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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Hello, Stranger (4) (4/181)

4. Hello, Stranger (4)2020.08.12.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무척 친절했고, 음식 솜씨도 훌륭했다. 이 타운하우스에는 없는 게 없었다. 소렐은 침실에 딸린 하얗고 거대한 욕실을 따로 받았고, 그 욕실에 커다란 욕조가 있는 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16606113493423.jpg“휴우우우우…….”

소렐은 욕조에 폭 잠겨서 한숨을 길게 쉬었다. 그녀에게 커다란 수건을 건네주고 간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은 거대한 호랑이고, 오늘 관공서에 가서 그녀와 결혼이란 걸 한 남자는 뱀파이어다. 자그마한 토끼와 한집에서 지내기엔, 지나치게 무서운 존재들이었다.

16606113493423.jpg‘아빠, 진짜, 정말로, 진심이야?’

그녀는 아빠가 눈앞에 있다면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었다. 위대한 대마법사, 고대 마법의 계승자, 펠릭스 이드리스는 하나뿐인 딸에게 주문을 거는 법이나 마력이 담긴 문양을 그리는 법 따위는 가르치지 않았다. 딸이 마법에 관하여서는 아주 형편없는 소질을 타고났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6606113493435.jpg‘소렐, 마법이나 예언 없이도 사람은 충분히 잘 살아갈 수 있단다. 매사에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배우는 열정을 잃지 않고, 더불어 항상 감사하는 것을 잊지 말아라.’

  아빠는 마법이나 예언 따위, 하지 않아도 좋다고 했다.

16606113493435.jpg‘세상은 넓고 다양한 사람들이 있지. 네게 나쁜 짓을 하려고 했던 사람들도 있고, 우리 옆집의 그레첸 부인 같은 사람도 있잖아. 사람에게 너무 의존하는 건 안 되지만, 그렇다고 믿음을 잃지는 말아라.’

  열 살 때쯤 돌아가셨던 엄마도 비슷한 말을 항상 했다. 차라리 마법을 더 잘하고, 예언을 열심히 배우는 게 낫지 않았을까? 토끼는 뱀파이어와 호랑이가 사는 집에 홀로 남겨져서 너무 불안했다.

16606113493435.jpg‘너무 걱정하지 마라, 소렐. 아빠랑 엄마는 진작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어.’

  대마법사의 숨이 완전히 다하기 직전, 아빠는 웃으면서 말했다.

16606113493435.jpg‘겁내지 말고, 즐겁게 지내. 널 데리러 올 남자는 엄마와 아빠처럼 네 편이야.’

  근데 그 남자가 뱀파이어라는 말은 안 했잖아. 소렐은 너무 피곤했지만 쉽게 잠들 수가 없었다. 그녀가 지금 믿는 건 아빠와 엄마, 그리고 라이킨이 가지고 왔던 맹세의 증서 반쪽밖에 없었다. 그녀는 푹신한 수건으로 꼼꼼하게 머리를 말린 뒤, 잘 챙겨 온 포근한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새로운 침구를 깔아준 침대는 집에 있던 침대와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푹신했지만, 잠들 수는 없었다.

16606113493455.jpg“공주님, 아니, 아가씨. 이드리스 양.”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소렐은 귀를 쫑긋 세웠다. 문 바깥에 선 라이킨은 이놈의 호칭을 어떻게든 정리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16606113493455.jpg“잠이 오지 않으면 나오지 않겠습니까? 따뜻한 차라도 마셔요.”

히익, 잠이 오지 않는다는 건 어떻게 알았지! 침대에 누웠다가, 일어났다가, 커다란 방 안을 맴돌며 꼼지락거렸던 소렐은 아직 닫혀 있는 문을 놀라 바라보았다.

16606113493455.jpg“……나는 작은 거실에 있을 테니, 잠이 오지 않는다면 나와도 좋아요.”

라이킨은 그렇게 말한 뒤 문 앞을 떠났다. 그는 거실로 와서 능숙하게 물을 끓이고, 찬장을 열어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애지중지하는 아름다운 찻잔과 찻잔 받침을 꺼냈다. 작은 토끼의 기척은 전부 다 느껴진다. 맨발로 문 앞을 왔다갔다 하며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곤, 유일하게 불이 켜진 작은 거실로 조심조심 걸어 나온다. 소렐 이드리스의 호기심은 경계심과 맞먹었다. 어찌나 천천히 긴장하면서 다가오던지, 그녀가 거실에 마침내 발을 디뎠을 때에는 이미 물이 다 끓어버렸다.

16606113493455.jpg“캐모마일?”

라이킨은 그저 문간에 선 토끼에게 무심히 물어볼 뿐이었다.

16606113493455.jpg“라벤더와 감초도 있습니다.”

