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제법 평화로운 나날이 이어졌다.
가끔 시간이 날 때면 시에나와 디저트를 먹으며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었고, 그 외엔 차를 마시며 책을 읽거나 리라와 놀았다.
이렇게 평온해도 되나 싶은 날들이었다. 또한 그가 찾아와 괴롭히는 일도 없었다.
그녀는 곧 이유 모를 찝찝함의 원인을 깨달았다. 그래,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 라포드에서 돌아온 후로 그가 제 방에 불쑥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것.
커튼을 걷자 따사로운 햇살이 눈부실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었다. 다른 곳은 여름맞이 준비로 한창일 텐데, 베른만 뒤늦게 봄 티를 내고 있었다.
벨라는 손으로 해를 가리곤 창문 너머의 정원을 쭉 훑어보았다. 수도 저택의 하녀 열댓 명이 옮겨 왔다곤 하지만, 여전히 성의 분위기는 활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봄바람만 사뿐히 나부끼는 너른 정원에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그 정체는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이 성의 주인인 벨리아르 공작, 그였다.
그가 가는 길을 따라 자연스레 시선이 옮겨 갔다. 사실, 이렇게 그를 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어제도, 며칠 전에도.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면 그가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벨라는 기다란 숨을 내쉬며 그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매번 어딜 가시는 거지.”
성문 쪽은 아니고. 거의 집무실에 있거나 성 밖으로 나가는 것만 보았기에 딱히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평소라면 별로 관심 없었을 테지만, 묘하게 그가 저를 피한다는 느낌이 드니 신경이 쓰였다.
결국, 벨라는 방을 나서 바깥으로 나갔다. 정확히 무엇을 하려고 나온 건 아니었기에 잠시 머뭇거리다 그가 사라진 방향으로 걸음을 뗐다.
대충 방향을 잡고 가다 보니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깨달았다. 성역의 숲으로 향하는 문. 거북한 발걸음이 멋대로 움직였다.
아마 중간에 리라를 마주치지 않았다면 어디까지 갔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리라, 여기서 놀고 있었구나.”
며칠 전 에릭의 말대로 리라를 성내에 풀어 두고 키우고 싶다고 했더니 그는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덕분에 리라는 요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성내의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뭘 그리 잘 얻어먹고 다니는지 처음 봤을 때보다 조금 통통해졌다.
쪼그려 앉아 손을 내미니 쪼르르 다가와 몸을 비비는 모습이 한두 번 애교 부려 본 솜씨가 아니었다.
“혹시, 공작님 봤니?”
그동안 관찰한 결과, 리라는 그를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무서워하는 것 같았다.
누구든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리라는 유독 그만 나타나면 슬금슬금 도망가기 일쑤였다. 그러니 지금도 그를 마주쳐서 이리 구석에 숨어 있던 건 아닐까.
그러다 문득 지난날 에릭의 말이 떠올랐다. 벨라는 반신반의인 마음으로 토끼 앞에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손.”
그러자 리라는 뒷다리로 껑충 일어서더니 짧은 앞발을 그녀의 손위로 턱 얹어 주었다.
벨라는 순간 그의 존재를 까마득히 잊고서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혹시 우연은 아닐까 싶어 다시 한번 시도해 보니, 리라는 영특하게도 또 앞발을 주었다.
“너 진짜 똑똑하구나.”
그렇게 애교 넘치는 리라에게 붙잡혀 한참을 풀을 흔들며 놀아 주었다.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갑작스레 끼어든 에릭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리라에게 굳이 다른 친구가 필요 없겠습니다.”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에릭이 벽에 기대선 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낌새를 보아, 방금 나타난 건 아닌 듯싶었다.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아가씨께서 풀을 입에 넣어 볼까 말까 고민하실 때부터요. 배가 고프시면 가서 식사를 하시죠.”
아, 그럼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건데. 하도 리라에게 정신이 팔려 뒤에 누가 있는지도 눈치채지 못했다.
“……배가 고파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리라가 풀을 하도 맛있게 먹길래 무슨 맛인가 궁금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제가 아니라 주인님께서 보셨으면 꽤 재밌었을 텐데요.”
“공작님께선 요즘 많이 바쁘신가요?”
“아니요. 딱히 평소보다 바쁘진 않으시지만……. 다른 곳에서 유독 시간을 많이 보내시긴 합니다.”
에릭은 그가 사라진 방향을 흘긋 보며 짧은 한숨을 흘렸다. 에릭은 며칠 전부터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는 것이 일상이 되어 버렸다.
리라는 에릭을 잘 따랐고, 리라가 이곳에 있던 것도 우연은 아니었다.
“라포드에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안 좋은 일은 없었어요. 제 생각에는요.”
벨라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여행은 아니었다. 세상에 그렇게 예쁜 바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평범한 삶이 어떤 건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어 기뻤다. 기회가 된다면 또 그런 여행을 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럼 좋은 일은 있으셨다는 말씀으로 들리네요.”
“……리라한테 손 주는 법은 에릭 경께서 가르치신 거죠? 동물 안 좋아하신다더니…….”
좋은 일이라. 이번 여행으로 그와 조금 가까워진 것을 좋은 일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해서 말을 돌렸더니 에릭이 나직이 헛웃음을 내비쳤다.
