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Hello, Stranger (5)2020.08.15.
“아저씨는 친절하고 점잖으신 편 같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올려다보는 까만 눈에는 순수한 진심만 가득했다. 아직 서로 잘 모르는 사이로 충분한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딱히 아부하는 것도 아니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이야기하는 것뿐이다. 친절하고 점잖다, 라.
“날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고마워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작은 토끼에게 친절하고 점잖은 태도로 대답했다. 사실 그는 딱히 ‘친절’하다거나 ‘점잖다’는 진심 어린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점잖은 거야 입을 다물고, 매너를 지키면 쉽게 듣는 말이었다. 글래스턴, 이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그저 영혼 없는 빈말을 던지고, 또 그 빈말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다. 까만 눈으로 정확하게 상대를 응시하는 토끼와는 전혀 달랐다.
“이게 미쳤나.”
라이킨이 성가신 학자를 떼어내고, 토끼가 사라졌다는 것을 인지한 뒤, 토끼를 찾아서 골목에 들어왔을 때 들은 건 이 험악한 목소리였다. 그리고 뒤이어 퍽, 하고 들려서는 안 될 소리가 들렸다. 뱀파이어의 푸른 눈은 밝은 곳에서 있다가 갑작스럽게 어두운 곳으로 들어왔어도 모든 걸 다 보았다. 얇은 회색 외투를 입은 작은 여자가 바르르 떨다가 축 늘어졌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잠시 생각했다.
‘새 외투를 사줘야겠어.’
기왕이면 회색이 아닌, 소렐에게 잘 어울리는 환하고 예쁜 색으로. 그리고 그는 방금 작은 토끼를 때린 놈의 머리를 그대로 잡아다 벽에 처박았다. 손안에서 뭔가가 터지고 으깨지는 느낌이 든다. 그는 그 머리를 벽에 문대며 이동한 뒤 놔버리곤, 다음 놈의 목을 잡아 흙바닥에 처박았다. 딱히 ‘친절’하거나 ‘점잖은’ 모습은 아니었다. 뱀파이어는 작은 토끼의 머리채를 잡았던 놈을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사정없이 주먹을 꽂을 때마다, 아까 소렐이 맞았던 소리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으나 그 광경을 보는 이는 맞는 사람과 때리는 사람, 둘밖에 없었다.
“윽!”
작은 토끼는 소리도 못 내고 맞았는데, 때린 놈들이 오히려 요란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이 골목에서 소렐을 제외한 모든 놈들이 숨소리도 내지 못할 때까지 패는 데 열중했다. 그를 말릴 사람도 없었지만, 있다 해도 말릴 수도 없었다. 새파랗게 빛나는 눈은 상대를 효과적으로, 강하고, 빠르게 때리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단숨에 죽을 만큼 때려놓은 라이킨은 쉬지도 않고 곧바로 소렐을 붙잡았다.
“……잘못, 잘못했어요……!”
붙드는 손에 퍼뜩 놀란 소렐이 팔을 허우적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라이킨이 보이지 않았다.
“잘못했어요, 마법사 아니에요, 그냥 토끼예요, 죄송해요, 잘못……!”
소렐은 입에 붙은 것 같은 말을 강박적으로 내뱉으며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머리채를 잡혀 떨어진 모자는 엉망으로 짓밟혔고, 떨어진 머리카락도 상당했다. 그녀는 지금 발작을 일으키고 있었다. 라이킨은 숨도 쉬지 못하고 비는 소렐을 가만히 꽉 안았다.
“잘못했어요…….”
“괜찮습니다.”
그는 그의 말을 듣지도 못하는 상황인 소렐에게 굳이 대답해주며, 그녀를 쓰다듬어주려다 문득 피가 묻은 장갑을 내려다보았다. 피. 피라. 뱀파이어는 더러운 장갑을 벗어서 내던졌다. 곤죽이 되어 짓이겨지다시피 한 시신들 위에 장갑이 툭 떨어졌다.
