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Call my name (3)2020.08.26.
폴리아나 그린은 워낙 커다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보다 한 뼘 정도 작았다. 두 사람은 얼핏 보면 비슷한 부류로 보였다. 둘 다 무척 화려하게 생겼고, 언뜻 엿보이는 싸늘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도 같았다. 그리고 두 사람 다 뱀파이어였다.
“논문은 사무실에 있어. 저번에 빌려 가면 됐잖아.”
하지만 사이는 별로 좋지 않은 걸까? 소렐은 라이킨이 유난히 저 예쁜 언니에게 선을 심하게 긋는다고 생각했다.
“나 안 들여 보내줄 거예요?”
그러나 폴리아나 그린은 그런 냉대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웃었다.
“내가 저럴 줄 알았지.”
그녀와 함께 쪼그려 앉은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밖에 비도 오고, 난 다리도 아픈데.”
소렐은 어렴풋이 뭔가를 알 것 같았다.
“하루 종일 걸어도 아플 다리가 아니잖아.”
토끼는 아주 예민했다. 그래서 바로 알았다.
‘날 보러 온 거구나.’
그래서 저렇게 필사적으로 안으로 들어오려고 하고, 커다란 라이킨의 어깨너머를 슥 훔쳐보고 있는 거였다.
“돌아가.”
라이킨은 딱 잘랐다.
“너무하네요, 정말.”
폴리아나 그린은 언뜻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어느 사내든 흔들어 버릴 수 있는 미소였지만 라이킨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쳐다보기만 했다.
“딱히.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네가 너무한 거지.”
폴리아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에게도 익숙한 이 집에, 낯선 체취가 떠돌고 있었다. 예민한 뱀파이어의 후각은 그 연약한 들풀과도 같은 내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난 가끔 초대하지 않아도 찾아왔잖아요. 이 집의 구조도 다 알고 있는데, 새삼스럽긴.”
소렐은 눈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그녀는 이 집의 구조를 아직도 다 몰랐다. 당연했다. 그녀는 여기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니까. 그런데 꼭 소렐더러 들으라고 하는 말 같았다.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눈치챈 걸까?’
그러면 라이킨도 알아차렸겠지? 소렐은 눈만 깜빡거리고선 후다닥 들어갈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는 궁금한 건 봐야 직성이 풀렸기 때문이다.
‘듣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였다면 라이킨이 날더러 안으로 들어가라고 했을 거야!’
그러나 가만히 두는 걸 보면 딱히 중요한 이야기도 아닌 거다. 소렐은 쪼그리고 앉아서 열심히 그 예쁜 언니를 바라보았다.
“이젠 이 집의 주인이 나뿐만이 아니라서.”
라이킨은 아주 정확하게 폴리아나가 싫어할 만한 말을 던졌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은 나 혼자 허락할 수가 없어.”
폴리아나는 약간 얼굴을 찌푸리고 눈을 크게 뜬 채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제임스.”
“돌아가.”
그녀의 표정은 굳이 설명하자면, 충격과 놀라움에 가까웠다.
“이 집의 주인이라고요?”
폴리아나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렸다는 것을 알아차리고는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어떻게 해서든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는 노력이었다.
“그래. 내 아내가.”
라이킨은 냉랭하게 말했고, 소렐은 눈이 동그래졌다.
‘이 집이 내 거라고?’
깜짝 놀란 소렐이 에벌린을 바라보았다. 에벌린은 그저 씩, 호랑이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줄 뿐이다.
‘우와…….’
소렐은 그녀가 살던 작은 시골집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훨씬 더 값이 나가는 타운하우스의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논문은 내 비서에게 말해서 빌려 가도록 해. 나는 돌봐야 할 사람이 있어서.”
명백한 축객령이다. 폴리아나는 뭐라 더 말을 하려다가, 그건 그녀가 가장 싫어하는 ‘구질구질한’ 짓이라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라이킨에게 그렇게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폴리아나는 깔끔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내가 실례했네요. 그럼 가볼게요.”
