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Hello, Stranger (1)2020.08.01.
소렐 이드리스는 올해 스무 살인 소녀로, 한 달 전에 아빠까지 여읜 고아였다. 그녀는 그래도 아주 씩씩하게 산과 들을 누볐다. 일찍 돌아가신 엄마는 얼마 남지 않은 토끼였고, 아빠는 대단한 마법사였다는 건 전부 다 비밀이다. 그녀는 어쨌든 토끼 피를 제대로 물려받아서 약초를 찾는 데에는 뛰어난 재능이 있었다.
“아, 찾았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기다란 토끼 귀만 꺼내 쫑긋하니 세우고, 들판을 사방팔방 돌아다니며 부지런히 약초를 캐 모았다. 누가 오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토끼 귀는 약초를 캘 때 많은 도움이 된다. 나머지는 인간의 손과 발이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 혼자서 살아가려면 열심히 해야 했다. 아빠는 돌봐줄 사람이 올 거라고 했지만, 천만에! 그녀는 아무도 믿지 않고 열심히 약초를 팔아서 대학에 갈 거다!
‘내가 죽거든, 너와 결혼할 사람이 올 거란다. 네 엄마와 내 앞에서 맹세했으니 꼭 올 거야. 걱정하지 마라, 소렐. 아주 믿음직한 사람이야.’
소렐은 아빠의 유언을 떠올렸으나, 다시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어서 떨쳐냈다. 오려면 벌써 왔지, 아빠가 돌아가신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세상은 혼자 사는 거랬다. 용감한 토끼이자, 형편없는 마법사인 소렐은 혼자서 잘 살기로 마음먹었다. 마법은 고대의 전설이 되어버렸고, 이젠 이 시골까지 철길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죽은 마법사의 유언은 잊히는 걸까. 작은 토끼 아가씨는 어쩐지 외로워서 눈가를 쓱쓱 훔쳐냈다. 아빠가 보고 싶었다.
‘안 돼, 울 시간이 없어!’
그녀는 바구니를 꼭 쥐고 다음 약초를 캐러 달려갔다. 아니, 달려가려고 했다.
“소렐!”
“엄마야!”
누군가가 강하게 부르는 소리에 토끼는 중심을 잃고 발라당 나자빠지고 말았다. 토끼 피를 타고난 주제에 균형도 못 잡고, 하여튼 최악이다. 소렐은 속이 상해 씩씩거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이름을 부른 이는 아무도 없었다.
“소렐, 어서 짐을 싸라!”
그녀의 커다란 귀가 쫑긋거렸다. 이 목소리는 돌아가신 아빠였다.
“아빠?”
“어서 짐을 싸도록 해! 이제 가야 한다!”
있긴 뭐가 있어, 아직까지도 안 왔으면 끝난 거 아닌가? 소렐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엉덩이를 걷어차서 보낼 테니 어서 짐을 싸! 넌 여기에서 평생을 보내선 안 돼!”
목소리는 그 말을 끝으로 사라졌다. 토끼 아가씨는 들고 있던 약초바구니를 툭 떨어트렸다. * 토끼 아가씨가 사는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유서 깊은 대학도시 글래스턴의 어느 연구실. 말이야 교수지, 강의보다는 연구에 치중하는 괴짜들만 긁어모은 가장 들어가기 힘든 구역에 앉은 남자가 있었다. 그는 담배를 뻑뻑 피워대면서 자료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소음이 들리기 시작했다. 덜그럭덜그럭, 덜컥덜컥. 서랍 하나가 들썩거렸다.
“……뭐지?”
남자는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툭 집어 던지곤 소리가 나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오래된 물건들 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보관하는 서랍이 들썩거리다가 마침내 휙 열렸다. 안에서 튀어나온 건 고대의 주문으로 만들어진 입이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우레와 같은 목소리가 그를 향해 포효했다. 이름을 불린 남자는 그 입을 다소 당황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드리스와 헬레인에 목숨으로 맹세한 것을 지켜라!”
