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Call my name (1)2020.08.19.
글래스턴은 회색이었다. 빛바랜 흰색이 때가 타면 글래스턴이 지닌 고풍스러운 회색이 된다. 뱀파이어가 사는 도시답게 비가 종종 내리고, 사람들은 긴 코트를 맵시 있게 입고 지나간다. 밤부터 자욱하게 낀 두터운 안개는 아침이 되어도 사라지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각 집의 벽난로는 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자, 이 슬리퍼를 신도록 해요.”
어디선가 포슬포슬하고 귀여운 테슬까지 달린 슬리퍼를 가져온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소렐의 발에 딱 맞는 것을 보곤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임스 교수님이 바로 사 온 거예요. 나는 작은 아가씨들의 물건은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제법 잘 사 오지 않았어요?”
에벌린은 아주 훤칠하고 건강한 풍채를 가진 부인이었다. 그녀는 이 거대한 타운하우스를 하루 종일 바쁘게 오가며 관리했다. 에벌린이 1층 주방에 있다, 싶으면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났고, 3층 티룸에 있다, 싶으면 향긋한 차향이 진동했다. 타운하우스에 들르는 우유배달부, 집배원, 세탁배달부는 언제나 에벌린 손에 있었다. 그녀는 그들에게서 온갖 정보와 호의까지 얻어내는 대단한 재주를 가졌기에, 알게 모르게 이 근방을 꽉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음에 들지요?”
소렐은 고개를 자그맣게 끄덕였다. 아이고, 저 작은 토끼가 얼마나 아프고 놀랐을까.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소렐의 어깨에 포근하고 도톰한 카디건을 걸쳐주었다.
“아직 몸살이 다 낫지 않았으니 꼭 입고 다녀요.”
“감사합니다…….”
털 품질이 뛰어나기로 이름난 메드라스 양털로 실을 뽑아, 솜씨 좋은 장인이 직접 엮어 만든 귀여운 숙녀용 카디건이다. 소렐의 잠옷에도 썩 잘 어울렸다. 에벌린은 소렐의 차림을 힐끗 본 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에게 꽤 안목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갑자기 결혼했다고 하길래 웬 미친 소리인가 했더니, 제법 잘 챙기네.’
그 뱀파이어가 결혼이라고? 모두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고개를 갸우뚱거릴 일이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결혼을 한다면, 그건 필요에 의한 정략결혼 아닐까? 하지만 그가 정략결혼이 필요한 사람이었나? 그건 또 아니다.
“먹고 싶은 음식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요.”
“네.”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도 미리 말해주고. 나는 좋아하는 음식을 해주는 걸 즐기거든.”
“네, 부인.”
“그리고 나는 그냥 에벌린이라고 불러요. 헬레인 공주님에게 부인이라는 말을 듣는 건 영 어색하네요.”
이 집에서는 모두가 다 소렐을 공주님 취급했다. 말 그대로, 귀한 공주님.
“네, 에벌린.”
에벌린은 성큼성큼 걸어가다가 뒤따라오고 있던 소렐을 바라보았다. 한쪽 눈을 맞아서 시퍼렇게 부은 작은 토끼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이거 참. 어디서 이렇게 착하고 예쁜 신부를 데리고 왔담?”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복도 많지. 여태까지 저지른 수많은 일을 생각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독수공방을 하다 늙어 죽어야 공평한 일인데. 에벌린은 착하게 대답을 열심히 하는 소렐을 보고 씩 웃은 뒤 다시 식당을 향해 걸어갔다.
“제임스는 지금 잠깐 외출했어요. 곧 돌아올 거예요. 집에 식구가 늘어나니 참 좋네요. 침대 바깥으로 나올 생각을 하다니 아주 잘했어요.”
에벌린은 조용한 말투로 많은 말을 했다. 아무래도 식구가 늘어나고, 또 소렐이 식당에서 밥을 먹겠다는 말을 해서 조금 들뜬 모양이다. 배를 크게 얻어맞고, 눈이 형편없이 부어서 제대로 뜨지도 못할 지경이었지만 소렐은 그래도 집 안에서라도 걸어 다닐 생각이었다.
‘적응해야지.’
너무 무섭고, 지금도 생각하기 싫은 기억이었지만 새집에 적응해야 했다.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건 어쩐지, 그녀를 때린 그 남자들에게 순종하는 기분이 들어서 너무 싫었다. 그런 일을 겪었지만, 그래도 씩씩하게 살고 싶었다.