라이킨은 고개만 끄덕였다.
“다음에 또 봐요.”
폴리아나 그린은 아주 우아하게 떠났다. 사실 그녀는 라이킨을 안고 뺨을 맞대는 인사를 ‘보란 듯이’ 하고 싶었지만, 라이킨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럴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소렐은 어느샌가 휙 가버린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다시 현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폴리아나 그린 교수가 얄팍한 모피코트를 둘러 입은 채 서둘러 마차를 잡으러 가는 모습이 닫힌 문 밖으로 슬쩍 보였다.
‘진짜 우아하네.’
‘우아하다’는 단어를 현실에서 사용한다면, 폴리아나 그린에게 어울리는 것 같았다. 소렐은 계단 사이로 목을 빼고 바라보았다.
“위험합니다, 공주님.”
방금 전까지 말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온도의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떨어지면 다쳐요.”
계단에 얌전히 앉아 있던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라이킨이 그녀를 향해 웃고 있었다.
“뭘 하고 있었습니까?”
소렐은 뒤늦게 조금 부끄러워졌다.
“구경이요…….”
“재미있었습니까?”
“신기했어요.”
“신경 쓰지는 마십시오. 공주님이 신경을 쓸 만한 방문객은 아니었습니다.”
“그렇군요.”
소렐은 새침하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어쩐지 대단한 공주가 된 기분이 들었다. 라이킨이 하는 말, 보여주는 행동, 눈빛, 그 모든 것들이 그녀가 그런 기분을 느끼게 했다.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아요?”
“안 될 게 뭐가 있습니까.”
토끼는 언제나 조심스럽고, 예의 바르다. 그게 예뻤다. 라이킨은 느긋하게 웃었다. 건방지게 주제도 모르고 쳐들어오는 뱀파이어와는 차원이 다르다.
“정말 이 집이 제 거예요? 죄송해요, 엿들었어요.”
그녀는 말하다 말고 얼굴이 붉어져서 사과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은 공주님이 들어도 전혀 상관없고, 하찮은 대화라는 뜻이었습니다만.”
소렐은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예. 공주님 것도 맞지요. 결혼이란 그런 겁니다.”
“엄청 잘 아시네요. 해보셨어요?”
이건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토끼 특유의 엉뚱한 호기심이다. 순진하게 쳐다보는 얼굴에 라이킨은 소리 내어 웃었다.
“나도 결혼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결혼을 했다면 공주님이 안주인인 거지요.”
소렐은 엄청난 걸 깨달았다는 표정으로 라이킨을 바라보았다.
“음, 잘하도록 열심히 노력할게요.”
“딱히 잘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소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야지요.”
소렐은 커다랗고, 선이 분명한 남자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포식자의 손이다. 그는 아마 맨손으로도 그녀의 연약한 손을 부숴버릴 수 있을 것이다.
“바닥이 찹니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그녀가 끔찍한 일을 당했을 때 그녀를 꽉 안아서 데리고 나왔다. 소렐은 그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펜싱을 빨리 배우고 싶어요.”
“공주님은 뭐든 빨리 배울 겁니다. 책을 읽는 속도도 어마어마하던데요.”
“그게, 집에 있던 책들은 다 읽어버려서 더 읽을 책이 없었거든요. 새 책이 많아서 너무 좋아요.”
라이킨은 소렐을 데리고 다시 계단을 올라가려다 멈칫거렸다. 집에 있던 책들을 다 읽어버렸다고? 분명히 펠릭스 이드리스가 가지고 있던 아주 어려운 책들이 가득했는데? 그는 멈칫거리다가 다시 픽 웃었다.
‘그 머리가 어디 가나.’
소렐 이드리스는 부모에게서 아주 좋은 머리를 물려받은 게 분명했다.