16606113493423.jpg“네.”

눈을 동그랗게 뜬 토끼는 그저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푹신한 의자와 벽난로, 아름다운 꽃이 가득 꽂힌 꽃병이 다섯 개나 있는 정갈한 거실은 한쪽 구석에 차를 끓여 마실 수 있는 공간이 있었다. 구석구석에 두툼하고 귀한 책들이 많이 보였다. 소렐은 머뭇거리며 천장이 높은 거실을 둘러보았다. 모든 가구는 아주 품격이 있으면서도 편안했고, 절제된 양식으로 놓여 있었다.

16606113493455.jpg“여기 앉아요.”

16606113493423.jpg“감사합니다.”

소렐은 라이킨이 내어준 벽난로가의 의자에 얼른 가서 앉았다. 라이킨은 정말 공주들이나 쓸 법한 화려한 찻잔에 차를 담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하는 자그마한 인사에 대답하는 대신, 그는 푹신한 실내용 슬리퍼를 그녀의 발 앞에 가져다주었다.

16606113493455.jpg“바닥이 찹니다.”

그리고 소렐의 발은 슬리퍼에 비해 형편없이 작았다.

16606113493455.jpg“에벌린이 살 물건이 많겠군요.”

16606113493423.jpg“저는 이걸로도 충분히 괜찮아요.”

16606113493455.jpg“신고 다니다 넘어질 겁니다. 안 됩니다.”

라이킨은 조용히 말하며 그녀의 맞은편 의자에 앉았다. 호기심 많은 토끼의 고개가 쉴 새 없이 돌아갔다.

16606113493455.jpg“궁금한 게 있으면 뭐든 물어봐요.”

16606113493423.jpg“……아저씨는 이렇게 결혼해도 괜찮아요?”

16606113493455.jpg“괜찮습니다.”

간단하게 말한 라이킨의 금발이 벽난로 불빛에 부딪쳐 반짝거렸다. 책에서만 읽었던 수려하다는 단어는 라이킨에게 딱 걸맞았다. 서늘한 눈빛, 섬세한 눈, 그리고 곧은 눈썹 뼈와 모난 곳 하나 없는 코, 꽉 다물린 입술과 그린 것 같은 턱선이 아주 근사했다.

16606113493455.jpg“하지만 공주님……, 미안합니다. 헬레인 왕조의 후손에게 당연히 붙는 호칭을 떼어내기가 쉽지 않군요.”

소렐은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정중하게 사과하는 뱀파이어에게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16606113493423.jpg“괜찮아요. 다른 사람 앞에서는 부끄럽지만, 듣는 사람이 없다면……, 편하신 대로 말씀하세요.”

엄마가 공주니까 나도 공주가 맞는 거지, 뭐. 소렐은 다소 민망한 호칭을 ‘혼자서만’ 듣는다면 상관없을 것 같았다.

16606113493455.jpg“고마워요.”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겉보기에 그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정도 되는 것 같았다. 아니, 그의 사연 많은 눈빛은 그를 좀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했다. 그래봤자 기껏해야 두세 살 정도 더 들어 보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16606113493455.jpg“그러면 우리 둘만 있을 때는 공주님이라고 부르도록 하겠습니다. 나는 옛날 사람이라, 걸맞은 호칭은 반드시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16606113493423.jpg“네에…….”

소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호호 불어마셨다.

16606113493455.jpg“공주님은 아직 어리지요. 최대한 다른 학생들처럼 대학 시절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아직 결혼식은 할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소렐은 또 눈을 동그랗게 떴다.

16606113493455.jpg“천천히 생각해봐요. 급한 일은 아니니까.”

16606113493423.jpg“네.”

착하게 대답해놓고 또 차를 조금 마신다. 작은 토끼가 움직이는 행동은 뭐든 다 귀여웠다.

16606113493423.jpg“저, 아저씨?”

16606113493455.jpg“예.”

16606113493423.jpg“대학 시절을 남들처럼 보내는 것과, 결혼식을 하는 건 무슨 상관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16606113493455.jpg“공주님이 결혼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결혼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함께 져야 합니다. 마땅히 그 나이에 누려야 할 자유가 제한되지요. 다른 친구들은 다 하는데, 공주님만 못 하는 게 많으면 슬프지 않습니까.”

아직까지 알쏭달쏭하긴 했지만, 소렐은 일단 그런 게 있나 보다, 하고 차를 호로록 마셨다. 사실 결혼이라는 책무를 알기엔 그녀는 아직 너무 어렸다.

16606113493423.jpg“그럼 바깥에는 제가 결혼한 게 아닌 것처럼 하고 다니라는 뜻이네요.”

16606113493455.jpg“그러는 편이 더 편할 겁니다.”

