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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77)화 (177/180)

177화

벨라는 괜스레 휑한 복도를 한번 살펴보곤 혀로 입술을 축였다. 문 앞에 서서 노크하려 손을 들었다가도 잠시 멈칫거렸다.

오랜만에 그의 집무실 앞에서 망설이고 있으니 예전에 그가 매일같이 저를 부르던 날들이 아득한 옛일처럼 느껴졌다. 조용히 문을 두드렸지만, 그러기까지 매번 문 앞에서 오랜 시간 망설였었다.

짧게 심호흡을 한 벨라는 마침내 문을 두드렸다. 곧바로 들어오라는 말이 들려올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달리 조용했다. 결국, 조심스럽게 목소리를 냈다.

“……저예요, 벨라. 안에 계세요?”

그래도 답이 없는 걸 보니 아마 다른 곳에 있는 모양이다. 또 그 숲에 가신 걸까?

우선 침실에도 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돌아선 순간, 뒤에서 문이 벌컥 열렸다. 돌아본 곳엔 조금, 아주 조금 수척해진 듯한 그가 있었다.

“공작님. 안에 계신 줄 몰랐어요.”

“들어와.”

벨라는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 자연스레 소파에 앉았다. 은은하게 포도주 향이 맴돌았다.

“차 마실래?”

“네.”

마치 집무실에 처음 와 본 것처럼 벨라는 천천히 눈을 굴렸다. 곳곳에 놓인 술병에 시선이 한 번씩 멈추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넌지시 물었다.

“포도주 줄까?”

“……네. 그것도 좋아요.”

대체 그 엄청난 선물은 다 뭐냐고 따지려고 찾아온 건데, 막상 그를 마주하니 이상하게 긴장이 되었다. 이럴 때 포도주는 나름 괜찮은 제안이었다.

그는 가벼이 웃고선 투명한 포도주 잔을 꺼내 들었다.

“다 컸네.”

그는 포도주를 따라 그녀의 앞에 놓아 주곤 맞은편에 앉았다. 벨라는 잔을 들어 살며시 입술을 적셨다.

풍미가 깊어 혀끝에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향과 맛이 오롯이 느껴졌다. 벨라는 손끝으로 잔을 톡톡 건드리며 그가 따라 준 술의 양이 조금 적다고 생각했다.

“보내 주신 선물 받았어요.”

“마음에 들어?”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너무 과하잖아요. 부담스러워서 싫어요. 그 많은 걸 제가 어떻게…….”

“그동안 네게 준 게 별로 없잖아. 그러니까 그냥 받아 줘. 뻔뻔하게 받아 줄수록 내가 더 기분이 좋을 것 같은데.”

“…….”

당장 자신이 입고 있는 옷 하나의 가격도 경악할 만큼 값비싼 것이었다. 그런 옷이 몇 벌인지 세지도 못할 만큼인 데다 온갖 보석이 박힌 장신구에 다른 자잘한 것들까지 합하면…….

차마 가늠도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걸 뻔뻔하게 받으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마음에 안 드는 건 나중에 얼마든지 팔아치워.”

받지 않겠다고 해 봤자 씨알도 안 먹힐 태세였다. 뭐라고 말하든 받기 싫으면 그냥 팔아 버리라고 하겠지.

벨라는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에 빠져 저도 모르게 포도주를 조금씩 입안으로 흘려 넣었다. 어느새 잔이 텅 빈 것도 모른 채 버릇처럼 기울이고 있으니 그가 낮게 웃었다.

“한 잔 더 줄까?”

“……네.”

몸에 적당히 열이 오르기 시작하니 언뜻 나른해졌다. 그는 아까보다 조금 더 많은 양의 포도주를 잔에 채워 주었다.

“……공작님.”

“왜?”

“저는…… 공작님께서 왜 요즘 저를 피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은은하게 오른 술기운 때문인지 사고가 옆으로 새고 말았다. 그래도 상관없지. 이것도 궁금했으니까. 온 김에 겸사겸사 묻는 거다.

“그게 신경 쓰여? 오히려 좋아할 줄 알았는데.”

“아니요. 나쁠 건 없어요. ……아직도 공작님이 편하진 않으니까요. 단지, 갑자기 저를 피하시니까 신경 쓰일 뿐이에요.”

“오늘은 찾아갈까 했어. 어제도 망설였고, 그저께도 망설였지. 아마 네가 찾아오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도 망설이다가 내일로 미뤘을 거야.”

