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시에나는 아까부터 얼굴을 보여 주지 않은 채, 야무진 손길로 옷을 정리해 가방에 넣고 있었다.
옷을 보지도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집어 개는 걸 보니 지금 심정이 어떤지는 안 봐도 뻔했다.
“나 정말 괜찮아. 짐 챙길 것도 별로 없다니까…….”
“성을 떠나시는데 챙길 게 없긴요! 제가 안 하면 보나 마나 옷만 몇 벌 챙기실 게 뻔하잖아요. ……그건 절대 안 돼요.”
이거 봐. 목소리도 물기에 가득 젖어서 영 힘이 없었다. 평소 목소리에도 힘이 넘쳤던 시에나답지 않게 음성이 자꾸만 떨렸다.
“……그럼 딱 열 벌만 챙겨 줘. 정말 그거면 충분해.”
한쪽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릭 역시 한마디를 덧붙였다.
“짐은 차후에 따로 보내 드리면 되니 아가씨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도록 해.”
“……알겠어요.”
시에나가 잔뜩 풀이 죽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마 자신과 둘만 있었다면 조금 더 투정을 부렸을 텐데. 에릭의 눈치가 보이는지 시에나는 조용히 훌쩍거리기만 했다.
사실, 그녀도 에릭이 왜 여기서 저리 지켜보고 있는지는 이유를 알지 못했다.
슬쩍 물어보니 짐을 챙기는 걸 도와드리려고 왔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 가만히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벨라는 조용히 시에나의 곁으로 다가가 옷 정리하는 것을 도왔다. 흘긋 옆을 보니 입이 댓 발 튀어나온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벨라가 조용히 웃으니 결국 원망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웃음이 나오세요? ……저는 지금도 아가씨 얼굴 보면 눈물 나올 것 같아서 꾹 참고 있는데…….”
“미안해.”
“미안하다고만 하지 마시고, 저도 데려가란 말이에요…….”
“이곳에 너한테 소중한 사람이 많잖아. 그리고 내가 아예 못 보는 곳으로 가는 것도 아닌걸. 보고 싶을 때 보면 돼.”
“그렇지만…….”
“금방 또 만날 거야. 약속할게.”
“그럼 어디로 가실 건지, 저한테만 살짝 말씀해 주시면 안 돼요?”
벨라는 이미 목적지를 정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수 없는 곳이었다.
“소만으로 가진 않을 거예요.”
“……그럼?”
“그건 제가 천천히 생각해 보고 알아서 정할게요. 이렇게 신경 써 주신 것만으로 충분해요.”
그는 겨우 알았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표정은 아주 탐탁지 않은 듯 보였지만.
“음, 아직 정하진 못했어.”
“생각해 둔 곳은 있으시잖아요. 평소 가 보고 싶었던 곳이라거나…….”
“책으로만 봐서……. 동쪽으로 멀리 가면 색다른 문화를 가진 나라가 있다던데, 그런 곳도 한번 가 보고 싶긴 하고. 그리고 남쪽 대륙으로 넘어가면 이곳과는 계절이 반대래. 루이폴이었나? 베른은 지금이 봄이니까, 거긴 겨울쯤이겠다.”
아예 침묵하는 것보단 뭐든 말을 해 주는 게 낫다 싶어, 벨라는 책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장소를 가볍게 떠올렸다.
“……포르메네라는 곳에 가면 물이 유리처럼 투명한 호수가 있대요. 밤에 보면 하늘의 은하수도 비치고……. 직접 보면 말을 잃을 만큼 환상적이랬어요.”
“응, 거기도 꼭 가 보고 싶다.”
시에나는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자신이 아는 가장 아름다운 곳을 말해 주었다. 그 마음이 고마워서 벨라는 시에나의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러다 옆을 보니 에릭이 작은 노트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일이 많은데 괜히 이곳에서 시간을 빼앗기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에릭 경, 많이 바쁘세요? 할 일이 별로 없어서 도와주실 일도 없는데…….”
벨라가 조심스레 묻자, 그는 펜을 몇 번 더 움직이고는 갈무리해서 품에 집어넣었다.
“아닙니다.”
그사이 또 시에나는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작게 한숨을 내쉰 벨라는 시에나를 끌어안고선 가만히 등을 다독여 주었다.