“아가씨께서도 주인님을 닮아 가시네요.”
“아니에요.”
“맞습니다.”
뒤로도 둘은 한참이나 맞다, 아니다로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다 에릭이 급격히 현실을 깨닫는 바람에 그 유치한 말싸움은 끝을 맺었다.
* * *
“찾으셨습니까?”
에릭이 들어오자 그는 여느 때처럼 곧장 본론부터 꺼냈다.
“풍경 좋고, 사람들 괜찮고, 다른 나라와 분쟁 없고, 이것저것 하기 자유로운 나라들 좀 알아봐.”
조건이 예사롭지 않았으나 에릭은 착실히 그의 말을 주워 담아 기억에 새겼다. 짧은 시간에도 에릭의 머릿속엔 후보지들이 여럿 떠올랐다.
“아가씨와 여행 가실 곳을 알아보시려는 겁니까?”
“아니. 여행이라기보단…… 그냥, 좀 쉴 곳이 필요해.”
“……어디 편찮으십니까?”
질문을 한 에릭도 질문을 받은 벨리아르도 어색하긴 매한가지였다. 그는 난생처음 받아 보는 질문에 픽 웃고 말았다.
“글쎄.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에릭의 표정이 단박에 굳어졌다.
“의사를 부르겠습니다.”
당장이라도 집무실을 뛰쳐나가려는 기세에 그는 얼른 입을 떼야 했다. 그제야 그의 시선이 에릭에게로 옮겨 갔다.
“농담도 못 하지. 네가 늙어 죽을 때도 나는 지금처럼 아주 건강할 테니 걱정하지 마.”
“……별로 기분이 좋아지는 말씀은 아니네요.”
“왜. 안 늙으니까 부러워?”
“주인님께선 소중한 사람의 마지막을 수없이 지켜보셨을 것 아닙니까. 저도 언젠가 주인님께 그런 모습을 보여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불편해져서 그럽니다.”
“꿈이 크네. 여태까지 죽음으로 나를 슬프게 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는데. 두 번째는 네가 될 거라고 확신하나?”
“그 말씀은 기분이 좋네요.”
적어도 자신이 주인을 슬프게 만들 일은 없을 테니. 에릭은 차라리 그가 저를 소모품으로 여겨 마음껏 쓰다 버리길 원했다.
그는 제게 새로운 삶을 주었고, 저는 이후로 그에게 제 모든 것을 바쳐 은혜를 갚기로 맹세했다.
그런 에릭을 보며 그가 황당하다는 듯 웃었다.
“취향이 독특하네.”
“지시하신 곳 찾아보겠습니다. 다른 조건은 더 없으십니까?”
범죄율이 낮고, 주민들이 편견 없어야 하고, 외국인에게도 호의적이어야 하고, 언어가 너무 복잡해선 안 되고, 날씨가 쾌적해야 하고, 등등.
웬만한 것들은 모두 암기하는 에릭이 결국 펜을 꺼내 들어야 할 정도로 조건은 구체적이고 까다로웠다.
이후, 단순히 지역뿐만이 아니라 실력이 출중한 여기사를 알아보라는 지시도 함께였다.
그는 내내 담담한 태도였지만, 에릭은 어쩐지 그런 모습이 더욱 신경 쓰였다.
* * *
평화로운 일상이 이어진다 싶더니, 그 잔잔함엔 금세 금이 가고 말았다.
벨라는 열린 문을 통해 끊임없이 들어오는 상자들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이게 다 뭐야?”
대체 복도에도 얼마나 쌓여 있는 건지. 대여섯 명의 사용인으로도 모자라 시에나까지 끙끙대며 상자를 들어 나르는 중이었다.
“공작님께서 아가씨께 드리는 선물이래요!”
“……갑자기 무슨 선물을 이렇게…….”
놀라는 와중에도 그가 보낸 것들은 하염없이 밀려들어 와 넓디넓은 방 안을 점점 좁혀 갔다.
다 들여놓고 나니 방이 조금 어두워 보일 정도로 거대한 선물 산이 쌓였다. 시에나가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 내며 숨을 골랐다.
“정말, 공작님께선 언제나 상상을 초월하시네요. 이게 다 얼마야…….”
상자의 크기는 다양했고, 그 안에 든 물건 역시 다채로웠다. 그중에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건 옷과 장신구였다.
“아, 참. 여기 드레스도 엄청 많이 보내셨어요. 원피스도 있고, 코트도 있고……. 이 정도면 그냥 하루에 한 벌씩 입고 버리라는 뜻일까요……?”
마담 폴린은 지금쯤 몸져누웠을 거예요.
모조리 마담 폴린이 손수 제작한 옷임을 확인한 시에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덧붙였다.
다른 귀족가의 여성들이 지금 그녀의 방을 봤다면 누구든 다른 의미로 놀라 쓰러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판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얼떨떨한 얼굴로 눈만 깜빡였다. 너무 엄청난 것을 마주하면 오히려 현실성이 없어지는 법이다.
“……혹시, 공작님께서 지금 집무실에 계시니?”
“음, 아마도요. 제가 가서 확인하고 올까요?”
“아니야, 괜찮아. 내가 가 볼게.”
이번엔 또 무슨 수작으로 저를 괴롭히려는 건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