“무엇을 망설이셨는데요?”

그가 무언가를 망설인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사실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는 것도. 그래서 더욱 그 이유가 궁금해졌다.

그답지 않게 섣불리 대답을 내어놓지 못하고 설핏 미간을 좁혔다. 그러다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는 이내 포도주잔을 눈짓하며 허튼 질문을 던졌다.

“맛있어?”

“……네. 차보다 이게 더 마음에 들어요. 달아서.”

다소 맹랑한 대답에 그가 나직이 웃었다.

“술맛을 가르치려던 건 아니었는데.”

“이 술을 선물로 주셨으면 뻔뻔하게 받았을지도 몰라요.”

그 말까진 참아 줄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벨라의 손에서 잔을 빼앗아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멀리 놔두었다.

“……이러니까 내가 미칠 노릇이지.”

“저 괜찮아요.”

양 뺨에 복숭아를 얹은 듯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으로 괜찮다고 말해 봤자 믿어 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어 나른한 숨을 푹 내쉬는 모습에 그는 황당함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안 괜찮아.”

그녀는 허전해진 손끝을 톡톡 부딪치다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녀가 짧게 중얼거렸다.

뭘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모습들이 자꾸만 그의 욕망을 부추겼다. 쓸데없이 시간을 끌어 봤자 그 욕망만 더욱 부풀리는 짓이었다.

“벨라.”

“네.”

“네게 줄 선물이 하나 더 있어.”

그가 테이블 위로 서류를 한 장 올려놓곤 그녀의 앞으로 밀어 주었다. 벨라는 살짝 멍한 눈빛으로 종이 위를 대충 훑고는 물었다.

“……이게 뭔데요?”

“별로야?”

“뭔지 몰라서 별로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공작님께선 이 선물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것 같아요.”

술기운에 몽롱한 와중에도 그런 기색은 잘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나는 네가 이 선물을 거부했으면 좋겠어.”

그가 넌지시 내민 진심에 벨라는 살짝 정신을 차렸다. 최대한 눈을 또렷이 뜬 채 종이의 글자들을 읽어 내려갔다. 위에는 별 내용이 없었고, 아래에 가장 중요한 것이 쓰여 있었다.

“……입국 신고서네요.”

“소만에 안 좋은 기억이 있는 건 알아. 그땐…… 내가 너무 이기적인 생각으로 네게 그런 걸 보여 준 거고, 실제로 전 대륙을 뒤져 봐도 소만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인 건 사실이야.”

사실, 그가 이렇게 말할 때까지도 무슨 의도로 입국 신고서를 선물이라고 주는 건지 깨닫지 못했다. 벨라는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종이 끝을 만지작거렸다.

“물론, 네가 따로 가고 싶은 곳이 있다면 그곳으로 가도 돼. 소만은 그냥 내 제안일 뿐이야. 제국이랑 가까워서 문화 차이도 크지 않고, 중립국이다 보니 다양한 인종이 모이는 곳이고, 너는 더 이상 노예 제도에 휘말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니까…… 저를 소만으로 보내 주시겠다는 말씀이세요?”

“그래.”

“……공작님과 함께 가는 게 아니라요?”

그가 시선을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주먹을 꽉 그러쥐자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졌다. 이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먹먹히 흘러나왔다.

“너를 놓아주겠다는 말이야, 벨라.”

오늘은 왜 이리 이해가 되지 않는 일투성인지.

간절히 바라던 말이었다. 차라리 그가 자신을 놓아준다면, 모든 것을 잊고 새롭게 시작하자고 꿈꾸던 날들이 있었다.

그러니 기뻐야 하는데, 마냥 좋지만은 않은 감정이 휘몰아치며 속을 혼란스럽게 뒤집어 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네 마음이 온전히 아물었을 때, 그때 나에게 다시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시간은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어. ……네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도 내가 용서되지 않더라도, 그래도 기다릴게.”

종이 위의 글자들이 어지럽게 흩어졌다. 벨라는 치마를 한번 꽉 쥐었다가 벌떡 일어섰다.

“……생각해 보고 말씀드릴게요.”

그러고는 도망치듯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미안해. 사랑해. 때로는 그런 말보다 놓아주겠다는 말이 더욱 무겁게 꽂힐 때가 있었다.