“아, 그거 말이지. 그거 지키려고 했는데.”
“30일이나 지났다!”
그 커다란 입은 그를 잡아먹을 듯 다가와서 쩌렁쩌렁 소리쳤다.
“자네 죽었군.”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갑자기 일어나서 조금 놀랐을 뿐, 두렵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지상에 남은 유일한 수호자여!”
“알았어, 알았다고.”
“마법을 지켜라! 맹세를 지켜라! 당장!”
“알았다니까. 지금 가. 지금 간다고.”
간신히 대답하자, 그를 날려버릴 지경으로 크게 외친 입이 한순간에 휙 접히더니, 오래된 종이로 변해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귀가 먹먹해서 가만히 서 있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한참 후에야 종이를 집어 들고 펴보았다.
“……도대체 뭘 믿고 나랑 결혼을 시킨다는 건지.”
낡고 누런 종이에는 아주 강력한 주문으로 묶인 서약이 새겨져 있었다. 여기에 서명을 하는 두 사람은 부부로 묶이게 된다. 교수 직함을 대충 달고는 있지만 딱히 알려진 바가 없고, 그러면서도 권위와 권력이 대단한 남자는 걷고 있던 셔츠 소매를 풀어 내렸다. 피우고 있던 담배를 비벼 끄고, 간단한 가방을 꾸린 뒤 외투를 걸치곤 연구실을 나섰다.
“칼리에르 교수님, 어디 가시나요?”
좀처럼 이 시각에 움직이지 않는 그가 어딘가를 가다니. 연구실 바깥에서 마주친 그의 비서가 놀라 물었다.
“결혼하러.”
“예?”
“오늘은 일찍 퇴근해요.”
그는 계단을 빠르게 내려갔다.
* 소렐 이드리스는 오늘도 머뭇거리다가 결국 짐을 싸기보단 약초바구니를 택했다. 흥, 짐을 싸긴 무슨. 아빠와 단둘이 단란하게 살았던 이 작은 집은, 짐을 싸서 떠나기엔 제법 벌려놓은 것들이 많았다. 단순하게 짐을 싼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더 머뭇거렸다.
“으음…….”
그녀는 어쨌든 아빠의 말을 잘 듣는 착한 토끼이기도 했다. 결혼이란 게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빠가 그런 일을 대충 정해놓지는 않았을 거라는 것도 잘 알았다.
“누군지 모르지만 오면 짐을 싸든 말든 하지, 뭐.”
솔직히 소렐은 이 집을 떠난다는 것도 싫었다. 그녀는 오늘도 씩씩하게 집을 나섰다. 향긋한 약초들은 돈이 된다. 턱없이 모자라긴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아빠가 물려준 적은 유산을 까먹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새로 올 남편이란 양반이 어떤 사람일지 어떻게 아는가?
“그래도 집 가까이에 있어야겠다.”
누가 올지도 모르니까. 아빠는 아주 강력한 마법사였으나, 일부러 그 사실을 아는 이가 없는 곳으로 이사와서 소렐을 키웠다.
‘소렐, 세상에는 아주 많은 종족들이 있어.’
아빠는 세상이 어떤지 알려주며, 종종 다른 종족들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소렐은 뽀얀 코를 움찔대며, 약재상에게 팔 수 있는 약초를 찾기 시작했다. 약초며 맛있는 산딸기, 환하게 핀 토끼풀꽃, 민들레도 찾을 수 있다. 그녀는 바구니를 채우는데 정신이 팔려 점점 집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우와!”
집에서 멀어지고, 좋은 약초와 마음에 드는 꽃을 찾을수록, 그리고 사람이 없는 곳에 가면 갈수록 소렐은 토끼 귀를 바짝 세운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또 뭐 없나, 하고 신나게 뒤지는 거다. 소렐은 폴짝폴짝 들판을 자유롭게 뛰어다니고, 산등성이도 들쑤시고 다녔다.
