
“아뇨…….”
결코 그럴 수는 없었다. 소렐은 아직까지도 외출하는 것이 무서웠다. 뱀파이어와 나갔다가 큰일을 겪었는데 또 함께 나가라고?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글래스턴 전체가 그녀에게 위험했다. 이 집도 마찬가지고,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챙겨주는 저 호랑이 아주머니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소렐에게는 예비과정에서 반드시 읽어야 할 독서목록이 있었다.
“갈까요?”
소렐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상하게 바쁜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이상하게 한가한 뱀파이어와 마주했다.
“서재에 가봤는데요.”
우물쭈물하더니 라이킨에게 대뜸 한다는 말이 또 책 이야기다.
“예.”
“여기, 이 책들이 필요한데 없어요.”
“어디 한번 볼까요.”
뱀파이어의 목소리는 아주 낮고 차분하다. 소렐이 겁을 많이 먹고 있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인 걸까? 그는 항상 정중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깨끗하고 흰 셔츠를 입은 그는 키도 무척 커서, 소렐이 한 발 물러나서도 한참 올려봐야 했다.
“……예. 이 책들은 전부 학생들이 보는 책이라, 서재에는 없겠군요. 이걸 사려면 대학 앞으로 가야겠습니다. 오늘은 이것만 사면 됩니까?”
“돈이 모자라면 안 되니까 은행에도 갔다 와야 해요.”
소렐은 조금 머뭇거렸다.
“나가도 되나요?”
“공주님이 외출하고 싶다면 언제든 가능합니다. 저번과 같은 일은 결코 없을 거고요. 그때 일은 정말 미안합니다.”
쫄딱 망한 왕가의 공주는 공주님이라는 호칭부터 어색하다. 그런데도 뱀파이어는 그 호칭을 꼬박꼬박 붙여주면서 예의를 갖춘다. 소렐은 지금까지도 적응이 되지 않고, 또 어색하기만 한데.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괜찮아요.”
하지만 그렇게 끌려가는 건 정말 너무 끔찍했다. 소렐은 저도 모르게 옷자락을 구기며 꽉 쥐었다.
“……그럼 외투를 입을까요. 모자도 쓰는 게 좋겠습니다. 은행부터 가지요.”
“오늘은 바쁘지 않아요?”
“내가 언제 바빴던 적이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지만, 라이킨은 무척 바쁜 사람처럼 생겼어요.”
톡 말한 뒤 외투와 모자를 가지러 가는 소렐의 뒷모습이 차라리 더 바빠 보인다. 라이킨은 소렐을 쳐다보다 고개를 돌려서 유리에 비친 제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긴 게 문제인가……?’
남편이라고 하기엔 영 수상하게 생긴 건가? 그래서 저러나? 라이킨은 저 어린 토끼 공주님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제임스 교수님. 공주님의 공부 가방이며 숙녀용 가방도 사야 한다는 거 잊지 말아요. 필기구도 필요하다고 했어요.”
지나가던 에벌린이 그의 머릿속에 ‘사야 할 목록’을 새로 집어넣었다.
“에벌린, 내가 바쁜 사람처럼 생겼습니까?”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고 분명히 말씀드렸을 텐데요. 올 때 신선한 버터도 사 와주세요. 우유 배달부가 버터를 빠트렸지 뭐예요.”
“에벌린이 차라리 나보다 더 바빠 보이는데?”
“이상한 소리 그만하라니까요.”
작은 토끼의 눈에 다른 여자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고, 무척 바빠서 함께 외출조차 못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남편이라. 여러모로 신뢰를 얻기는 힘든가 보다. 라이킨에게는 소렐의 신뢰가 무척 필요한데 말이다.
* 다친 이후로 처음 하는 외출이다. 라이킨은 소렐의 곁에 내내 붙어서 훌륭한 경호원 역할을 했다. 같은 사고를 두 번 반복하는 것만큼 그가 싫어하는 일도 없었기에 라이킨은 철저하게 그녀를 지켰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어요.”
무엇보다 외출하는 걸 조금 두려워하던 소렐이, 바깥바람을 쐰 뒤에는 무척 표정이 밝아졌다.
“예. 무척 따뜻해졌군요. 이젠 얇은 옷차림도 준비해야겠습니다.”