“괜찮아요.”
* 할 일이 아주 많았는데, 모든 일정이 전부 중지되어버리고 말았다. 항상 출근을 하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교수의 사무실은 사흘째 닫혀 있었다. 그는 끙끙 앓고 있는 소렐을 내려다보다, 그녀는 고열에 시달렸다. 헛소리도 종종 했다. 내용은 항상 비슷했다.
“토끼라서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마법사 아니에요…….”
쩍쩍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헛소리에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도대체 무슨 험한 일을 겪은 거냐며 몹시 마음 아파했다. 맞은 얼굴에는 시커멓게 멍이 내려앉았다. 라이킨은 간신히 잠든 소렐을 내려다보다 돌아섰다. 타운하우스의 응접실에는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시신들은 전부 처리했습니다.”
라이킨은 보고를 들으며 담배를 물었다.
“이미 댁에 어린 아가씨가 들어왔다는 소문이 난 것 같습니다.”
그는 담뱃불을 붙였다.
“그랬겠지.”
그러니 애를 몰래 끌고 가서 그 지경으로 만들어놨겠지. 라이킨은 보고하는 이에게 물었다.
“지금은?”
“다 때려죽이셨다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그럼 됐고.”
그냥 죽인 것도 아니고 때려죽였다면 알아서들 몸을 사리겠지.
“……동족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뭐 때문에?”
라이킨은 태연하게 되물었다. 질문을 받은 이는 잠시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일단 자택에 모르는 아가씨를 들이셨다는 것부터가…….”
“모르는 아가씨가 아니라 헬레인 왕가의 공주님.”
보고하던 뱀파이어의 눈이 커졌다. 어디라고? 헬레인?
“귀한 혈통이지.”
“그 왕가 핏줄이 남아 있……, 오.”
헬레인 왕가의 마지막 남은 공주가 누구와 결혼했더라. 그건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라서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남아 있었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동족들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하던 일들이나 열심히 하라고 해.”
라이킨은 나오던 말을 뚝 잘랐다. 칼날처럼 떨어지는 말에 냉기가 가득했다.
“내 아내에겐 관심 끄고.”
“예?”
이 ‘예?’라고 되묻는 말소리는 평소보다 훨씬 컸다.
“겨, 겨, 겨, 결혼하셨습니까?”
뱀파이어는 거의 넘어갈 지경이었다.
“했는데.”
반면 대답하는 라이킨은 농담을 하는 것처럼 여유로웠다.
“아주 어린 아가씨라고 하던데요.”
“올해 스물.”
“……백하고도 스무 살이 아니라요?”
“그냥 스무 살.”
“범죄입니다.”
뱀파이어는 라이킨에게 아주 엄숙하게 선언했다. 이건 범죄다.
“스물은 혼인 가능 연령이야.”
“아니, 왜……, 왜 안 하시던 결혼을 하실 생각을……, 헬레인 왕조야 대단하지만, 그래도 거긴 다 망한 집안 아닙니까…….”
라이킨은 픽 웃으면서 소파 등받이에 깊숙이 기댔다.
“펠릭스 이드리스의 딸이기도 하니까.”
담배 연기가 허공을 가로질렀다.
“고대 마법의 계승자인데, 쓸 만하겠지?”
“……날개를 다셨군요.”
“어린애를 돌보는 족쇄를 찬 것치곤 아주 괜찮은 날개지.”
라이킨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모두가 혈안이 되어서 탐내는 고대 마법인데, 부정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고대 마법이라고 하면 이놈 저놈 다 개떼처럼 몰려올 텐데, 애가 어디 끌려가서 또 얻어맞는 일이 일어나면 안 되지.”
“보안을 좀 더 강화하겠습니다.”
착실하게 대답하던 뱀파이어는 불현듯, 라이킨이 때려죽인 시신들을 떠올렸다.