“아니, 이건 그 귀하다는……!”
세상에나, 횡재했다. 어린 토끼가 신이 나서 바구니에 야무지게 약초를 담고, 열심히 모종삽으로 흙도 파보았다.
“와, 이거면 일주일치 장을 볼 수 있어……!”
오늘 정말 운이 좋았다. 소렐은 무척 좋아하면서 바구니에 약초를 채워 넣다가, 열심히 꼭꼭 채워 넣으려다가…….
‘응?’
갑자기 움찔거리며 굳었다.
‘뭐가 있어!’
정확하게는 뭔가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 정도야 한입에 털어먹을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맹수가 날카로운 눈으로 그녀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고, 뼛속까지 한기가 들었다. 소렐은 오들오들 떨면서도 빠르게 또록또록 눈을 굴렸다.
‘어디로 도망가지?’
그녀는 도망갈 곳을 열심히 찾았다. 절대로 뒤는 돌아보지 않고 앞만 바라보며 찾았다.
“소렐 이드리스.”
이름을 불린 토끼는 뒤를 홱 돌아보곤 황급히 튀어나와 있던 귀부터 가렸다. 어떡해, 어떡해! 들켰어! 내 정체를 들켰어!
“아닌데요!”
너무 당황한 나머지 반사적으로 툭 튀어나온 말을 해놓고, 소렐은 눈을 질끈 감았다. 이보다 더한 긍정은 할 수 없을 것이다. 멍청하게 이런 말을 하다니, 차라리 입을 다물걸! 눈을 꼭 감고, 사람 귀라고 할 수 없는 기다린 귀를 어떻게든 작은 손으로 가리려고 애쓰며 바들바들 떠는 소녀를 물끄러미 보고 있는 남자는 맹수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분명히…….
“……맞네.”
아주 차갑고, 피가 거의 흐르지 않으며, 세차게 뛰는 그녀의 심장에 비하면 거의 죽은 듯이 박동하는 존재였다. 그는 그녀를 보면서 너 소렐 이드리스 맞다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뱀파이어!’
남자의 정체를 간파한 토끼는 숨을 쌕쌕 내쉬었다. 그는 숱이 많은 진한 금발에 잘 어울리는 연한 하늘색 셔츠와 아주 진한 남색 재킷을 입고 있었다. 대학도시에서 사는 신사처럼 얄팍한 넥타이를 대충 한 그는 완전히 얼어붙은 토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들 사이의 거리는 제법 되었으나, 뱀파이어는 토끼를 바로 잡아버릴 수 있을 만큼 몸놀림이 빠른 존재였다.
“나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고 하는데, 아버지에게서 뭐 들은 거 없습니까?”
소렐은 머리 위에 튀어나온 토끼 귀를 자그마한 손으로 필사적으로 누르며 감추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봤자 그 깜찍한 귀는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본능적으로 쫑긋거리고 있는데 말이다.
“우리 아빠가 누군데요!”
겁에 질렸으면서 소리를 빽 지른 소렐의 눈에는 반항기가 가득했다. 뼛속까지 얼려버릴 것처럼 차갑고, 그만큼 무시무시한 뱀파이어가 빠르게 말했다.
“펠릭스 이드리스, 필립 이드리스와 오르가나 몰런의 아들, 고대 마법의 계승자이자 위대한 마법사, 토끼 종족 ‘헬레인’의 마지막 공주 메리의 남편, 향년 782세로 사망.”
그리고 그 말을 듣자마자 소렐은 뒤돌아서 마구 달려가기 시작했다. 라이킨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뱀파이어 앞에서 저렇게 도망가다니, 펠릭스는 딸에게 뭘 가르친 걸까? 그는 한숨을 쉰 뒤 순식간에 몸을 날렸다. 그가 소렐을 따라잡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러나 그가 소렐을 붙잡았을 때, 소렐은 한 번 더 기겁을 하고 말았다.
“잠깐 멈……!”
