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Hello, Stranger (3)2020.08.08.
뱀파이어는 타인에게 무척 무관심하고, 귀찮은 건 딱 질색인 존재였다. 그랬기에 일을 아주 효율적으로 처리했고, 뭐가 중요한지 가장 잘 알았다. 소렐은 눈이 휘둥그레진 채 키가 아주 크고, 다리가 무척 긴 그를 따라 종종걸음 쳤다.
“저기, 아저씨.”
토끼가 부르자 뱀파이어는 뒤를 돌아보았다. 소렐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보고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보폭이 짧은 그녀는 라이킨을 따라잡느라 힘들어하고 있었다. 뱀파이어는 조용히 멈춰 섰다. 그런 뒤 소렐이 그의 곁에 바짝 올 때까지 기다렸다. 그 이후로 그가 떼는 걸음은 결코 소렐의 보폭보다 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작은 토끼가 그의 턱 아래에서 어리둥절해하며 걸어가고 있었다. 라이킨은 서늘한 시선을 슬쩍 내려 동그란 머리를 시선에 담았다. 그녀가 약간 긴장한 기색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호기심에 차서 은행 여기저기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어서 오십시오.”
오래된 도시답게 글래스턴 은행 역시 오래된 역사와 건물을 자랑했다. 고풍스러운 건축양식 한가운데에 선 은행직원은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키가 큰 남자와 아직 앳된 티가 나는 소녀를 맞이했다. 그는 겉보기엔 라이킨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교수에게 무척 깍듯했다.
“고드윈.”
라이킨은 그의 이름을 불렀다.
“교수님.”
그건 고드윈 씨가 라이킨을 부르던 호칭이 아니었으나, 고드윈 씨는 라이킨이 대동하고 나타난 낯선 숙녀를 의식한 듯, 그의 ‘공식적인 직업’을 부르며 고개를 까딱였다. 이것이 그들의 인사였다.
“맡겨놨던 것을 좀 보러 왔네.”
“예, 무엇을 보여드리면 될까요?”
“일단은…….”
라이킨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은행 폐점 시간은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고드윈 씨는 정중하고 고요하게 말했다. 그는 아주 침착하고 계산에 밝은 은행원이었다.
“그런가. 그럼…….”
라이킨은 목소리를 낮췄다.
“이드리스와 헬레인의 유산을 찾으러 왔네.”
고드윈 씨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저 라이킨이 서류가방에서 꺼내주는 출생증명서며 이러저러한 낡은 서류를 공손히 받을 뿐이다. 소렐은 그중에 끼어 있던 서류는 아빠의 유언장만큼이나 낡았고, 그녀가 처음 보는 것이란 걸 알아차렸다.
“알겠습니다. 잠시 이곳에 앉아서 기다려주십시오.”
그들은 일반창구가 아닌, 안쪽의 좀 더 조용하고 정갈한 곳으로 안내되었다. 소렐은 낯선 소파에 어색하게 앉아 은행의 높은 천장과 견고한 기둥을 구경했다.
“여기에 엄마 아빠의 유산이 있어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교수라는 직함에는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젊어 보였다. 그리고 지나치게 잘생기기도 했다. 하긴 뱀파이어니까, 당연한가? 그의 눈부신 금발은 이곳에서도 환하게 빛났다. 너무 파래서 시리기까지 한 눈은 완벽하게 잘 어울렸다.
“아저씨는 종종 오신 모양이네요.”
그런 자산을 단지 방문만 했다고 해서 바로 보여주다니.
“여기엔 내 자산도 있으니까요.”
은행직원은 일단 명함부터 건네받은 뒤 그가 믿을 수 있는 신분을 가진 사람이란 걸 확인했다. 그런 뒤 소렐 이드리스에 관한 서류와, 따끈따끈한 혼인증명서도 받았다. 고드윈 씨는 유능한 직원답게 놀란 티를 전혀 내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가 아가씨의 자산관리인인 거지요.”
라이킨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아저씨가요? 왜요?”
그는 그 말에 목소리를 좀 더 낮췄다.
“뱀파이어는 마법사보다 오래 살거든.”
그의 낮은 목소리는 유난히 으스스했다. 토끼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 그에게서 조금 더 떨어졌다. 안 그래도 벌어져 있던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이 더 멀어진 지도 꽤 되었을 무렵, 고드윈 씨가 돌아왔다.