‘귀찮으신 것치곤 굉장히 번거롭게 죽이셨는데……? 게다가 감정도 섞인 것 같, 아니, 섞인 것 같은 게 아니라 분명히 섞였지.’
아무런 도구도 없이 뱀파이어가 가지고 있는 굉장한 힘만으로 맞아 죽은 시신들은 참혹할 지경이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아무리 살인을 자주하기로서니, 그렇게 끔찍하게 죽이는 건 드문 일이었다. 그러나 뱀파이어는 침묵한 채 라이킨의 타운하우스를 떠났다. 뱀파이어들의 세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라이킨에게 자세한 관심을 가지는 건 금물이다. 정확하게는 그의 성질머리를 건드리지 않는 게 안전했다.
“그러면 결혼하셨다는 것도 함구하겠습니다.”
라이킨은 잠깐 소렐 이드리스가 잠들어 있는 침실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갓 부부가 된 이들 사이에는 아름답게 장식된 벽 몇 개가 가로막고 있었지만, 그는 정확하게 소렐이 누워 있는 지점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냥 둬. 어차피 내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언젠간 알려지게 될 테니……. 적어도 우리 동족들은 알게 될 일이야.”
라이킨은 이마를 문질렀다.
“다만 공주님이 너무 어려서 웬만하면 다들 함구하는 게 나을 것 같군. 곧 대학에 입학시키려고 하는데 유부녀라는 소문이 나면 난감하잖나. 안 그래, 조슈아?”
그런 것도 생각하셨습니까! 이름이 불린 뱀파이어는 입을 딱 벌렸다.
“입은 왜 벌리고 있어?”
라이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저런 노골적인 표정을 짓는 건가.
“그런 것도 신경 쓰실 줄 몰랐습니다.”
“내가 신경 안 쓰는 게 있었나?”
“……없지요.”
“아무튼 내가 결혼했다고 한다면 은퇴한 노인네들부터 수인들이며 저쪽 마녀들까지 죄다 기웃거릴 거야.”
그는 중얼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소렐 이드리스라고 이름이 밝혀지는 순간 다들 짐작하겠지만.”
다음에도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말 그대로 주먹을 쓰는 일이 또 일어날 수도 있겠다. 조슈아는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아주 없지는 않을 거라고 추측했다. 애초에 라이킨이 직접, 그것도 때려죽이는 일이 일어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엄청난 일이니까.
“……그러면 마스터, 충돌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조슈아는 바짝 긴장해서 말했다. 죄다 헬레인 왕가와 이드리스의 결합이자, 칼리에르의 아내인 작은 토끼를 차지하려고 눈이 돌아서 달려들 거다. 라이킨의 손에 죽어나간 그놈들이 그랬던 것처럼.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 빼앗길 수는 없잖나.”
소중한 고대 마법의 계승자인데.
“단단히 준비를 해놔야겠군요.”
이젠 더 이상 학회를 가고, 논문을 쓰고, 학문을 깊게 연구하는 것을 낙으로 삼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라이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지.”
단단히 준비를 해도 모자랄 판이다. 그는 바로 코앞에서 하마터면 소렐 이드리스를 잃어버릴 뻔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모든 뱀파이어와 마법사, 그리고 수인들은 소렐 이드리스를 노릴 것이다.
* 소렐은 이마를 덮는 차가운 손에 간신히 눈을 떴다. 희미한 담배 냄새, 그리고 싸한 코롱 냄새가 코끝을 스쳐지나갔다. 입안이 심하게 말랐다.
“……물부터 마실까요.”
물부터 마시라는 소리를 꽤 정중하게 한 뱀파이어는 토끼의 살짝 벌어진 입에 작은 숟가락으로 물을 흘려 넣어주었다. 아, 시원하다. 물이 달고 맛있었다. 타는 듯한 목까지 식혀주었다. 소렐은 움찔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움직이지는 말고.”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가 그녀를 막았다. 아야. 소렐은 미간을 찌푸리려다가 더 고통을 느꼈다. 얼굴이 몹시 아팠다.
