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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79)화 (179/180)

179화 에필로그 1화

하아──.

땅이 꺼질 듯 깊은 한숨에 에릭이 고개를 들었다. 집무실 이곳저곳의 먼지를 닦던 소렐 부인도, 그리고 차를 우리던 시에나까지.

모든 시선을 끌어모은 로드릭은 다시 한번 짧은 한숨을 곁들이며 들고 있던 서류를 던지듯 내려놓았다. 가뜩이나 불안불안하던 분위기가 한층 무거워졌다.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합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 아니었습니까?”

에릭은 다시 흐트러진 서류들을 모아 분류하며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자 로드릭은 시에나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가씨를 뵌 지 얼마나 지났지?”

“한…… 한 달째 되어 가는 것 같아요.”

“이것 보십시오. 무려 한 달입니다, 한 달! 인간적으로 사람이 한 달째 보이지 않으면 분명 무슨 문제가 생겼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때때로, 그리고 난데없이 펼쳐지는 회의의 주제는 언제나 같았다.

대체 성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어느 날 그는 온종일 사용인들을 시켜 숲의 오두막에 가구를 들여놓았다. 그러고는 다음 날 벨라를 데리고 사라져 버렸다.

성내의 사람들이 무슨 상황인지 채 파악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 자리에서 에릭을 제외한 셋 역시 분명 그가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벨라를 다시 잡아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히 그 오해는 에릭이 풀어 주었지만, 여전히 사람들의 마음속에 벨리아르 공작에 대한 불신은 싹이 남아 있었다.

“그렇다고 설마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

에릭이 대수롭지 않게 던진 말에 집무실 분위기가 일순 얼어붙었다.

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시에나가 자그맣게 숨을 들이켜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 사소한 반응이 분위기를 더욱 뒤흔들었다. 로드릭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하자 에릭은 결국 이마를 짚었다.

“……그렇게 극악무도한 분은 아니십니다.”

“아니라고요?”

로드릭의 반문에 에릭은 잠시 멈칫거렸지만, 그래도 이 사실만은 분명했다.

“적어도 아가씨께는요.”

가만히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시에나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정말 아가씨께선 괜찮으실까요……? 그, 신변에 문제가 있을까 봐 그러는 게 아니라요……. 한, 한 달 동안이나 그렇게 시달리시면…….”

어째 뒤로 갈수록 시에나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말뜻을 알아챈 소렐 부인이 다급히 다가와 그녀의 등을 살짝 내리쳤다.

“시에나! 얘가 부끄럼도 없이…….”

하지만 그리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덕분에 둔한 남자 둘이 그 말에 숨은 뜻을 이해해 버렸으니 말이다.

에릭은 나직이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고, 로드릭은 머릿속에 지나가는 상상이 꽤 충격이었는지 점점 입이 벌어졌다.

“……그곳은 성역인데! 신성한 성역에서 어떻게, 그런……!”

아무리 페이트 기사단에 사직서를 내던지고 왔다지만, 로드릭은 뼛속까지 신앙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다.

끝내 에릭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이어 나직한 중얼거림이 퍼졌다.

“돌겠네, 진짜.”

지금 벨리아르의 부재로 가장 미칠 것 같은 건 에릭이었다.

* * *

푸르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잘게 부서져 내려 눈가를 간지럽혔다. 오두막이 있는 곳은 하늘이 뻥 뚫려 있어서 그런지 아침이면 커다란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비쳤다.

그녀는 저를 감싸는 따듯한 온기가 기분 좋은지 잠결에도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먼 기억 아래 파묻혀 있던 버릇들이 점차 제자리를 찾아갔다.

늦은 아침 특유의 나른한 햇살이 더없이 행복했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부터 잠결에서 빠져나왔다.