멈춰서 말이나 합시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오래 묵을 만큼 묵은 뱀파이어는 그의 손에 붙잡힌 여자가 쑥 사라지는 걸 보고 놀랐다. 그녀가 입은 모직 원피스가 그의 손에 남아 축 늘어졌다.
“잠깐만!”
원피스며 머리 리본이 툭툭 떨어지고, 신발도 그냥 나뒹굴었다. 그 아래로 하얗고 작은 토끼가 잽싸게 튀어나가는 걸 본 라이킨은 이마를 붙잡았다.
“맙소사.”
소렐 이드리스는 엄마의 피를 아주 제대로 물려받은 모양이다. 그녀는 완벽한 토끼로 변해서 깡총깡총 뛰어 수풀 사이로 사라져버렸다. 흔들리는 수풀과 허망한 바람, 그리고 그의 손에 남은 소녀의 옷가지가 전부였다. 지적인 만큼 난폭하고 잔인한 뱀파이어의 코에 연약하고 작은 생명체의 냄새가 가득 들어찼다. 작고 어여쁜 것이 잔뜩 겁에 질린 냄새가 났다. 뱀파이어는 손에 남은 머리 리본을 보며 서늘하게 웃었다. * 소렐이 달아난 건 아빠의 유언이나 마법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는 토끼 종족의 피를 타고났고, 생물의 피를 마시고 사냥을 하는 뱀파이어는 천적이나 다름없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갑자기 나타난 저 뱀파이어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깨닫고 달아난 것이다.
‘어, 어떡하지?’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정말로 아빠가 보냈다고? 아빠가 782살에 돌아가셨다는 것까지 다 알고 있다니! 혹시 아빠가 남긴 것들을 노리는 사람이 아닐까? 분명히 아빠는 남편이 올 거라고 했다. 이제 겨우 스물, 펠릭스 이드리스가 늦은 나이에 간신히 얻은 외동딸은 바위와 풀 사이에 숨어서 귀를 축 늘어뜨렸다.
‘뱀파이어가 남편이라니, 무슨 생각이야, 아빠…….’
엄마는 그녀가 열 살쯤에 돌아가셨다. 아빠도 그녀와 더 길게 있어주진 못했다. 아빠는 그렇게 오래 살아놓고선 유산은 쥐꼬리만큼 남겼고, 혼자 남은 토끼가 선택할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홀로 위대했다는 마법사는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혹시 다른 사람이 남편인 건 아닐까?’
또 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토끼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살금살금 집 쪽으로 가서, 누가 또 오진 않았나, 뱀파이어가 갔는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채 다 자라지도 못하고 성장이 멈춘 아기 토끼, 이래저래 좋은 핏줄에서 좋은 건 하나도 못 타고 태어난 아이는 두려운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꽥.’
집 앞에는, 다리가 엄청나게 긴 뱀파이어가 이미 와서 앉아 있었다. 그가 들고 온 서류 가방 위에는 그녀가 입고 있던 모직 원피스며 양말이 잘 개어져 있었다. 속옷까지 포함이다. 토끼는 눈이 동그래져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나오는 게 어떨까요, 공주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대단히 잘생겼지만, 그만큼 아주 금욕적으로 생긴 뱀파이어였다. 그는 좀 피곤했지만, 참을성 있게 메리 헬레인 공주의 하나뿐인 딸에게 달래듯 말했다. 이 주변을 잘 모르기도 했고, 어리지만 날쌘 토끼를 잡으려고 들판을 헤매고 다닐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토끼가 가까이 다가왔다는 것 정도는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에 대해 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왔는데.”
그는 토끼가 그를 빤히 보고 있는 쪽을 향해 아주 오래된 종이를 내밀어 보였다. 너무 낡아서 누렇게 되다 못해 갈색이 되어버린 종이에는 붉은 주문이 새겨져 있었다. 그걸 알아본 토끼의 눈이 커다래졌다.
“여기 보입니까, 펠릭스……, 당신 아버지가 만든 주문이?”