“승마, 펜싱, 또 뭘 배워요? 글래스턴 대학에는 교양을 두루 갖춘 학생들이 가득하겠죠? 가서 망신이나 당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그게 걱정이었다. 소렐 이드리스는 시골뜨기다. 글래스턴에 오는 세련되고, 좋은 집안 출신인 학생들에 비해 촌스럽고 아는 것도 많지 않아서 실수를 하면 어쩌나?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라이킨은 웃었다.
“……방금 온 그 손님은 누구예요?”
계속 웃고 있던 라이킨의 얼굴에 그제야 금이 갔다.
“……뱀파이어입니다.”
“그건 저도 보면 알아요.”
소렐은 라이킨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집에 자주 오신 분 같아서요. 제가 알면 곤란한 분인가요?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라이킨은 까만 눈으로 그를 직시하는 소렐을 보다,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웃었다. 두 뺨은 통통하고, 시선은 한없이 곧다. 소렐 이드리스는 작은 새끼토끼지만, 폴리아나 그린에게 아주 밀려서 구석에 앉아 훌쩍거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글래스턴 대학의 교수입니다. 뛰어난 사람이지요. 나와 오랫동안 알고 지냈고요. 알다시피 나는 오래 살아서, 아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그는 계단 꼭대기에서 소렐을 마주했다.
“그리고 방금 본 그 여자와 같은 정도의 거리를 나와 유지하는 사람은 무척 많습니다. 공주님에게 숨기는 사연이나 관계가 있는 건 절대로 아닙니다.”
소렐은 그를 보면서 눈을 잠시 깜빡거렸다.
“그렇군요.”
라이킨은 그녀의 대답이 어쩐지 석연치 않았다. 납득한 목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내 말을 믿을 수 없습니까?”
“믿을 수 없다기보단, 제가 간섭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해요.”
“어째서요?”
“결혼은 갑작스러운 거였잖아요. 저는 이 결혼이, 그러니까…….”
맨발로 슬리퍼만 신고 선 소렐은 잠시 머뭇거렸다.
“남들과 똑같은 결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라이킨은 라이킨의 인생이 있잖아요.”
맙소사. 라이킨은 속으로 신음했다.
“이 결혼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모르는 거지만, 아끼는 사람이 있다면…….”
“말을 끊어서 미안합니다만.”
라이킨은 또박또박 그를 보며 환장할 소리만 골라 하는 소렐의 말을 잘라버렸다.
“결혼은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지속될 거고, 따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생각을, 아니, 어디서 그런 걸 배운 겁니까?”
그는 기가 막히는데 소렐은 오히려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저는 부모님이 정해주신 결혼이 사랑이 가득할 거라고 믿을 정도로 순진하지는 않아요. 스무 살이라도 알 건 다 안다고요.”
책들을 너무 많이 읽은 나머지 쓸데없는 구석에서 조숙한 아내는 또랑또랑하게 말했다.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며 그녀와 함께 나란히 걸어갔다.
“순식간에 나는 난봉꾼에 오입질이나 해대는 놈이 되었군요.”
“그렇게 취급한 건 아니고요. 그럴 가능성이 있는 문제에 대해 서로 미리 양해를 구하는 거죠.”
라이킨의 걸음이 멈췄다.
“‘서로’? 공주님, 잠시만. 지금 나 말고 다른 남자와 훨씬 더 가깝고 사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다는 겁니까?”
“서로 양해를 구한다면 그래도 되잖아요. 남편만 그래도 되고 아내는 그러면 안 된다는 건 너무 억울한걸요.”
라이킨은 픽 웃었다. 이젠 기가 막히다 못해, 그냥 종알종알 말하는 소렐이 귀여워 보였다.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하긴 어린 아가씨가 갑자기 뱀파이어와 결혼을 하려니 무섭기도 할 거다.
“그러니 공주님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내가 가장 가깝고, 또 사적인 관계를 가질 여성은 당신으로 족합니다.”
순식간에 라이킨의 푸른 눈이 번뜩이며 빛났다.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어깨를 조금 움츠리고 그를 바라보았다.