놓아주겠다는 말을 아무리 곱씹어 봐도 전해지는 마음이 한결같았다. 그러니 그가 자신을 버리려 한다고 탓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애석하게도 그는 저를 버리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채고 말았다. 옛날 같았으면 버림받는다는 사실에 순수하게 아파하기만 했을 일인데.

집무실에서 나와 발길 닿는 대로 멍하니 걷기만 했다. 그러다 어느새 닿은 곳은 성역의 숲과 통하는 문이었다. 살며시 손을 대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정말 바로 숲이 보였고, 누군가의 발걸음이 쌓여 오솔길이 나 있었다. 벨라는 가만히 그 길을 바라보다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길을 따라 계속 걷다 보니 저 멀리 익숙한 오두막이 보였다. 두렵기만 할 줄 알았던 장소였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오두막으로 향하는 걸음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오후의 햇살이 스미는 오두막은 기억하던 모습과 살짝 달랐다. 그와의 첫 만남이 떠올라 두려워야 함이 마땅한 그 오두막은, 이상하게 따스하고 애틋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마음이 몽글거리고,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게 다 그의 이상한 선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벨라는 오두막 앞 낡은 벤치에 앉아 손바닥으로 가만히 나뭇결을 쓸어 보았다.

“너를 놓아주겠다는 말이야, 벨라.”

……분명 기뻐해야 하는 말인데. 아무리 제 속을 들여다봐도 기쁜 마음은 꼭꼭 숨어 보이질 않았다. 그 사실에 또 마음이 복잡하게 엉키고 말았다.

그와의 첫 만남을 떠올리려 했지만, 제 무의식은 더욱 먼 기억을 헤집었다. 오랜 시간 깊숙이 파묻혀 있던 그 기억은 세월이 무색하게도 여전히 찬란한 빛깔로 아른거렸다.

“벨리아르, 만약에 말이야. 우리가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나 만나게 된다면……. 우린 또 서로를 알아볼까?”

“너는 잊어. 내가 기억할 테니까.”

“치, 그걸 어떻게 장담해?”

“내가 너를 못 알아볼 리 없으니까.”

“얼굴도, 성격도. 모든 것이 달라져 있을 텐데?”

“그래도 어떻게든 찾아낼 거야. 내 건데 잃어버리면 안 되지.”

오랜 기억을 떠올릴수록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랬으면서. 어떤 모습으로 와도 알아볼 수 있다고 그리 자신 있게 말했으면서.

그러면서 이젠 저를 놓아주겠다고 말하는 그가 한없이 미웠다. 한없이 밉고, 원망스럽고, 그리고…… 당장 달려가 안기고 싶었다.

“그럼 있잖아, 당신이 준 이름만은 버리지 않을게.”

“그게 네 마음대로 되겠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이름이라면서. 그러니까, 당신이 ‘벨라’ 하고 부르면 내가 갈게.”

“그럼 나는 이곳에서 너를 기다릴게.”

“벨리아르. 이렇게 당신을 부를 때까지 기다려 줘야 해.”

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잊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그는 제게 너무나도 가혹했다.

그리고, 저 역시 그를 잊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잊을 수도 있으니까.”

우리는 온전하지 않기에 끊임없이 서로를 갈망하고 망가트렸다.

* * *

복도에서 들려오는 차분하고 묵직한 발소리가 천천히 가까워졌다. 벨라는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리곤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리자 저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또 한참을 바깥에 있다 온 건지, 그가 다가오니 옷자락에 매달려 있던 선선한 바람이 제 머리칼을 간질였다. 벨라는 그가 침대에 걸터앉는 틈을 타 꽉 쥐고 있던 이불을 놓았다.

그는 한참을 말없이 앉아 그녀를 지켜보았다. 허전한 손끝을 매만지기도 하고, 작은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입술을 뗐다가 다시 꾹 다물길 반복했다.

이불을 푹 덮어쓰고 있어도 그 사소한 행동들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벨라는 입술을 꾹 말아 문 채 질끈 눈을 감았다.

그는 결국 베개 위로 흩어진 그녀의 머리칼만 살며시 쓰다듬으며 공허한 인사를 전했다.

“잘 자.”

그가 침묵한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말이 혀끝에 감겼다가 바스러지길 반복했을까. 그래 놓고선 꺼낸 말이 고작 저런 싱거운 인사뿐이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심장 한쪽이 욱신거렸다.

끝내 저를 붙잡지 못하는 그가, 원망보다 그리움이 더 커져 버린 자신이, 악착같이 서로를 망가트린 우리가. 그저 안쓰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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