밤새 꿈도 꾸지 않고 푹 잔 덕분인지 눈꺼풀이 제법 가볍게 들어 올려졌다. 그의 너른 품이 부스스한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들자 가만히 잠든 그가 보였다. 벨라는 옅게 웃으며 그의 단단한 턱선을 손끝으로 살며시 쓸어 보았다.

그래도 미동이 없는 걸 보니 꽤 깊게 잠든 모양이다. 벨라는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상체만 일으킨 그녀는 손바닥으로 침대를 짚어 몸을 지탱한 채 본격적으로 그의 자는 모습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평소 붉은 눈동자로 눈을 마주할 땐 특유의 위압감 때문에 저도 모르게 긴장하곤 하는데, 이리 잠든 모습은 느낌이 또 달랐다. 나른한 햇살에 잠긴 모습은 더욱이.

쌍꺼풀 없이 길고 또렷한 눈매에 쭉 뻗은 콧날,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자리 잡은 이목구비를 받치는 강직한 턱선까지. 손끝으로 덧그리며 내려가니, 마치 천재 화가가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눈을 뜨면 차갑고 사나운 성질이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지금은 조각상처럼 부드러웠다. 이렇게 보다 보니 새삼.

“잘생겼다…….”

벨라는 자신이 입 밖으로 중얼거린 줄도 모르고선 멍하니 그의 얼굴을 감상하는 데에 빠져 있었다. 그러다 더 이상 웃음을 참지 못한 그가 눈을 감은 채 픽 웃고 말았다.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손을 거둔 벨라는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어……!”

침대가 그리 넓지 않은 탓에 여차하면 바닥으로 굴러떨어질 뻔한 찰나, 그가 팔을 확 잡아당겼다.

덕분에 꼴사나운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만, 그의 단단한 품에 고개를 박는 것도 그리 바람직한 결과는 아니었다. 뒤늦게 찾아온 부끄러움은 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냥 그대로 그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을 택했다. 뺨으로도 모자라 귀 끝이며 목덜미까지 화끈함이 번졌다.

그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낮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안. 하던 거 계속해.”

벨라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태연하게 놀리는 말투가 너무 얄미웠다. 결국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왜 맨날 자는 척하시는 거예요?”

“맨날 해도 맨날 속으니까. 그 모습이 맨날 귀여워 죽겠으니까. 왜, 이유 더 말해 줘?”

그녀가 대놓고 눈을 흘기는데도 그의 얼굴엔 기분 좋은 미소만이 만연했다. 그는 그녀가 아무리 앙칼지게 쳐다봐도 여전히 아래로 처진 눈꼬리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그는 그날 이후로 매일 사랑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들을 때마다 매번 새롭고 간지러운 말이었다. 벨라는 부끄러운 속내를 들킬까 봐 그의 눈을 피했다.

“오늘은 제가 아침 차릴게요.”

그는 일어나려는 벨라의 허리를 감아 다시 제 품에 가두었다.

“조금만 더 이러고 있자.”

“제가 만든 음식이 그렇게 맛없어요?”

“아니. 네가 힘든 게 싫어서 그래. 내가 할게.”

“……저번에 먹다가 한숨 쉬시는 거 봤어요.”

“너무 행복하면 한숨도 나오고 그래.”

어쩜 저리 한 치의 고민도 없이 술술 맞받아칠까. 벨라는 그에게 자극받아 저 역시 살짝 머리를 굴려 보았다.

“예전에 단검 쓰는 법 가르쳐 주신다고 하셨던 거 기억나세요? 수도에 가는 마차에서 그랬는데.”

“기억 안 나.”

정확히 기억 나는 모양이다.

“가르쳐 주세요.”

“위험해서 안 돼.”

“안 위험해요. 제가 애도 아니고.”

날짜 감각도 잊어버릴 정도로 단둘이 오두막에서 뒹굴다 보니 둘 사이는 제법 가까워졌다. 그녀도 이제 이런 말대꾸쯤은 할 수 있게 되었고.

“위험하다고 했어. 작은 칼에도 매번 손 베이면서.”