파들파들 떨던 토끼가 놀라서 딱 굳은 게 굳이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토끼는 앞으로 한 발자국 나왔다. 뱀파이어는 얼른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종이만 내밀었다. 그러나 그는 분명히 보았다. 손바닥만 한, 눈처럼 새하얀 토끼가 빨간 입을 헤 벌린 채 종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을.
‘저렇게 작은 토끼라고?’
맙소사, 펠릭스. 자네 도대체 나에게 뭘 맡기고 간 건가. 다 큰 것도 아니고, 영락없이 새끼였다. 너무 작아서 손을 댔다간 큰일이 날 것 같았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는 속으로 탄식했다. 토끼는 코를 씰룩대더니 주변을 조심스럽게 돌아보곤 한 발자국 더 내밀었다. 강력한 마법으로 묶인 그 종이는 일종의 맹세였다. 소렐은 아빠의 마법을 알아보고, 그 옆에 나란히 서명된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는 멋들어진 필체를 쳐다보았다.
“공주님한테 이것의 반쪽이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오늘오들 떨던 토끼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했다.
“공주 아니에요.”
“헬레인 왕가의 직계혈통은 공주가 맞습니다만, 싫다면 다른 호칭으로 부르지요.”
주변에 지나가는 마을사람이 없는지 몇 번이나 확인한 소렐 이드리스는 조금 더 뽈뽈 다가왔다. 그 모습이 상당히 귀여워서 라이킨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아빠랑 아는 사이예요?”
경계심 가득한 목소리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요?”
“태어날 때부터.”
“아저씨가?”
“아가씨 아빠가. 난 마법사보다는 오래 사니까.”
아, 그렇구나. 소렐은 일반인이라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다. 그녀는 라이킨과 한참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서 그를 경계하듯 쳐다보았다.
“그래서 아저씨가 누군데요?”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니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뱀파이어인 건 알아차린 모양이고.”
토끼 옆에 뱀파이어를 갖다 붙이다니, 펠릭스 이드리스는 몹시 무모한 사내였다. 그러나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라면 괜찮았다. 그는 자제력이 극도로 강한 뱀파이어로 유명했다. 토끼가 놀라서 숨을 또 크게 쌕쌕거리는 걸 보곤 제임스는 참을 수 없어서 그냥 웃었다.
“글래스턴에서 교수로……, 여기 명함이 있는데 볼래요?”
그의 정중한 말투는 어린 토끼를 귀여워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는 제 명함집에서 아주 고급스러운 명함 한 장을 꺼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토끼를 해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몸짓으로 조심조심 명함을 가지고 와서, 정확하게 그들 사이의 중간지점에 내려놓은 그는 두 손을 들고 물러났다. 겁 많은 토끼는 그 명함에 손을 대지는 않고, 멀찍하게 떨어져서 읽었다. 제임스 라이킨 칼리에르, 글래스턴 대학 벨파이어 칼리지 소속 교수, 왕립학회 회원 토끼는 침을 꼴깍 삼켰다. 글래스턴 대학의 명성은 익히 들어왔다.
“……벨파이어 칼리지는 뭐하는 데예요?”
하얀 토끼가 오물오물 말하는 건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웠다. 물론 그는 뱀파이어였기에 ‘깨문다’는 표현은 최대한 자제하기로 했다.
“연구만 하는 학자들이 모여 있는 곳. 한때 펠릭스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고.”
“우리 아빠가요?”
토끼의 눈이 동그래졌다.
“몰랐습니까?”
“전혀요.”
“얼마 안 됐는데. 한 백 년 전까지는…….”
“엄청 오래됐잖아요!”
경계하는 것도 잊은 소렐의 탄성에 라이킨은 어쩐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실례지만 이드리스 양,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스물이요.”
백하고 스무 살도 아니고, 그냥 스물? 담배를 물려던 라이킨이 굳어버렸다. 아무리 어리다 해도 적어도 백 살은 된 줄 알았는데, 완전히 핏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