“감자와 닭고기를 넣고 걸쭉하고 진하게 크림수프를 끓여놨어요. 이걸 먼저 먹도록 해요.”
타운하우스의 식당은 아주 깔끔하고 아늑했다. 여러 사람들을 초대해서 저녁식사 겸 파티를 열 수도 있는 크기였지만, 에벌린이 솜씨를 부려놔서 그런지 아주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사용하는 식기도 특별히 주문해서 따로 제작한 식기였다. 하얗고 매끈하며 우아한 그릇에 김이 나는 수프가 담겨져 나왔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혼자 챙겨 먹던 것에 비해 에벌린이 해준 음식은 재료가 다양했고, 풍미가 깊었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 반, 학교를 다니고 싶은 마음 반이다. 마법도 잘 못 하고 예언도 못 한다면, 공부라도 하고 싶었다. 아니, 공부만큼은 반드시 해야 했다.
“에벌린, 나도 한 그릇 줘요. 아침부터 돌아다녔더니 배가 고프군.”
발소리가 나더니 뜻밖에도 라이킨이 모자를 벗으며 식당에 들이닥쳤다. 그는 살짝 긴 머리카락을 근사하게 넘기며 뚜벅뚜벅 걸어 들어왔다.
“손 씻고 와요.”
“그러지요. 침실에서 나왔군요, 공주님.”
라이킨은 손을 씻으러 가는 와중에도 소렐의 상태를 한 번 살폈다.
“안녕하세요…….”
“이제 일어났습니까?”
소렐은 퉁퉁 부은 눈을 가려보려다, 어쩔 수 없다는 걸 깨닫곤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은 바깥에서 드신다고…….”
그런 줄 알았는데, 그는 제법 많은 짐을 가지고 돌아왔다.
“또 나가봐야 하는데, 그사이에 공주님 상태가 어떤지 좀 보려고.”
“저는 괜찮아요.”
그녀는 또렷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밖에 나갈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안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려고요.”
과거에 똑같은 일을 경험했을 때도 이렇게 극복하려고 애썼던 걸까. 라이킨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토끼는 생각보다 훨씬 더 씩씩하고 강했다.
“좋은 생각입니다. 안 그래도 지루할 것 같아 공주님이 읽을 책을 좀 사 왔습니다.”
소렐은 눈을 크게 뜨려다가 으, 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통증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저는 저기, 서재에 있는 책들로도 충분한데요!”
“공부하고 싶다면서요. 학교 갈 준비도 해야지요.”
그는 소렐이 당장 그가 가져온 짐 쪽으로 가려는 것을 제지했다.
“식사는 다 하고 봐요. 저기 있는 물건들은 다 공주님 것이니까.”
“제 물건을 사려고 오전 내내 다니신 거예요?”
그렇게 큰일을 해주다니! 소렐은 무척 놀랐지만, 안타깝게도 다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했다.
“내가 오늘 오후 내내 집을 비울 예정이라, 혼자 있으면 심심할 거 아닙니까.”
라이킨은 빠르게 말하며 자리에 앉아서 냅킨을 펼쳤다.
“어디 가요?”
그는 조심스럽게 물어보는 소렐을 쳐다보았다. 공주님은 왜 저런 말을, 하필 저런 표정으로 할까.
“……일찍 들어오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혹시 기다리는 건가, 싶어서 말했더니, 소렐은 조금 보스스 웃고서 다시 수프를 먹기 시작했다.
“대충 먹고 바로 가야 하나요?”
에벌린이 물었다.
“……아니, 아니요.”
라이킨은 소렐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제대로 먹고 갈 테니, 다 줘요.”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나요?”
“괜찮습니다.”
“많이 만들어두길 잘했네요.”
앞치마를 두른 에벌린은 솜씨 좋게 음식을 식탁 위에 날랐다. 소렐은 라이킨이 숟가락을 들고 수프를 먹는 모습을 빤히 보았다.
“……뱀파이어도 음식은 먹습니다.”
“죄송해요.”
실례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고개를 돌리는 소렐의 귀가 빨개졌다. 라이킨은 픽 웃었다.
“더 궁금한 건 없습니까?”
“진짜 죄송해요.”
그가 놀리는 걸, 소렐은 진심으로 받아들였나 보다.
“불쾌하거나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궁금한 게 많을 텐데, 뭐든 물어봐요.”