“준비가 되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보통 은행에 가면 돈을 조금 꺼내다 주는 게 아니던가? 소렐이 살던 곳에는 제대로 된 은행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신문이나 책을 통해 배웠던 게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일어났기에, 그녀 역시 함께 일어나는 수밖에 없었다. 고드윈 씨는 두 사람을 안쪽으로 안내했다. 철창으로 가로막힌 곳을 넘고, 아주 두터운 철문도 지나 아래로 향하는 계단을 밟았다. 소렐의 눈이 커졌다.
“무서워요?”
토끼가 바르르 떠는 게 느껴지고, 그녀가 겁을 먹은 냄새가 물씬 났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게 무서운 토끼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래엔 금고가 있어서 그래요. 거기에 유산이 다 있습니다.”
그 금고에 토끼를 처박고 가둘 생각은 전혀 없으니 겁먹지 말고. 소렐은 도대체 유산이 얼마나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걸음을 뗐다.
“이 지점에 보관되어 있는 유산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니,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말고.”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 고드윈 씨를 따라갔다. 아주 오래된 유물 같은 금고들이 서랍처럼 늘어서 있었지만, 고드윈 씨는 그 얄팍한 서랍들을 전부 다 지나쳤다. 그런 뒤 굳게 잠긴 철문을 하나 더 열고서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여깁니다.”
성인 남성 두 명이 간신히 열 수 있을 것 같은 거대한 문들이 열 개나 있는 복도였다. 고드윈 씨는 그 문 중 하나에 열쇠를 다섯 개나 꽂아 넣고, 신중하게 판을 맞춘 뒤 돌렸다.
“글래스턴 은행에서 보관하고 있는 이드리스와 헬레인 부부의 유산이자, 소렐 이드리스 양의 재산입니다.”
토끼는 번쩍거리는 40프랑짜리 금화로 가득한 문 안을 보고 기절할 듯 놀랐다.
“아, 저기 헬레인 왕실의 티아라가 있었군.”
다이아몬드가 가득한 티아라와 보석들이 한켠에 있는 걸 보고 중얼거리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교수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침착하다 못해 한가롭기 그지없었다. 소렐은 가장 커다란 단위인 40프랑짜리 금화가 아주 커다란 금고 안에 가득해서 놀랐지만, 그 금고에는 사실 금화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 이게 다예요?”
“아닙니다. 이곳에 있는 금고 네 개가 전부 이드리스 양의 소유입니다.”
이미 옆에 있던 또 다른 금고문을 열고 있던 고드윈 씨가 침착하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이 은행에 있는 게 전부가 아니기도 하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덧붙였다. 그는 이토록 많은 금화들을 보고도 아주 심드렁해했다.
“그럼 나머지 여섯 개는 다른 사람 건가 보네요.”
소렐은 자신이 받은 유산 말고도 주변에 호기심이 무척 많았다.
“그건 내 거.”
라이킨은 소렐의 눈이 말 그대로 토끼답게 커다래지는 걸 보고 슬쩍 웃었다.
“일단 얼마나 있는지 확인부터 한 다음에 당장 써야 할 만큼을 가지고 가도록 해요. 그리고 이제부턴 수표책을 쓰는 게 좋겠어.”
소렐이 가지고 있는 자그마한 지갑에는 기껏해야 10프랑하고도 50수가 들어 있을 뿐이다. 은화만 짤랑거리던 천주머니 안에 묵직한 금화가 들어가다니, 소렐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철컹철컹 열리기 시작하는 금고 문을 보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금고 문 다섯 개를 모조리 연 고드윈 씨는 서류를 하나 가지고 와서 소렐에게 내밀었다.
“현재 글래스턴 은행에서 보유하고 있는 이드리스 양의 자산과 채권, 그리고 보석 현황입니다. 또한 은행에서 관리하고 있는 부동산은 이 서류에 있습니다.”
“부동산이요?”
“예.”
가만히 보고 있던 라이킨이 한마디를 던졌다.
“공주님이 살던 집도 포함이니까 너무 겁먹지는 말고.”
“공주 아니라니까요!”
하지만 그녀는 공주가 맞았다. 그녀에게 상속된 보석은 지금은 완전히 사라진 헬레인 왕가의 티아라 일곱 개를 포함하여, 유서 깊은 진주 목걸이와 팔찌, 사파이어와 에메랄드, 루비까지 있었다. 그중에 가장 많은 건 값진 다이아몬드였다.
“……뭔가 착오가 있는 거 아닌가요?”