글래스턴에 자욱하던 안개는 해가 나면서 좀 걷혔다. 소렐은 묵직한 금화주머니를 은행원에서 건네받은 뒤 돌아섰다.
“……무겁네요.”
“그러게요. 공주님도 수표책을 쓰기 시작하는 게 좋겠습니다.”
“아, 그럼 이 자리에서 발급해드릴까요?”
경쾌한 은행원의 말에 소렐은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아, 칼리에르 교수님.”
그녀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또다시, 외출을 했는데 누군가가 라이킨에게 아는 척을 했다. 라이킨은 그러나 그녀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셀레스트 교수.”
갈색 머리카락을 가진 덩치 큰 남자다. 라이킨보다 약간 작았다. 두 남자는 악수를 나누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요.”
라이킨은 조용히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표책은 바로 나올 거예요.”
은행원의 목소리에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라이킨과 함께 온 체구가 자그마한 아가씨를 내려다보았다. 뱀파이어인가? 아니, 뱀파이어는 아니다. 상당히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에 입술이 붉었다.
“곧 새 학기가 시작이군요.”
라이킨은 소렐에게로 향하는 카메론의 시선을 잡아챘다. 그의 푸른 눈은 카메론 셀레스트, 신성기사단 엘펜하임 단원을 똑바로 쏘아보고 있었다.
“예. 강의 준비야 이젠 그럭저럭 할 만합니다. 벨파이어 칼리지에서는 학기 준비를 새로 하지 않아도 되니, 걱정은 없으시겠지요. 부럽습니다.”
생각보다 어리다. 카메론은 라이킨이 슬쩍 가리는 앳된 아가씨를 본 뒤, 다시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저런 아가씨를 집에 들였다고? 폴리아나 그린은 거절하고?
‘이 새끼가 진짜 하다하다 양심을 팔아먹었나…….’
딱 봐도 수백 년은 기본으로 산 뱀파이어면서 저렇게 어린 아가씨를 집에 들여? 결혼은 제대로 한 건가? 아무리 엘펜하임의 글래스턴 첩보업무를 담당하며 온갖 인간군상과 마주친 카메론이라 해도, 이 나이 차는 용납할 수가 없었다.
‘아니, 겉모습은 저렇게 어려도 사실은 수백 년을 산 여자일 수도 있지.’
모든 편견은 사라져야 하는 것이다. 카메론은 좀 더 신중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셀레스트 교수님께서도 벨파이어 칼리지로 넘어오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거길 아무나 갑니까?”
하하하, 카메론은 일단은 웃었다.
“원하시는 연구는 마음껏 할 수 있는데요. 셀레스트 교수님은 솔직히, 들어오지 않으시는 거지 못 들어오는 건 아니잖습니까.”
“칭찬이 과분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때 소렐은 은행원에게서 수표책을 받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끝났습니까? 잠시 소개를 시켜드려도 될까요?”
카메론은 처음에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말인 줄 알았다. 그러나 그 작고 예쁘장한 아가씨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라이킨이 그녀에게 허락을 구한 것이란 걸 깨달았다.
“소렐, 이쪽은 글래스턴 대학 교수님이신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님입니다. 이번에 대학에 입학하면 만나게 될 분이지요. 교수님. 이쪽은 내 아내 소렐입니다.”
아내라고? 카메론 셀레스트는 노골적인 소개에 당황하여, 라이킨이 일부러 소렐의 성은 빼버렸다는 것에 전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긴 딱히 부자연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결혼을 하면 여성이 아주 위세가 대단한 가문 태생이 아닌 이상 남편의 성을 따르는 게 통속적인 일이니 말이다. 그래서 카메론 셀레스트는, 소렐을 소렐 칼리에르라고 생각했다.
“결혼? 결혼을 하셨다고요? 아, 안녕하십니까.”
“예. 그리고 제가 좀 낯부끄럽지만, 아내가 올해 대학에 입학할 예정인지라, 최대한 알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판단했습니다.”
올해 대학에 입학한다고? 카메론 셀레스트는 이 아가씨의 원래 나이가 사백 살이든, 오백 살이든 간에 일단은 라이킨을 똑바로 쏘아보았다.
‘도둑놈.’
“으음……,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니지만 신입생과 대학교수라니, 고민하실 만도 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치르셨군요. 참 놀랍습니다만,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제 아내가 입학하면 모쪼록 교수님께서 잘 도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래도 대학생활을 제대로 즐겨야 하지 않겠습니까.”