시퍼렇다 못해 보라색과 검은색이 된 멍을 달고서, 소렐은 라이킨을 살짝 쳐다보았다. 황홀하게 잘생긴 뱀파이어는 푸른 눈을 빛내며 자상하게 웃었다. 글쎄, 에벌린부터가 ‘왜 저러나’ 하는 표정으로 라이킨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소렐의 눈에는 자상하게 보였다.
“……오늘 늦어요?”
뜻밖의 질문이었다. * 소렐 이드리스는 글래스턴에 한 번도 온 적이 없다고 했다. 이래저래 적응하느라 힘들 것이고, 더구나 라이킨만 믿고 왔을 텐데 그런 봉변을 당했으니 더 힘들겠지. 아니, 그녀가 믿고 있는 건 제 아버지가 준비해놓은 그 얄팍한 유언장뿐일 것이다.
“제임스, 그 고대 마법을 당장 써먹을 수는 없는 겁니까?”
“써먹을 수 없다면 골칫덩어리입니다. 습격한 놈들이 누구겠습니까?”
“자칭 ‘신성기사단’ 놈들이지. 당장 전쟁이 시작되는 거라고.”
“그렇다고 해서 그 토끼를 그냥 놔줄 수도 없잖아, 안 그래?”
방 안에 희뿌연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뱀파이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보탰다.
“피야 쓸 만하겠지. 죽지 않을 정도로만 빨아도 나쁘진 않잖아. 어차피 도시락 하나 가져다 놓은 것밖에 더 돼?”
가차 없는 말에 라이킨이 고개를 들었다. 푸른 눈이 방금 이 말을 한 뱀파이어에게 싸늘하게 꽂혔다.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조슈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큰일 났다. 라이킨은 다음 순간, 그 말을 한 뱀파이어의 머리를 바닥에 처박아버렸다. 쾅, 하고 어마어마한 소리가 난 후에야 그들은 라이킨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였는지 알아차렸다.
“어디까지 가나 보려고 했는데 가관이군.”
순식간에 침묵이 가라앉은 방에 라이킨의 냉정한 목소리가 홀로 울렸다. 그는 구둣발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한’ 동족의 머리를 짓밟았다.
“아무리 고대 마법의 계승자라 해도 일단은 ‘내 아내’이자 헬레인 왕가의 공주라는 걸 굳이 상기시켜줘야 알아듣나?”
저 지랄 맞은 성격, 결국 터질 줄 알았다. 여태까지 침묵을 유지하고 있던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는 제 오빠가 이를 드러내며 성질을 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녀의 붉은 입술 사이로 희뿌연 담배 연기가 흘러나왔다.
“고대 마법을 어떻게 써먹을지는 내가 결정해.”
라이킨은 아주 여상하게 말했다. 누군가를 짓밟고 있는 사람답지 않은 투였다. 그래서 더 공포를 자아냈다. 그는 칼리에르 가문의 수장이자 뱀파이어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는 지배자였다.
“그 여자의 피도, 목숨도 내 소관이고.”
그는 입꼬리를 당기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도시락도 ‘내’ 도시락인 건데, 언제부터 내 아내라는 위치가 그렇게 우스워진 거지?”
결국 뚝, 하고 목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라이킨은 서늘하게 웃었다.
“다른 마법사나 마녀, 혹은 수인들이 어떻게 하든 내 알 바가 아니야.”
그는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놈들이 ‘그 토끼’가 필요하다고 몰려오면, 내게는 ‘그 토끼’가 아니라 ‘아내’이니 막을 거고.”
감히 칼리에르 수장의 아내를 ‘그 토끼’라고 표현했던 뱀파이어 하나가 시선을 슬그머니 피했다. 지금 식은땀이 줄줄 나고 있는 이가 한둘이 아닐 거다. 라이킨은 내킨다면 이 자리에 있는 뱀파이어들을 다 죽이고서 산뜻한 표정으로 귀가할 수 있었다.
“어떻게 막을지 의논하고자 불렀는데,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군.”
제 오빠와 마찬가지로 아름다운 금발을 늘어뜨린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가 오빠에게 라이터를 내밀었다.
“날 상대할 자신이 있으면 여태까지 지껄인 대로 하도록 하고.”
지금 목뼈가 부러져서 덜렁대고 있는 저 뱀파이어는 약과다. 라이킨을 직접 상대했다간 죽음을 구걸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적어도 예의란 걸 아는 상식인들이란 걸 증명해줬으면 좋겠군.”
그는 담뱃불을 붙이며 중얼거렸다.
“입 닥치고, 다 나가.”