“저도 사과로 토끼 만들어 보고 싶단 말이에요.”

가벼이 투정도 부릴 정도였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살짝 쥐고선 아프지 않게 꾹꾹 눌렀다.

“이 머리통은 어떻게 하면 ‘사과로 토끼를 만들고 싶다’에서 ‘검술을 배우고 싶다’로 생각이 연결되지?”

“그럼 토끼 만드는 법은 가르쳐 줄 거예요?”

“칼로 하는 것 중에 뭐든 한 가지를 꼭 배워야겠다면. 그래, 차라리 사과 깎는 걸로 하자.”

“봐요, 처음부터 토끼 만드는 법 가르쳐 달라고 했으면 또 안 된다고 하셨을 거잖아요. 가르쳐 준다고 하셨으니까 이번엔 말 바꾸면 안 돼요.”

그는 이내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녀를 품에 꽉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옆구리를 살살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그렇게 약은 짓은 누구한테 배웠어. 응?”

“아아, 간지러워요! 그만……!”

그녀가 자지러지게 웃으며 버둥거리니 그는 곧 손을 멈추고는 머리에 가벼운 입맞춤을 여러 번 해 주었다.

“자꾸 이렇게 넘어가려고 하면 곤란한데.”

“저 시에나 보고 싶어요. 에릭 경도 보고 싶고, 소렐 부인도…….”

어차피 더 이상 이름을 댈 인물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할 말을 다 끝낸 건 아니었다. 그 전에 그가 입술로 입을 막아 버린 탓이었다.

가벼운 듯하면서도 묵직하게 내리누르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그는 끝내 통통한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멀어졌다.

“내 앞에서 다른 사람 보고 싶다고 하지 마.”

“……이런 것도 질투한다고요?”

“네 생각보다 내 속은 훨씬 비틀렸거든.”

“일도 하셔야 하잖아요.”

“에릭이 하겠지.”

“에릭 경을 너무 괴롭히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서 걱정돼?”

또. 또 금세 붉은 눈동자가 질투에 휩싸여 일렁였다. 하여튼, 무슨 말을 못 해. 속으로 웅얼거린 벨라는 사나워진 그의 눈가를 살살 문질렀다.

“지금 공작님이랑 이렇게 지내는 것도 저는 너무 좋은데요, 저 때문에 공작님께서 게을러지시는 건 싫어요.”

“조금 억울하네. 그리 게으르게 퍼져 있기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더 부지런해져 볼게. 그가 다분히 노골적인 손길로 옷자락을 들치려 하자 그녀는 단호히 밀어냈다.

“일도 안 하고 매일 저랑 놀기만 하시잖아요.”

“성으로 돌아갔으면 좋겠어?”

“지금 너무 좋지만, 이게 일상이 되는 건 별로예요.”

그가 고민하는 듯 음, 하며 낮은 소리를 냈다. 그의 가슴팍에 닿은 귀로 나직이 울리는 소리는 정말 듣기 좋았다.

“네가 항상 내 눈 닿는 곳에 있었으면 좋겠어. 달콤한 디저트 잔뜩 준비해 줄 테니까 침대에서 놀고 있으면 안 될까? 필요한 건 다 구해 줄게.”

“예전처럼요?”

벨라는 그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며 태연히 되물었다. 그는 자조하듯 옅게 웃었다.

“나도 내 성질이 왜 이리 더럽게 뒤틀려 있는지 모르겠어. 이러면 네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잘 안 돼.”

“할 일 없을 땐 그렇게 할게요. 그리고…… 어디 갈 땐 공작님께 말하고 갈게요. 산책하러 갈 때도요.”

“그러다가 짜증 나면 한 대씩 때려. 화도 내고, 마음껏 짜증도 부리고.”

“그럴 거예요.”

이렇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고, 서로에게 물드는 법을 배워 갔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우리는 애초에 정상적이지 않았으니.

“우리, 이제 집에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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