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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80)화 (180/180)

180화 에필로그 2화

확실히 말하지만, 숲으로 통하는 문 앞에 이리 옹기종기 모여 있던 건 절대적인 우연이었다.

그의 부재를 처음 겪은 로드릭은 결재 받아야 할 일이 쌓여 가자 점차 초조해졌고, 급기야 그가 사라진 문 앞에서 서성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소렐 부인과 시에나가 발견했고, 호기심에 합류했다. 혹시 무슨 소리가 들릴까 싶어 시에나가 문에 귀를 대 보았지만 들리는 건 숲의 바람 소리뿐이었다.

“이 문, 조금만 열어 보면 안 되겠죠?”

“그러다 공작님께서 아시는 날엔─.”

소렐 부인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답하자 시에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더 말씀하지 않으셔도 알 것 같아요. 하하…….”

그러다 우연히 주위를 지나던 에릭이 목소리를 듣고선 다가왔다. 그는 눈앞의 상황을 훑어보며 어이없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뭡니까?”

흠흠. 멋쩍은 얼굴로 헛기침을 한 로드릭이 최대한 의연하게 대꾸했다.

“……혹시 오늘은 나오실까 하여 동태를 살피고 있던 참입니다.”

그에 에릭은 대놓고 헛웃음을 흘렸다.

“여기가 전쟁텁니까? 동태를 살피게. 그러다 정말 주인님께서 나타나시면 그때도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고 말씀드릴 생각입니까?”

“경께서도 답답한 건 사실이지 않습니까. 집무실에 쌓인 서류 때문에 조만간 발 디딜 틈도 없어지겠던데요.”

“그렇다고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주인님께서─.”

그 순간, 로드릭의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이리 앞에서 모여 얼쩡거리면서도 그 문이 열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다들 잠시 멍한 얼굴이 되었다.

잠든 벨라를 안아 들고 나타난 그가 눈앞에 벌어진 광경을 보고는 표정을 구겼다. 이어 조용한 목소리로 질타했다.

“이건 또 무슨 짓거리야.”

뒤늦게 벨라의 모습을 확인한 시에나는 사뭇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었다.

“아, 아가씨!”

“……괘, 괜찮으신 겁니까?”

덩달아 로드릭까지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벨라를 살피는 모습에 그의 짜증은 순식간에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벨라가 깰까 싶어 화는 물론이고 목소리도 최대한 억눌러야 했다.

“다 입 좀 다물지. 잠든 거 안 보여?”

그가 누군가를 소중히 안아 든 모습이 낯설고 어색해서 그런지, 잠들었다고 말했음에도 에릭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눈길은 자꾸만 그녀를 흘긋거렸다.

벨리아르는 그들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에릭은 재빨리 그 뒤를 따랐고, 남은 이들은 그제야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둘의 일탈은 무사히 막을 내렸다.

그는 벨라를 제 침실에 눕혀 놓곤 능숙한 손길로 잠자리를 정돈해 준 뒤 집무실로 향했다.

책상 위에 가득 쌓인 서류에도 그는 전혀 놀란 기색 없이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볍게 훑어보는 듯하면서도 그의 눈빛은 사뭇 진지했다.

에릭은 가장 먼저 처리하고 싶었던 것을 들고 와 그에게 내밀었다.

“이 저택들은 어떻게 할까요?”

대륙 각지에 사들인 별저 목록이었다. 좋은 위치의 저택을 최대한 빠르게 사들이려니 제값보다 훨씬 웃돈을 얹어 매입한 곳이 대다수였다.

“사용인들 고용해서 관리해 놔. 언제든 벨라가 가고 싶다고 하면 바로 갈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다시 처분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려던 에릭은 조용히 말을 삼켰다. 그저, 그녀에게서 몰래 받아 적어 두었던 목록은 얼른 태워 버려야겠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 * *

벨라는 눈을 뜨자마자 버릇처럼 옆자리로 손을 뻗었다. 잠결에 허공으로 헛손질을 몇 번 하고서야 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조금 더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처리할 일이 있어서 잠시 밖에 다녀올게. 더 자고 있어.”