축객령에 순식간에 방이 비었다. 목뼈가 부러진 뱀파이어도 질질 끌려 나갔다. 방에 남은 건 유일하게 그럴 자격이 있는 제인 샤를렌 칼리에르였다.
“그래서, 올케는 언제 보여줄 거야?”
라이킨은 긴 다리를 쭉 펴며 의자에 도로 앉았다.
“다 나으면.”
그는 천장을 향해 한숨과 함께 연기를 불어냈다. 짜증이 나다 못해 화가 나서 머리가 빙빙 돌 지경이다.
“겁을 좀 덜 먹고, 글래스턴에 좀 더 적응을 하면.”
“많이 다쳤어?”
“배랑 눈에 피멍이 들었어. 시커멓게.”
그랬는데 불러놓은 새끼들은 소렐을 폭행한 놈들과 똑같은 소리나 하고 있으니, 그의 속이 뒤집히는 것도 당연했다.
“맞은 눈은 뜨지도 못해.”
“저런.”
샤를렌은 진심으로 유감이었다.
“간신히 열만 내려놨는데 저딴 소리들이나 하고 있으니…….”
라이킨은 이를 갈았다.
“의논을 하라고 불러놨으면 헛소리는 하지 말아야지.”
그는 짜증을 내다가 장초를 재떨이에 비벼 끄곤 외투를 집어 들었다.
“어, 가게?”
“아무 결과도 없는데 집에라도 가야지. 너도 너무 늦게 있지 말고 집에 일찍 들어가, 샤를렌.”
“네에, 오빠. 그러지요, 네에.”
샤를렌이 눈을 굴려가며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소리를 하냐’라는 표정으로 말했지만, 라이킨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결혼이라니. 폴리아나가 뒤집어졌을 텐데.”
샤를렌은 방금 전까지도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나간 어느 뱀파이어의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아니, 폴리아나뿐인가. 어쨌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의 결혼이란 건 엄청난 일이었다. * 라이킨은 오늘 하루 무척 바빴다. 오전에는 소렐이 집에서 읽을 책이며 사용할 필기구와 공책 등을 주문하고 고르느라 바빴고, 오후에는 밀린 책을 읽고 업무를 봤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빌어먹게 말을 듣지 않는 뱀파이어들과 씨름을 하다,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했다. 온갖 피로가 몰려왔다.
“감사합니다!”
마부에게 삯을 넉넉히 집어준 라이킨은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잠긴 문을 소리 없이 열고, 지팡이를 꽂아둔 뒤 외투를 벗었다. 몸이 피곤한 게 아니라 정신이 피곤했다. 결혼했다는 말에 축하한다는 말은 할 줄도 모르는 머저리들을 끌고 나가려니 피곤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도시락이라고?’
어처구니가 없어서 라이킨은 고개를 흔들었다. 도시락은 무슨, 한입거리도 안 되어서 간에 기별도 안 갈 정도로 조그만 토끼인데.
‘고대 마법을 어떻게 쓰는지도 모르는, 게다가 공주잖아.’
공주였다. 헬레인 왕가의 마지막 남은 공주는 공주가 아닌가? 아무리 시대가 빠르게 변한다 해도, 전통에 대한 예의는 죄다 잊어버린 건가. 오랫동안 사는 뱀파이어들이 그 모양이니 한심스러웠다. 헬레인 왕가가 그런 취급을 받을 정도는 아닌데 말이다. 모든 게 마뜩잖아서 미간을 찌푸리고 걸어가던 라이킨은, 계단을 올라가다가 멈춰 섰다. 불이 모두 꺼진 거실에 벽난로가 혼자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저벅저벅 걸어갔다가, 벽난로 곁 소파에 늘어진 담요와 그가 오늘 점심에 사온 책들이 쌓여 있는 걸 발견했다.
“……공주님.”
헬레인 왕가의 마지막 공주는 한쪽 눈이 잔뜩 부푼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앉아서 졸다가 깼는지, 잔뜩 졸음이 묻은 눈을 살짝 뜬 소렐은 라이킨을 보고 연하게 웃었다.
“아저씨.”
자그마하고 따뜻한 존재가 다쳐서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라이킨은 저도 모르게 또 웃고 말았다.
“왜 자지 않고 여기 있습니까?”
그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사주신 책이 재미있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다가 잠들 시간을 놓친 건가?
“인사하려고요. 고맙습니다.”
인사하려고 기다린 거였다. 책을 안고 졸음에 겨웠으나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 표정에 라이킨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어쩐지 묵직하던 어깨가 저 엉망인 얼굴 하나로 다시 가벼워지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