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Call my name (2)2020.08.22.
잔뜩 부어 있는 소렐의 눈가는 여전히 울긋불긋했다. 붉은색, 보라색, 검은색이 무서울 정도로 뒤덮인 데다 아직까지도 부기가 빠지지 않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구석이 분명히 있었다. 라이킨은 졸음에 겨워하면서도 그에게 감사 인사를 잊지 않은 소렐을 보고 무척 즐거워했다.
“내일 아침에 말해도 되잖습니까.”
“집에 오셨으면 인사도 해야 하잖아요.”
소렐은 잠에 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녀오셨어요……?”
라이킨은 결국 또 웃어버렸다.
“예, 다녀왔습니다.”
“내일도 늦게 오세요?”
“내일은 왜요?”
소렐은 대답을 하려다, 고개를 숙이곤 덮고 있던 담요를 만지작거렸다.
“……제가 책을 읽다가…….”
고개를 숙였지만, 라이킨의 시선은 그녀의 눈을 따라왔다.
“모르는 게 많아서, 물어보려고…….”
아저씨가 많이 바쁘시진 않을까? 시골에서 자란 애라서 모르는 게 많다고 한심하게 보는 건 아닐까? 불안하고 부끄러워서, 손이 괜히 꼼지락거렸다.
“교습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다쳤는데 벌써 공부를 시작하려고요?”
“책을 읽을 수는 있잖아요.”
“……앞으로 되도록 외출을 삼가야겠군요. 그래도 당분간은 더 쉬도록 해요.”
그는 몸을 일으키고 소렐에게 손을 뻗었다. 그녀의 발이 달랑 들어 올려지고, 담요와 책들이 소파와 바닥에 후드득 떨어졌다. 그래도 라이킨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표정이었다.
“책은 너무 읽지 않도록 하고요.”
“심심하단 말이에요.”
“내가 당분간 집에 있겠습니다.”
“저 때문에 따로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소렐은 작은 손을 내저었다. 그녀를 안고 걸어가는 라이킨은 키가 어찌나 큰지, 아래를 보면 아찔할 정도였다.
“아니, 나도 외출하는 게 요즘은 썩 내키지 않는군요.”
“왜요?”
글래스턴은 사람들도 많고, 저 바깥으로 나가면 온갖 모험들이 가득할 것 같은데 말이다. 물론 소렐은 불운한 일을 당해 몹시 두렵긴 했지만, 그 일이 그녀의 호기심을 완전히 꺾지는 못했다.
“요즘 바깥 일이 좀 피곤해서.”
그는 그렇게만 둘러대며 침실로 걸어갔다. 소렐의 침실은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들어갈까요?”
소렐은 멋도 모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보다.”
라이킨은 소렐을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공주님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헬레인 왕가가 그렇게 중요하고 엄청난 왕가였나? 잘 모르는 소렐은 그저 아픈 눈을 간신히 뜨고 있다가 물을 뿐이다.
“공주가 그렇게 중요해요?”
소렐은 ‘신분’을 물어본 것이지만, 라이킨의 귀에는 ‘소렐 이드리스’가 중요하냐는 질문으로도 들렸다. 안다. 그런 의미로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안다. 알지만 그는 제멋대로 대답했다.
“중요합니다.”
“……하지만 이미 다 사라진 왕가인데요.”
라이킨은 소렐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공주님이 살아 있다면 사라지지 않은 겁니다. 신경 쓰지 말고 어서 자요. 늦었습니다.”
소렐은 아무것도 아닌 시골 소녀에게 무척 정중한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좋은 꿈 꿔요, 아저씨.”
“……라이킨. 라이킨이라고 불러요.”
“네?”
소렐은 고개를 좀 더 들었다.
“남편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잖습니까. 이름을 부르도록 해요.”