그래서 결혼식도, 반지도 뭣도 없는 거구나. 소렐은 딱히 아쉽거나 서럽지도 않았다.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남자와의 결혼을 티 내지 못한다 해서 슬플 만큼의 감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16606113493423.jpg“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그런 걸로 할게요.”

16606113493455.jpg“겪어보면 알게 될 겁니다.”

라이킨은 희미하게 웃었다.

16606113493455.jpg“학교생활은 아주 즐거울 테니까요. 내일은 학교 구경을 좀 하고, 들어야 할 수업목록을 좀 챙겨볼까요? 수업이 시작하려면 한참 남았지만, 지금부터 준비할 게 많을 겁니다.”

16606113493423.jpg“그렇겠지요, 저는, 저는…….”

소렐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말을 이었다.

16606113493423.jpg“학교에 가기엔 아직 모자랄지도 몰라요.”

16606113493455.jpg“글쎄요. 한번 봅시다.”

라이킨은 그렇게만 말하고 말없이 차를 마셨다. 소렐은 따뜻한 벽난로의 열기와 속을 데워주는 차 덕분에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는 문득, 라이킨이 자신의 이야기는 전혀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너무 졸려서 눈이 감긴 후였다.

16606113493423.jpg“아저씨…….”

옹알옹알, 궁금한 걸 물어보려던 빨간 입술이 살짝 벌어진 채로 멈췄다. 라이킨은 대답하지 않고 소렐의 손에서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찻잔만 조심스럽게 빼냈다. 오늘 글래스턴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작은 토끼는 칼리에르 경의 안락의자 위에 무방비한 상태로 잠들어버렸다. 라이킨은 소렐이 좀 더 깊이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16606113493455.jpg‘보면 볼수록 부모를 똑같이 닮았군.’

라이킨은 이게 도대체 무슨 경우인가 싶어 한숨을 쉬었다. 그런 뒤 잠들어버린 소렐 이드리스를 아주 부드럽게 안아 들어다 침실에 눕혔다. 고른 숨소리가, 말랑한 살갗이, 뽀얀 피부가 뱀파이어의 식욕을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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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킨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히 소렐을 내려놓은 뒤 방을 나갔다. * 글래스턴은 수도가 아니었다. 햄튼처럼 사람들이 몰려 사는 대도시도 아니었고, 그저 유서 깊은 대학도시인지라 고풍스러운 시가지에는 젊은 학생들과 연구원들이 가득했다. 소렐 이드리스는 형형색색의 모자가 인도를 가로질러 가고, 그 곁을 마차가 지나가는 광경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16606113493455.jpg‘바쁘군.’

거리를 구경하다가, 아침에 대학 입학처에서 받아온 서류를 또 열심히 읽다가, 다시 사람을 구경하다가, 토끼의 고개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무척 바빴다. 라이킨은 그녀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소렐이 이 모든 것을 즐기도록 가만히 내버려두는 참이었다.

16606113493423.jpg“들을 수 있는 수업이 아주 많아요!”

소렐은 종이를 꼭 쥐고 환하게 웃었다.

16606113493423.jpg“하지만 제가 이 수업들을 잘 쫓아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16606113493455.jpg“미리 교재를 한번 훑어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들은 이미 서점 거리를 돌며 모든 수업마다 필요한 책들을 잔뜩 사서 집으로 배달시켰다. 소렐은 수업을 전부 다 듣지도 않을 거면서, 그저 책을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무척 기뻐했다.

16606113493423.jpg“아저씨는 어떤 수업을 하세요?”

16606113493455.jpg“나는 수업은 안 합니다.”

라이킨은 빙긋 웃었다.

16606113493455.jpg“연구를 주로 하지요.”

16606113493423.jpg“교수님이잖아요?”

16606113493455.jpg“연구만 하는 교수들이 모인 곳이 벨파이어 칼리지입니다. 펠릭스 이드리스도 벨파이어 칼리지 소속이었지요.”

16606113493423.jpg“아빠도 교수님이었다는 얘기네요? 처음 들어봐요.”

16606113493455.jpg“훌륭한 학자였습니다.”

라이킨은 아주 솔직하게 말했다. 소렐은 눈을 깜빡거렸다.

16606113493423.jpg“아빠는 학자라기보단 괴짜였는데요.”

16606113493455.jpg“그것도 그렇지요.”

라이킨은 웃었다.

16606113493455.jpg“자, 어서 먹어요.”

그는 소고기 필레와 아스파라거스 구이를 소렐 앞에 밀어주었다. 그녀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아, 토끼니까 고기는 못 먹나? 라이킨은 소고기 필레를 다시 가져가려고 했다.

16606113493423.jpg“저는 토끼지만 인간 혼혈이에요.”

16606113493455.jpg“예.”

16606113493423.jpg“그래서 빵도 잘 먹고 고기도 잘 먹어요.”