소렐은 간신히 되물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많은데, 이 은행‘에만’ 있는 게 이 정도고 이것보다 더 많다고?
“전혀 아닙니다.”
유능한 은행원 고드윈 씨는 딱 잘라 말했다.
“자산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신중하게 관리하고 있습니다. 신원보증 역시 확실합니다.”
고드윈 씨는 절차의 신빙성에 의심을 받았다는 사실이 조금 불쾌한 것 같았다.
“죄송해요, 저는, 이렇게 큰돈은 본 적이 없어서…….”
소렐은 재빨리 사과했다. 아빠와 엄마는 이렇게 많은 돈을 왜 숨겨두고 계셨던 걸까? 그녀는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이 돈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부유하게 키우자니 노리는 놈이 너무 많고.”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가 그녀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대답했다.
“지켜주자니 죽음이 가까워졌고.”
그는 말간 토끼의 눈을 보며 중얼거렸다.
“믿을 사람은 없고, 나는 멀리 있고.”
혹은 뱀파이어조차도 믿을 수 없고. 라이킨은 그 말은 결코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저 자그마한 토끼 공주님이 그를 경계하는 건 절대 안 될 일이다. 처음 펠릭스 이드리스의 목소리를 듣고 출발했을 때에는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지만, 이젠 생각이 달라졌다. 어떤 것을 생각하고 결정하는 건 좀 시간이 걸리지만, 나름의 결론을 열심히 실천하려고 애쓰는 저 아가씨는 꽤 마음에 들었다.
“바쁘셨나 봐요.”
뚱하니 그를 보며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소렐은 고드윈 씨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럼 제가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요? 제 말은, 여기에 계속 보관할 수 있나요?”
“저희 은행은 거액의 자산을 맡기신 고객님은 언제나 우대합니다.”
“할 수 있다는 얘기네요. 다행이다. 학자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어요.”
소렐은 조그맣게 말했다. 고드윈 씨는 이드리스와 헬레인의 상속인이 학자금 걱정을 했다는 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소리인지 생각했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어, 그럼……, 뭘 얼마나 사야 하죠?”
“글쎄.”
교수는 짧게 대답하며 소렐 이드리스를 유심히 살폈다.
“나도 뭘 사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차차 알게 되겠지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이 활기찬 도시가 소렐 이드리스를 어떻게 바꿔 놓을지 자못 궁금해졌다. * 소렐은 대도시의 냄새를 어렴풋이 기억했다. 바쁘게 움직이던 사람들, 멍하니 그녀를 마주 보던 또래의 작은 남자아이, 유모차를 미는 여자들, 빽빽한 도로를 굴러가던 자동차와 마차. 그녀도 아주 어릴 때는 커다란 도시에 살았다. 왜 작은 소도시로 가서, 그 변두리에 다시 터를 잡게 된 건지는 모른다. 그녀는 그저 아빠의 손을 잡고 따라갔을 뿐이다.
“들어와요.”
부부는 어쨌든 같은 집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도 라이킨은 소렐을 자신의 단출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단출하다고 하기엔 사실 굉장히 넓은 타운하우스였다. 빛이 바랜 벽돌로 튼튼하게 지은 집은 3층으로, 침실 5개에 욕실이 6개였다. 라이킨은 모든 층을 전부 다 훤하게 터놓고 사용했다.
“아니, 제임스. 이 아가씨는 누구인가요?”
소렐은 안쪽에서 걸어 나온 중년 부인을 보곤 멈칫거렸다. 그녀는 중년에서 장년으로 넘어가는 나이로 보였고, 체격이 땅땅했으며, 검은 머리카락에 백발이 섞여 회색으로 보였다. 그녀는 여느 부인들처럼 뜨개질로 짠 긴 조끼를 따뜻하게 입고 있었는데, 거기에 숄을 더한다면 퍽 잘 어울릴 것처럼 보였다.
“오늘 내 아내가 된 아가씨지요.”
부인은 눈을 크게 떴다. 소렐은 놀라서 물러섰다.
‘호랑이잖아!’
부인이 육식동물 꼭대기에 선 호랑이 수인임을 알아차리는 순간, 토끼는 펑, 하고 토끼 귀를 머리 위로 꺼내고 말았다. 소렐은 황급히 귀를 손으로 가렸다.
“어머나, 토끼랑요? 세상에나, 날 초대하지도 않고 결혼했다는 말이에요?”
부인은 놀라면서도 반갑다는 듯 웃었지만, 소렐은 호랑이와 뱀파이어 사이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건 그녀의 본능인지라, 어쩔 수 없었다.