“하지만 아저씨 이름은 제임스 아니에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아닌가. 그때 창문에서 새어나온 새파란 달빛에 비친 뱀파이어의 표정은 묘했다. 소렐이 전혀 알 수 없는, 그래서 처음 보는 미묘한 표정이었다.
“아닙니다.”
그는 간단하게 말했다.
“라이킨이라고 불러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도 그를 제임스라고 부른다. 소렐은 어렴풋이, 그 이름을 부르는 것이 ‘특권’이라는 걸 알았다. 제임스라는 흔한 이름 말고, 그만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이름을 굳이 부르라는 건 이유가 있겠지.
“네.”
그래서 소렐은 공주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보다 더 특별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부를게요.”
조금 수줍고, 동시에 새침한 목소리였다.
“잘 자요, 공주님.”
“네, 라이킨.”
아주 오랜만에 이름이 불린 자는 픽 웃으며 침실 문을 닫고 나갔다. *
‘이거 이상하다.’
글래스턴 대학의 케르고 칼리지 소속 교수 카메론 셀레스트는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오랜 세월 동안 뱀파이어들과 대립각을 세워온 경험에 의하면, ‘이상하다’는 건 곧 위험한 신호를 의미했다. 그러니까 위험하다. 무척 위험했다.
‘없잖아.’
뱀파이어들 중 가장 위험하다 할 수 있는 뱀파이어인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그 저주받을 존재 주위를 항상 감시하던 이들에게서 연락이 끊어졌다. 아, 물론 애송이들이긴 했다. 별 다른 기대도 하지 않았고,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시체가 없잖아.’
그러나 시체는 남아 있어야 했다. 뒷골목에 시신의 흔적이라도 남았어야 했다. 그런데 그 시신들이 없다. 아, 물론 동네 양아치들의 시신으로도 충분히 수익이란 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증발한 건 이상했다.
“목격자도 없고…….”
글래스턴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셀레스트 교수는 흠, 하고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그냥 넘어가도 될 것 같은 일이지만, 어쩐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분명히 뱀파이어가 주변에 기웃대는 놈들이 성가시고 귀찮아서 처리한 것 같긴 한데 말이다. 교수는 망설임 끝에 맡겨진 본분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눈’ 여섯이 실종 유려한 글씨가 종이 위로 그려졌다. 눈 여섯 개가 사라졌다. 다시 말해 세 사람이 실종되었다. 뱀파이어의 흡혈 욕구를 채우기 위한 희생제물인가, 아니면 무엇인가. 이제 그 이유를 알아낼 차례였다.
*
‘계속 외출하고 싶었는데.’
소파 등받이를 잡고 창밖을 내다보던 소렐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토끼 귀가 나와 있었다면 틀림없이 어깨와 마찬가지로 축 처졌을 것이다. 뒤에서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던 라이킨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넓기만 하고 조용하던 타운하우스에 작은 아가씨가 들어왔더니 분위기마저 바뀌었다.
‘언제 낫는 거지……?’
눈의 부기가 빠지면 나가볼 수 있으려나? 소렐은 이젠 눈을 작게 뜨는 것에 익숙해졌지만, 거울 속의 자신이 너무 충격적인 모습이라 속상했다.
“공주님.”
라이킨은 소렐이 놀라지 않도록 나지막한 목소리로 불렀다. 그래봤자 화들짝 놀라 휙 돌아보고, 숨을 조그맣게 들이켰지만 말이다. 연약한 숨이 힉 하고 넘어가는 소리가 안쓰럽고, 동시에 몹시 신경 쓰였다. 토끼와 뱀파이어가 상극이긴 하다. 헬레인 왕가의 토끼들이 그를 보면 몹시 불편하다는 표정으로 뒷발을 탕탕 굴러대던 걸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긴 했다. 하지만, 소렐 이드리스는 토끼 혼혈인 동시에 그의 아내이기도 했다.
‘너무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문간에 선 그는 좀 더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가도 됩니까?”