“표정 펴요. 그래야 덜 아프지.”
라이킨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소렐이 움찔거리는 바람에 살짝, 아주 살짝 흐트러진 이불을 다시 꼭꼭 여며주었다.
“이제 괜찮습니다.”
피를 마시는 뱀파이어는 눈이 형편없이 부은 토끼와 시선을 맞춰가며 말했다.
“안전해요.”
스무 살, 아직 안전하게 보호받아야 마땅한 소렐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다, 통증에 또 아파하며 눈물을 떨어트리기 시작했다. 라이킨은 그녀를 메마른 얼굴로 바라보았다. 소렐은 눈물이 흘러나오는 걸 어쩌지 못했다. 끄윽끄윽 눌러서 참으려고 하는 모습, 괴롭게 찌푸려진 얼굴, 특히 그 엉망이 된 얼굴을 도저히 못 봐주겠다.
“괜찮습니다. 곧 나을 겁니다.”
뭐라고 말을 해야 진정할까.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아마 분명히 일어나서 거울을 보면 많이 울 거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거울을 다 치워버려야 하나. 라이킨은 난감해서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죄, 죄송…….”
소렐이 정신을 차리고서도 처음으로 입에 담은 말은 열에 들떠 내내 헛소리처럼 중얼거리던 말이었다.
“뭘 잘못했습니까, 공주님?”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물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사과하지 말아요. 공주님은 잘못한 거 없습니다.”
헬레인 왕가의 마지막 남은 공주가 이런 험한 일을 겪었다는 게 문제지. 그 사나운 토끼들이 이 일을 알았다간 죄다 뛰쳐나와서 라이킨이 벌인 짓보다 더 끔찍한 짓을 솔선수범해 저질렀을 텐데. 헬레인 왕가의 부귀영화와 흥망성쇠를 지켜본 라이킨은 그래서 더 소렐 이드리스에게 예의를 갖출 수밖에 없었다. 그 예의가 철저히 뱀파이어식이지만 말이다.
“……괜찮습니다.”
소렐은 무섭게 얼굴을 찌푸린 채 ‘괜찮다’라고 말하는 뱀파이어를 두렵게 바라보았다. 그는 느슨하게 셔츠 단추를 몇 개 풀어도 여전히 단정한 모습으로,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그녀를 똑바로 보고 있었다.
“깨끗하게 나을 겁니다.”
이게 아닌가? 라이킨은 어린 아가씨를 달래본 적이 없어서 몹시 난감했다.
“전부 다 처리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잘못한 거 하나도 없으니 무서워하지 말아요. 괜찮습니다. 안전해요.”
그는 답지 않게 이 작은 토끼 앞에서 말이 많아졌다. 무슨 말을 해도 겁을 잔뜩 먹어서 울음을 억지로 삼키고 있으니, 말이 자연히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라이킨도 스무 살짜리는 처음이라 이래저래 애를 먹고 있었다.
“많이…….”
소렐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라이킨은 바싹 마른 입술에 물을 더 넣어주었다.
“저 많이 다쳤어요?”
“……어디까지 기억합니까?”
아마 전부일 것이다. 움찔거리는 그녀의 눈에 대고 라이킨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게 전부입니다.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어요.”
라이킨은 그녀가 눈물을 흘리는 만큼 작은 숟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물을 먹였다.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빠져나가는 물기가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많이 놀라서 열이 난 것뿐이니, 너무 겁먹지는 말고.”
이렇게 울 줄 알았으면 그놈들을 아주 잠시 살려놨다가 보는 앞에서 원하는 대로 처리해줄 걸 그랬나? 라이킨은 그랬다간 소렐이 또 기절할 거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렵다. 정말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그러나 소렐은 뜻밖에도 더 울기보단,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그럴 것 없고, 잘 먹고 얼른 나아요.”
라이킨은 저도 모르게 슬쩍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