그래도 허전한 옆자리에 아주 조금 울적해졌다. 아직도 졸음에 푹 잠긴 상태였지만 더 자기는 싫어 꾸역꾸역 몸을 일으켰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니 익숙한 방 안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침실이었다. 옆에는 토끼 인형이 놓여 있었다.

벨라는 옅게 웃으며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보니 리라가 떠올랐고, 제게 잔소리를 쏟아부을 시에나가 떠올랐다.

“……시에나에게 먼저 가야겠다.”

저 때문에 괜히 맘고생을 했을 테니.

벨라는 물을 조금 따라 마신 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양팔을 위로 쭉 뻗어 찌뿌둥한 몸을 풀고선 방 안을 둘러보다 느릿한 걸음을 옮겼다.

매일같이 지내던 곳임에도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졌다. 전엔 창살 없는 감옥 같았다면, 지금은 그저 아늑하고 마음이 편했다. 비로소 집에 돌아온 것처럼 안온했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그의 책상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책상 위를 쓸어 보기도 하고, 그가 쓰던 펜을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책상 한쪽에 한데 뭉쳐져 있는 서류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손은 대지 않고 눈으로만 글자를 읽어 보았다. 얼핏 보아하니 집 계약 문서인 듯했다. 그런데, 저택의 소재지가 조금 낯익었다.

벨라는 곧바로 손을 뻗어 다른 문서들도 확인해 보았다. 모두 저택을 사들인 흔적이었다.

“……이게 다 뭐야?”

기막힌 우연의 일치인 건지, 저택의 소재지들은 모두 자신이 알고 있는 곳이었다. 단순히 알고 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심지어 시에나에게 말했던…….

“에릭 경, 많이 바쁘세요? 할 일이 별로 없어서 도와주실 일도 없는데…….”

“아닙니다.”

어쩐지. 에릭 경이 왜 굳이 거기 서서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나 했다. 그렇지. 그렇게 순순히 놔줄 사람이 절대 아닌데.

오롯이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서 문서들을 살펴보느라 그가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다.

상황을 전혀 모른 채 들어온 그의 눈엔 무언가를 열심히 보고 있는 그녀가 마냥 귀여워 보였다. 그는 벨라를 뒤에서 살며시 끌어안고서 가녀린 목에 입술을 묻었다.

“뭐가 그렇게 재밌어?”

“이거 뭐예요?”

벨라는 그의 눈앞에 문서를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고개를 든 그가 문서의 정체를 알아보곤 이를 꽉 깨물었다. 딱 봐도 곤란해하는 얼굴이었다.

“음.”

“진짜 너무한 거 아니에요? 난 그것도 모르고……! 공작님께서 정말 저를 놔주려는 줄 알았잖아요!”

그는 정말 그녀를 놓아주려고 했었다. 다만, 벨라의 소재를 아예 모르고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네가 어디로 갈지 모르니까. 그렇다고 알 수 없는 곳으로 완전히 보냈다간 진짜 돌아 버릴 것 같아서 그랬어.”

“따라와서 감시할 생각이었어요?”

“아니. 그냥, 한 번씩 가서 몰래 보고 올 생각이었어. 이 저택들은 네게 주려고 했었고. ……봐봐, 다 예뻐.”

벨라는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가리키는 대로 저택이 그려진 그림을 보니 또 예쁘긴 예뻐서 더 짜증이 났다.

“벨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이 세상의 재물을 다 끌어모으진 못했는데, 어느 정도는 끌어모았어. 다 네 거야.”

그가 오두막에서 어느 날 저런 말을 하길래 정확히 이해는 안 갔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새삼, 그녀는 그가 제 생각보다 훨씬 정상의 범주를 벗어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렇다고 이 많은 곳에 집을 다 사요? 공작님은 대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입술이 급하게 맞물렸다. 그는 벨라의 목덜미를 감싸 쥐고선 부드러이 어루만지며 자연스레 고개를 뒤로 젖히도록 만들었다.