소렐은 여전히 무릎을 딛고 소파 위에 앉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라이킨은 그제야 안으로 들어섰다.
“안에만 있으려니 답답하지요?”
“아뇨.”
소렐은 아직까지도 낯을 가린다. 그럴 만도 했다. 평생 작고 작은 토끼로 살아오면서, 보아하니 납치도 한 번 당했던 경험이 있는 모양인데 뱀파이어와 호랑이가 있는 집은 낯설 수밖에 없다.
“괜찮아요.”
자그마하게 붙이는 말에 라이킨은 미소를 지었다.
“약 좀 바릅시다.”
소렐은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만 있었다. 사건이 났을 당시,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기절한 소렐의 머리카락을 빗기다가, 그 탐스러운 머리카락이 빗에 걸려 우수수 빠져나온 것을 나중에 몰래 라이킨에게 보여주었다.
‘가엾게도 어린 아가씨 머리채를 얼마나 세게 잡아당겼는지, 머리가 이만큼이나 빠졌어요, 제임스.’
가엾게도. 말 그대로 ‘가엾게도’ 그런 일을 당했다.
“제가 바를 수 있는데…….”
머뭇거리는 소렐은 말해봤자 라이킨이 들어주지 않을 것이란 걸 어렴풋이 알았다. 여태까지 눈에 가장 크게 난 멍은 그나 에벌린이 직접 약을 발라주었다.
“압니다.”
혼자 할 수 있다는 건 안다.
“눈 감아요.”
공주님이라서 약도 발라주는 걸까? 소렐은 말을 잘해주지 않는 라이킨의 속내를 전혀 알 수 없었다. 서늘한 뱀파이어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가볍게 붙잡고 들어 올렸다. 약간 홍조가 어린 뽀얗고 통통한 뺨, 그리고 뺨만큼 통통하고 붉은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라이킨은 부드러워 보이는 그녀의 입술을 한번 만져보고 싶었다. 토끼는 화들짝 놀라서 도망갈까? 구석으로 도망가서 얼굴도 보여주지 않으려나?
“아프면 말해요.”
“네.”
고개만 끄덕여도 될 텐데, 소렐은 아주 착하게 대답을 꼬박꼬박했다. 라이킨은 서늘하게 웃었다. 그를 향해 나붓이 눈을 감고 있는 작은 아가씨의 쇄골과 가느다란 목이 무방비하게 드러났다. 맥이 팔딱거리며 뛰고 있는 저 섬세한 부분은 연약하고 부드럽기만 할 것이다.
“공주님, 특별히 배우고 싶은 건 없습니까?”
“음, 수학……?”
“수학은 왜요?”
“돈이 너무 많아져서 곤란해요.”
“아, 그래서.”
라이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수학을 배운다고 해서 해결되는 문제는 아닙니다.”
“왜요?”
소렐은 눈을 번쩍 뜨다가, 생각보다 너무 가까이에 있는 라이킨을 발견하곤 얼른 눈을 다시 감았다.
“모든 수학자들이 재산을 잘 관리하는 건 아닙니다. 재산을 관리하는 건 변호사와 회계사지요.”
눈을 감았지만 눈앞에서 웃고 있던 푸른 눈이 생생해서, 소렐은 대답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좋은 변호사와 회계사를 알아보는 감각, 그리고 재산에 대해 신중한 마음가짐이면 충분합니다. 그건 공부한다고 해서 될 건 아니지만.”
라이킨은 약간 아쉬움을 느끼면서 소렐의 턱을 놓았다.
“다 됐습니다.”
턱을 조심스럽게 당긴 소렐이 눈을 겨우 떴다. 그래, 이 정도로 떨어져 있으면 그래도 마주 볼 만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지나치게 잘생긴 라이킨은 눈이 부실 지경이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했다.
“공주님 혼자 잘 있었던 걸 생각하면 딱히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만. 공주님이 물려받은 유산은 전부 공주님이 직접 사용하지 않으면 절대로 따로 쓰이지 않을 겁니다. 나도 손대지 못해요.”