한마디로 입 닥치고 있으라는 뜻이었다.
“예, 그렇지요. 모든 학생들은 그래야 하지요.”
정신이 얼떨떨해진 카메론 셀레스트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소렐은 조그만 목소리로 예의 바르게 인사하며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아, 이런. 숙녀가 먼저 악수를 청하게 하는 결례를 저지르다니! 카메론은 자그마한 숙녀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직 밀린 일이 많이 남아서요.”
“아, 예. 살펴 가십시오.”
“학교에서 뵈어요.”
소렐은 또렷하게 말하며 인사한 뒤 뱀파이어가 내미는 팔을 잡고 떠났다. 사람들이 조용히 오고 가는 은행 한구석에 선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입을 천천히 가렸다.
“……저 도둑놈.”
진짜 결혼이었다니, 폴리아나 그린이 그토록 우울해한 것도 설명이 된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결혼? 결혼이라고? 이거야말로 엘펜하임이 주목할 일이 아닌가!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멈칫거리다, 정신없이 어디론가 향해 가기 시작했다. *
“죄송합니다.”
라이킨은 다시 한번 정중하게 사과했다.
“뭐가요? 왜요?”
소렐은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 소개한 것 말입니다.”
“글래스턴 대학의 교수님이라면서요?”
“그게 그 남자의 유일한 직업은 아닙니다.”
라이킨은 소렐을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사과한 것이고요.”
“그럼 다른 직업은 뭔데요?”
“신성기사단 엘펜하임 소속입니다. 글래스턴 대학 담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소렐은 움찔 놀랐다. 펠릭스 이드리스가 엘펜하임에 대해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알고 있군요.”
“……네.”
“엘펜하임이 헬레인 왕가를 멸망시켰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소렐은 결국 걸음을 멈추고 두려운 눈으로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지금 엘펜하임이 터를 잡고 있는 곳이 바로 과거에 헬레인 왕가가 자리했던 곳이지요.”
라이킨은 그녀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님.”
그는 자신의 팔을 잡고 있는 소렐의 손을 조심스럽게 덮어서 토닥였다.
“공주님은 무엇을 해도 괜찮고, 어느 곳에든 관심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만 저 남자는 조심하십시오.”
토끼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저자의 수하가 저번에 공주님을 습격한 겁니다.”
소렐은 숨을 잠시 멈췄다가, 소리 없이 들이마셨다.
“……그러면 학교에 입학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글래스턴 대학 자체가 소렐에게 위험한 장소가 아닌가?
“대학에는 나도 있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내가 곳곳에 심어둔 눈과 귀가 있습니다. 공주님이 위험하지 않게 항상 지킬 이들을 준비시켜뒀으니, 그 정도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번 사건은 내가 방심한 탓입니다.”
그래서 그리 정중하게 사과를 한 거였나. 소렐은 혼란스러운 얼굴을 들었다.
“나인 걸 알았을까요?”
“곧 공주님의 성이 이드리스란 걸 알게 되겠지만, 아닙니다. 그때는 전혀 몰랐습니다. 지금도 모르고 있고요.”
소렐은 이끄는 라이킨을 따라 멍하니 걸음을 옮겼다.
“……아빠가요.”
그녀는 조금씩 띄엄띄엄 말하기 시작했다.
“엘펜하임은 자신들에게 없는 것을 내세우는 집단이라고 했어요. 그러니까, 신성하지 않으니까 신성하다고 우기는 거고, 제대로 된 힘이 없으니 힘을 갈망하는 거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나는 항상 펠릭스의……, 아버님의 통찰력을 존경했습니다. 대단한 능력이지요.”
라이킨은 조용히 대답했다. 아직 회색빛이 가득한 거리에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고 있었다. 그의 푸른 눈은 그 인파와 오래된 도시를 한 번에 담았다.
“맞는 말입니다. 나는 그래서, 공주님이 엘펜하임만큼은 경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들이 얼마 되지 않는 마법사와 마녀, 그리고 수인들까지 흡수한 지금, 제대로 대립하고 있는 유일한 무리는 우리 뱀파이어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고요.”
그러니 토끼가 손을 잡을 곳은 뱀파이어들밖에 없다는 진실이자, 동시에 아주 교활한 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