“공주님도 그랬으면 좋겠군요.”
그랬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그래야만 한다’로 들리는데! 그러나 이 겁은 많으면서도 할 말은 해야 직성이 풀리는 토끼는 당돌하게 고개를 들었다.
“네. 그렇지만 마음이 바뀐다면 언제든지 솔직하게 말씀해주세요.”
‘솔직하게’라는 말에 힘이 꾹 실렸다. 다른 건 몰라도 폴리아나 그린과 같은 사람에 대해 거짓말을 하는 건 싫다는 이야기다.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만, 만일 그런 일이 생긴다면, 예. 약속하지요.”
그는 그녀가 어떤 대답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래서 내키지는 않았지만 대답을 해주었다. 어쨌든 작은 토끼 입장에서는 모든 게 다 겁나고 믿을 수가 없을 테니 말이다. * 글래스턴 대학의 케르고 칼리지 소속,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곳곳에 깔아둔 첩자들과 접촉했다. 겉보기엔 교양이 있고 품위가 있는 지식인으로 보이지만, 교수는 사실 뒷골목 사정에도 밝았다. 셀레스트 교수는 아주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교수와 마찬가지로 신성기사단 ‘엘펜하임’을 위해 일하는 상인이며 배달부와 몰래 접촉했다.
“요즘에 특이한 동향은 없나?”
평소와 같았으면 ‘딱히 변한 건 없습니다요’라고 말하던 상인이 이번에는 다른 대답을 했다.
“그 뱀파이어 집에서 사가는 식료품이 늘었습니다.”
“그래?”
“예. 우유도 더 배달시키고, 계란도 더 많이 사갔습니다. 밀가루나 각종 채소는 말할 것도 없지요. 분명히 사람이 하나 더 늘어난 겁니다.”
교수는 흐음, 하고 턱을 매만졌다.
“또?”
이 상인은 셀레스트 교수 아래에서 여러 첩자들과 연락을 하며 정보망 구실을 해주었다.
“그리고 여자인가 봅니다.”
“뱀파이어의 집에 들어온 사람이?”
“예. 젊은 여자가 쓸 법한 물품이 자꾸 배달된다고 하더군요. 조만간 ‘그’ 루텐버그 남매가 직접 들를 거라고도 합니다.”
“루텐버그 남매라면, 그 유명한 재단사?”
“예. 누가 봐도 여자지요?”
귀부인들과 숙녀들의 옷을 만드는 걸로 유명한 루텐버그 남매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집에 들른다, 라.
“그 뱀파이어가 오래 살아서 그런지 상당히 취향이 고루하군. 요즘에는 백화점에 가는 게 세련된 방식 아닌가?”
“아이구, 말도 마십쇼. 백화점에서도 배달부들이 하루에도 너덧 번씩 옵니다. 분명히 그 집에 여자가 들어온 겁니다.”
젊은 여자와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 카메론 셀레스트 교수는 고맙다며 상인에게 돈을 슬쩍 쥐여 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눈을 떼지 말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 뱀파이어들은 우리 신성한 기사단의 오랜 숙적이란 걸 절대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그랬다. 엘펜하임은 뱀파이어들과 계속해서 오랜 세월 동안 대립해왔다. 신성한 기사단이라는 조직은 차가운 냉혈동물들과는 어쩔 수 없이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셀레스트 교수는 다시 대학으로 돌아왔다. 케르고 칼리지로 돌아간 건 아니다. 교수는 벨파이어 칼리지의 한구석에 슬쩍 스며들었다.
“폴린.”
카메론 셀레스트는 자리에 앉아 있던 폴리아나 그린을 다정하게 불렀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폴리아나 그린이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야?”
엘펜하임의 수족에게 뱀파이어 폴리아나 그린은 냉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오랫동안 사모했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집에 젊은 여자가 들어왔다는데 과연 냉정할 수만 있을까? 카메론 셀레스트는 결코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