“서류신고만 했습니다. 이드리스 양, 이쪽은 집을 돌봐주시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 에벌린, 이쪽은 소렐 이드리스 양입니다. 내 아내이기도 하고.”
그는 그 점을 아주 분명하게 했다. 이 집에서 소렐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들어서는 순간 정해진 셈이었다.
“세상에, ‘그’ 이드리스라면, 헬레인 공주님이네? 축하해요, 어서 들어와요, 어서. 식사는 했어요? 곧장 글래스턴으로 온 거예요? 제임스, 공주님 식사는 챙겼나요?”
대답 대신 소렐의 배에서 꼬르륵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만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집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청력이 지나치게 밝았다.
“아이고, 배가 고프구나. 벌써 시간이 6시인데 그럴 만도 하지. 내가 맛있는 걸 만들어줄게요. 못 먹는 거나 좋아하는 건 뭔지 말해줘요.”
일단 호랑이 부인의 첫인상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체구가 단단한 부인은 얼른 주방으로 달려갔고, 소렐의 가방을 대신 든 라이킨은 걸음을 옮겼다.
“올라갈까요?”
에벌린 스튜어트 부인이 사라진 곳을 힐끔대던 소렐은 어떻게든 토끼 귀를 도로 넣으려고 애쓰며 라이킨의 뒤를 따라갔다.
“침실은 내가 하나, 그리고 아래층에 에벌린이 하나를 사용하고 있어요. 나머지 세 개 중에서는……. 이 침실이 가장 좋을 것 같군요.”
그는 방문 하나를 열고 그녀의 가방을 들였다.
“감사합니다.”
소렐은 그렇게 말한 뒤 얼른 덧붙였다.
“번거롭게 해서 죄송해요. 조만간에 호텔로 옮기도록 할게요.”
마냥 물정을 모르는 시골 소녀인 줄 알았더니, 그녀는 천진난만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예의를 차렸다.
“왜요?”
이곳은 약간 서늘한 기온이 맴돌았다. 조명은 따뜻하지만 낮았고, 거대한 지식의 창고처럼 책이 빽빽하게 꽂혀 있었다. 자신의 집이자 권역 한복판에 선 뱀파이어가 기온처럼 서늘한 웃음을 지었다.
“뱀파이어의 집이라 영 마음에 안 드나?”
토끼의 눈이 동그래졌다. 놀라서 튀어나온 하얀 귀가 머리카락 위에서 빳빳하게 섰다.
“그게, 그게 아니라요, 갑자기, 그러니까, 갑자기 다 큰 여자애가 집에서 머무는 것도 불편하시지 않나요?”
“집이 꽤 큰데요, 공주님.”
“공주님 아니에요. 그리고, 그리고, 음, 이 집은 물론 굉장히 크지만요.”
그녀가 살던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크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들은 만난 지 채 24시간도 되지 않은 사이였다.
“저를 아저씨가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잖아요.”
콩콩 뛰는 가슴이 말을 하다 보니 조금씩 차분히 가라앉았다.
“왜 없습니까, 부부는 서로를 책임지는 게 맞는 거고, 나이가 많은 쪽이 어린 쪽을 책임지는 게 맞는 거지요.”
라이킨은 엄숙하게 말했다.
“그건 내가 펠릭스와 메리에게 약속한 것이기도 하고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아주 진중한 표정으로, 바람직하고 모범적인 말만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사실 딱히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토끼가 겁을 먹지 않고, 자꾸만 내빼려고 하지만 않는다면 얼마든지 모범적인 척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엄밀히 말해서 오늘 혼인신고를 했다는 걸 잊지 맙시다.”
그는 그녀가 입술을 불만스럽게 쭉 내미는 걸 보곤 미소를 지었다.
“필요한 게 있다면 에벌린이나 나에게 직접 말하도록 하고.”
“네.”
“내일부터는 대학 입학에 대해 알아봅시다.”
라이킨은 그 말에 소렐의 눈이 다시 반짝거리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세차게 고개를 끄덕인 그녀는 조심스럽게 뱀파이어를 불렀다.
“저기요, 아저씨.”
그가 눈으로 대답했다. 미소를 지은 채 있으니, 그 또한 퍽 다정하게 보였다.
“잘 부탁해요.”
내가 믿는 건 엄마와 아빠의 판단이지, 당신은 아니라는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합니다.”
소중한 고대 마법의 계승자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