포크와 나이프를 양손에 꽉 쥔 소렐이 아주 큰 비밀을 말해주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췄다.

16606113493423.jpg“사실 조금 이상한 얘기이긴 하지만, 토끼 고기도 잘 먹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진짜 토끼요.”

16606113493455.jpg“예, 수인이 아니라 그냥 토끼 말씀이시지요.”

16606113493423.jpg“네, 그러니까 저는…….”

소렐의 얼굴이 빨개졌다.

16606113493423.jpg“그냥 이걸 어떻게 먹는지 잘 모를 뿐이에요.”

혹은 실수할까 봐 겁이 났던가.

16606113493455.jpg“그랬군요.”

라이킨은 그게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듯, 그저 부드럽게 웃으면서 아스파라거스를 잘라주었다.

16606113493455.jpg“잘라서 먹으면 됩니다.”

16606113493423.jpg“순서가 가끔 헷갈려요.”

16606113493455.jpg“점점 익숙해질 겁니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니, 다음에도 헷갈리면 나한테 물어보도록 해요.”

소렐은 바쁜 와중에도 오늘 하루 종일 그녀와 함께 다녀주고 있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교수를 바라보았다.

16606113493423.jpg“아저씨는 친절하고 점잖으신 편 같아요.”

그 말에 이 잘생기고 키가 큰 남자는 잠시 소렐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다정하게 웃었다.

16606113493455.jpg“날 그렇게 생각해주다니 고마워요.”

역시나 점잖고 다정한 말이었다. * 소렐은 체구가 무척 작아서, 상대적으로 몸이 두텁고 체구가 큰 라이킨의 곁에 서면 완전히 가려졌다. 이 끔찍하게 잘생긴 뱀파이어는 그날 소렐을 데리고 글래스턴의 커다란 거리를 휩쓸고 다녔다. 어쩔 수 없었다. 소렐은 필요한 것에 비해 가진 것이 너무 없었으며, 무척 호기심이 많아서 모든 상점을 다 구경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지나치게 물러터진 보호자였다.

16606113493455.jpg“그럼 저기도 한번 가볼까요.”

사람이 무척 많은 거리였다. 오후가 되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마실을 나온 부인들과 수업이 끝난 학생들, 잠시 휴식시간을 가지는 신사숙녀들로 거리가 어지럽게 섞였다. 거리에 햇살이 눈부시게 내리쬐고 있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도 짙은 법. 글래스턴의 대로를 향해 뻗은 뒷골목에는 아무도 관심을 주지 않은 채, 사람들은 모두 바쁘게 제 갈 길을 갔다. 모두가 서로에게 관심이 없었다.

16606113493435.jpg“아니, 칼리에르 교수님!”

평범한 오후였다. 누군가가 라이킨을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소렐에게 잠시 양해를 구한 라이킨은 그와 몇 마디를 나눴다.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소렐은 몇 걸음 더 떨어졌다.

16606113493435.jpg“어이쿠, 실례합니다.”

작은 소렐은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였다. 떠밀리다 보니 라이킨의 커다란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16606113493423.jpg“어……?”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거세게 치고 지나갔다. 소렐의 온몸이 흔들렸다. 비틀대며 균형을 잃는 순간, 까만 골목에서 뻗어 나온 험상궂은 손이 그녀의 탐스러운 머리채를 잡아챘다. 소렐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한 채 끌려갔다. 눈앞이 새카맣게 물들었다.

16606113493423.jpg‘아빠……!’

그녀의 사고가 그대로 멈췄다. 아주 어릴 때도 이런 일을 당한 적이 있었다. 공포스러운 기억이 다시 현실이 되는 순간, 순식간에 작은 토끼 수인은 뻣뻣하게 굳었다.

16606113493435.jpg“이게 뭐야, 그냥 토끼잖아?”

16606113493435.jpg“뭔데 토끼를 끼고 다녀?”

16606113493435.jpg“별것도 아닌 것 같은데.”

소렐은 발버둥을 쳤다. 발에 뭔가가 퍽, 하고 걸렸다.

16606113493435.jpg“이, 썅.”

그녀의 작은 발에 맞은 이가 소렐을 사정없이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엄청난 충격과 함께 눈앞이 빙빙 돌아갔다.

16606113493423.jpg‘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때리지 마세요.’

빌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16606113493423.jpg‘저는 그냥 토끼예요. 마법사 아니에요. 마법 못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녀가 그냥 토끼라며 화를 내던 이들은 빌어도 용서해주지 않았다.

16606113493435.jpg“이게 미쳤나.”

욕설과 함께 주먹이 한 번 더 내리쳐졌다. 소렐은 한 번 크게 바르르 떤 뒤, 더 이상 어떠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축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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