소렐은 아직까지 가만히 듣기만 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라이킨은 더 열심히 캐묻는 중이었다.
“또?”
“네?”
“또 하고 싶은 건 없습니까?”
그는 약상자를 정리하고, 소렐의 손에 두터운 공책 한 권과 예스러운 만년필을 건네주었다.
“적어봐요. 나는 대강 두어 가지 외국어와 승마, 기초 기하와 철학 정도를 생각했습니다만. 문학은 지금 공주님이 해치우고 있는 책들로도 충분할 것 같습니다.”
소렐은 어마어마하게 책을 읽어대고 있었다. 할 일이 없어 그런 것도 있지만, 그녀는 원래 책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지금은 기본적인 책들을 읽는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라이킨의 서재까지 침입할 게 뻔했다.
“……마법이나 예언하는 건, 안 배워도 괜찮아요?”
소렐이 머뭇거리다가 시무룩하게 물었다.
“그렇게 축 처져서 물어보면 내가 괜찮다고 말할 수밖에 없잖습니까.”
라이킨은 웃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만약에 아저, 아니, 라이킨이요.”
“예.”
“라이킨 없을 때, 또 내가 이런 일 당하면 안 되잖아요.”
“글쎄요. 일단 ‘내가 없을 때’는 이젠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학교를 가게 되면……!”
“학교는 내 구역이기도 합니다. 공주님이 스스로 지키는 방법을 배우겠다고 했을 때, 아버님인 펠릭스가 뭐라 하던가요?”
소렐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게……, 저는 뛰는 것만 잘해서요…….”
“예. 처음 만났을 때 보니 충분히 빨랐습니다.”
그때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와서 그들이 앉아 있는 응접실의 문가를 똑똑 두드렸다.
“제임스, 손님이 왔어요.”
“누굽니까?”
“폴리아나 그린 교수요.”
에벌린은 약간 차가운 표정으로 대답했고, 라이킨은 입술을 말며 시선을 내렸다.
“예상했잖아요. 얼른 나가봐요.”
“알겠습니다. 공주님, 그럼 잠시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 동안 펜싱을 배우는 건 어떨지 생각해봐요.”
펜싱! 순식간에 소렐의 눈에 빛이 반짝 들어온 걸 보고 라이킨은 웃으며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돌아서는 순간 싹 사라졌다. 소렐은 펜싱이란 말에 마냥 신이 났다.
“어, 에벌린?”
“네, 공주님.”
아이, 참. 소렐은 라이킨과 똑같은 말로 정중히 불러주는 에벌린 때문에 얼굴이 잠시 빨개졌다.
“손님은 누구예요?”
폴리아나 그린이라니.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하긴 소렐이 글래스턴에서 들어본 이름이 얼마나 되겠냐만.
“제임스와 마찬가지로 글래스턴 대학의 교수죠.”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뱀파이어이기도 하고요. 여자이기도 하고.”
그 마지막 말이 소렐의 호기심을 끌었다.
“웬만하면 마주치지 않는 게 좋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많은 토끼는 살금살금, 바깥으로 나갔다. 아이고. 한숨을 폭 쉰 에벌린은 그냥 가려다가 소렐과 함께 가서 계단 모퉁이에 앉았다.
“저 사람이에요.”
계단 아래, 1층 현관에서 라이킨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쩐 일이야?”
어쩐지 차갑게 느껴져서 소렐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라이킨의 목소리가 저렇게 싸늘했나?
“논문 빌려주신다면서요.”
그러나 대답하는 여자의 말은 한없이 공손하고 예의 발랐다. 소렐은 모퉁이에 숨어서 폴리아나 그린 교수를 훔쳐보았다. 녹색 눈이 무섭게 빛나고, 붉은 립스틱이 너무나 잘 어울리는 화려한 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