달래듯 눅진하게 입술을 머금던 그가 끝내 입술 사이를 비집고 침범했다. 버릇처럼 올라간 손이 머리칼을 아프지 않게 쥐었다가 금방 다시 내려갔다.

등줄기를 느릿하게 훑던 손이 그녀를 가볍게 들어 올려 책상에 앉혔다. 그동안에도 입술을 탐하는 행위는 지독히도 끈질기고 집요했다.

중간중간 잔뜩 열 오른 숨이 드나들며 빠듯하게 틈을 메웠다. 벨라는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당당하게 그의 키스에 응했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입술을 머금은 채 나직이 웃었다. 나른히 반쯤 눈을 뜨니 새침하게 저를 흘겨보는 눈초리가 보여 또 한 번 웃고 말았다.

“저 화났어요.”

입술이 맞물린 채 그런 소리를 하니 그는 조금 곤란했다. 정말 미안하긴 한데, 그만큼 괴롭히고 싶었다.

“알아. 사과하는 거야. 말로 미안하다고 하는 건 진정성이 없잖아.”

“……정말 뻔뻔하시네요.”

그는 싱긋 웃으며 그녀의 허리를 휘감아 제 쪽으로 바짝 끌어당겼다.

“고마워.”

자연스레 그녀의 다리 사이를 차지한 그는 승리자처럼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벨라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치마 안쪽으로 들어온 손이 허벅지 안쪽을 뭉근히 쓰다듬었다. 그녀는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둘의 밤은 조금 일찍 찾아왔다.

어둑어둑 해가 질 무렵, 벨라는 또 걸을 힘까지 그에게 몽땅 빼앗기고 말았다. 이젠 반쯤 포기한 채 그가 씻겨 주는 대로 몸을 맡겼다.

뽀송해진 상태로 그에게 안겨 침대에 누워 있으니 더없이 행복한 나른함이 온몸을 덮쳐 왔다.

그 와중에도 제 손가락보다 거의 두 배쯤 굵은 것 같은 그의 손이 신기해 계속 만지작거렸다.

“공작님께서 주신 선물들 다 처분해 달라고 했어요.”

“잘했어.”

“그 돈은 제 맘대로 쓸 거예요. 아주 펑펑 써 버릴 거라고요.”

“가장 듣기 좋은 말이네. 어디에 쓸 건데?”

생각을 해야 하는데, 너무 나른하고 졸려서 사고가 죽죽 늘어졌다. 그래서 그냥 생각을 다듬지 않고 말을 내뱉었다.

“마녀의 집을 지을 거예요.”

“마녀의 집?”

“저처럼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물론 ‘마녀의 집’이라고 써 놓진 않을 거예요.”

“별로 마음에 들진 않지만, 우리 벨라가 하고 싶다면 얼마든지.”

“음, 신전에서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그건 공작님께서 막아 주세요.”

“베른에 지으면 되겠네. 신전 놈들 한 발자국도 못 디디게 할게.”

“……로드릭 경께서 어떤 표정을 지을까요.”

“찍소리도 못하게 할게. 어디서 감히.”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호하게 돌아오는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벨라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고선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공작님의 권력이 지금은 조금 마음에 들어요. 그래서 죄책감이 들기도 하고…….”

“세상에 공짜는 없어, 벨라.”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치사한 거 알아요?”

“너한테 거절당할까 봐 불안한 모양이지.”

“겁쟁이네요.”

그는 그녀를 틈 없이 끌어안고선 부드럽게 속삭였다

“벨라, 나랑 결혼해 줘.”

벨라는 조용히 웃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내렸다. 당한 게 있으니 조금 더 애태우고 싶었지만, 마음이 달아올라 여유가 없는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벨라는 그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번에는…… 당신을 혼자 두지 않을게요.”

먼 길을 돌고 돌아 비로소 제자리였다.

<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에필로그 마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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