* * *
그 후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벨라가 성을 떠나는 시간이 다가올수록 초록을 머금은 잎사귀가 진해졌다.
그는 커튼을 모두 닫은 채 창밖으로는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다. 오늘은 벨라가 성을 떠나는 날이었고, 바깥에선 사용인들과의 인사가 한창이었다.
곧 떠날 시간인데. 오히려 초조해진 에릭이 이미 앞서 했던 질문을 반복했다.
“정말 안 나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들을래.”
그는 여전히 펜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후회 안 하시겠습니까?”
“안 해. 그러니까 귀찮게 굴지 말고 나가.”
“……걱정하실 일 없도록 제가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결국, 에릭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는 끝내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입을 떼는 순간, 자신은 또 벨라의 발목을 붙잡고 말 테니.
마차를 망가트려 버릴까. 밖에서 성문을 걸어 잠가 버릴까. 아예 바깥이 보이지 않도록 성벽을 더 높게 올려 버릴까. 지금이라도 당장, 저 손을 붙잡고 가지 말라고 할까.
이 순간에도 머릿속을 가득 메우는 건 그녀를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지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이러니 어떻게 그 얼굴을 마주한 채 잘 가라고 인사할 수 있을까.
저는 더 이상 어떠한 자격도 없었다.
* * *
벨라가 성을 떠났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성의 분위기 역시 평소와 같았다. 조금 더 공허하고, 바람이 차고, 달빛이 어두울 뿐. 달라진 건 없었다.
그는 벨라의 방 앞에 서서 가만히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돌아올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또 한 번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가만히 문을 열고 들어가자 옅게 남은 그녀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마저 새어 나가 버릴까 두려워 얼른 문을 닫았다.
그녀의 침실도 여전했다. 원체 쓰던 물건이 잘 없어, 벨라가 떠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사소한 것 하나까지 그대로였다.
테이블 위에 놓인 꽃도 시들지 않았고, 보던 책도 그대로 협탁 위에 놓여 있었다.
그는 살며시 손을 뻗어 그녀가 몰래 만지작거리던 토끼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이 순간에도 벨라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와 인형을 휙 잡아채 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대하며 기다려 봐도 그저 잔잔한 바람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인형을 이불 안으로 넣어 놓고선 걸음을 돌렸다.
더 이상 그 공간에 있는 것이 버거워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공작님께선 저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옛날의 그 사람을 잊지 못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 사람이 아니에요. 공작님께선 그저…… 제게서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채우시려는 것뿐이라고요.”
그럴 리가. 다시 곱씹어 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그저, 너를 사랑했다.
그래서 오두막에 갈 순 있어도, 네가 살던 성에서는 더 이상 견딜 자신이 없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는 제 침실에 들러 대충 손에 잡히는 대로 포도주 한 병을 들고나왔다. 취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기댈 곳이 없었다. 제 모습이 한심하고 우스워 헛웃음이 삐져나왔다.
고요한 성이 너무도 가혹했다. 푸른 잔디밭에도, 정원의 꽃 한 송이에도, 어디든 눈길이 닿는 곳마다 벨라가 있었다. 그러니 도망쳐야 했다.
그는 버릇처럼 숲과 연결된 문으로 발길을 옮겼다. 숲을 지나 오두막으로 향하는 걸음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늘 그렇듯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히는 손길에도.
“…….”
그는 오두막 안을 들여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낡은 창으로 푸른 달빛이 스몄다.
그리고 그 자리엔, 벨라가 있었다.
그녀를 향한 그리움이 벌써 헛것을 만들어 내는 모양이다.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었다. 오래전 그녀를 잃었을 때도 몇 년간은 제정신이 아니었으니까.
벨라가 옅게 웃었다.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며 손등을 매만지는 사소한 버릇까지도 생생했다.
“조금 늦으셨어요.”
그는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말도 하네.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도 너무 선명하고.”
“제가 벌써 그렇게 그리우셨어요? 그렇게…… 헛것을 볼 만큼요.”
그리운 것보단 후회가 짙었다. 그녀를 위해서 수없이 저를 억눌러 겨우 인내한 것이건만, 그럼에도 제 선택을 미친 듯이 후회했다.
“내가……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
벨라에게 하고 싶은 말인 동시에 벨라에게는 절대 하지 못할 말이었다. 하루에도 수천 번씩 망설였다가 끝내 덮어 두었던 말이었다.
“가지 마. ……가지 마, 벨라. 내가 더 노력할게. 그러니까…… 제발 가지 마.”
그가 벨라의 손목을 확 붙잡았다.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소란스럽게 깨졌다.
그녀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 손길을 뿌리치거나 피하진 않았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점점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손목을 붙잡은 힘이 거세지자, 벨라는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아파요.”
그러자 벨리아르는 황급히 손을 놓았다. 그래도 여전히 손에 남은 온기가 더없이 생생했다.
헛것은 이리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눈앞의 모든 것이 바뀌었다.
“너……. 왜 여기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려워서.”
벨라는 손목을 매만지며 원망하듯 말을 툭 뱉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한 그는 성큼 다가가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내가 그렇게 몹쓸 짓을 저질렀는데, 너는 왜…….”
“그래서 저를 놓아주려 하셨어요?”
“……아니, 그러기 싫었어. 정말 싫었는데, 네가 내 곁에 있으면 괴로워하니까. ……벨라, 가지 마. 그냥 내 곁에서 평생 날 원망하고 미워해. 그러다 분이 안 풀리면 얼마든지 때려도 돼. 그러니까…….”
제발 나를 떠나지 않겠다고 해 줘.
그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한 채 그녀를 안은 팔에 빠듯이 힘을 주었다. 혹여 아플까 봐 그리 거세게 끌어안지는 못하고,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만 힘껏 끌어안았다. 아직도 품에서 놓으면 그녀가 꿈처럼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제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가겠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온 거예요.”
“……벨라.”
그에게 가만히 안겨 있기만 하던 벨라가 이내 팔을 들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작은 손으로 단단한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늘 그가 해 주었던 것처럼.
“……그렇게 이름 부르면, 내가 가겠다고 했으니까. 그 약속 지키는 거예요.”
그제야 그는 벨라를 품에서 살짝 떼어 내며 눈을 마주 봤다.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붉은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름이라면서. 그러니까, 당신이 ‘벨라’ 하고 부르면 내가 갈게.”
그러면서 웃던 모습이 현재와 겹쳐 보였다.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제 이름 짓는 데 별로 고민 안 하셨죠? ……그러니까, 이름이 흔해서 알아보지도 못하지.”
“……정말…… 기억해?”
“거짓말쟁이. ……바보 멍청이.”
그녀가 촉촉이 젖은 목소리로 원망하자 그는 다시금 벨라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머리에 입술을 묻고서 다짐하듯 읊조렸다.
“……절대 안 놔줘. 말 바꾸기 없어. 이제 놔달라고 울고 빌어도 소용없어. ……나는 분명 기회를 줬는데 다시 돌아온 건 너야, 벨라. 그러니까 다시는 떠날 생각하지 마.”
“공작님 말대로, 평생 미워할 거예요. ……그래도 되잖아요. ……당신은 나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였으니까.”
“……너무 늦어서 미안해.”
비로소 제자리를 찾은 느낌이었다. 서로에게 닿기 위한 길이 너무도 험난했다. 그는 앞으로 제게 주어진 속죄하는 삶마저도 기꺼워했다.
벨라는 그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벨리아르.”
그가 나직이 웃었다.
“잘 안 들렸어.”
“들은 거 다 알아요.”
“이름 또 불러 줘.”
“……싫어요.”
“그럼 반말해 줘.”
“그건 안 돼요. ……제가 어떻게 공작님께 말을 낮춰요.”
그녀가 새침하게 고개를 돌려도 그의 눈빛에선 마냥 사랑스럽다는 듯 애정이 넘쳐흘렀다.
동그란 머리에 쪽쪽 소리가 나게 입을 맞추는 것으로도 모자라 이마며 코며, 보드라운 뺨까지 간지러운 키스가 가득 쏟아졌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입맞춤으로 해소될 갈증이 아니었다. 결국 불퉁하게 삐져나온 입술마저 삼키고서야 이슬 한두 방울이 메마른 목구멍을 적시는 듯했다.
이제 온전히 서로를 사랑할 시간이었다.
비록 서투른 사랑일지언정.
<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