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벨리아르는 어느새 곤히 잠든 벨라를 보며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제 품에서 색색 숨을 내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음껏 괴롭히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새벽 내내 울려 놓고 오후 늦게 퉁퉁 부은 눈으로 일어나 제게 안겼으면 했다.
하지만 그녀에게 더는 미움 받고 싶지 않으니 품에 안고 손만 만지작거리는 것으로 겨우 욕망을 달랬다.
턱없이 부족했으나 자신이 그동안 벨라에게 저지른 짓을 생각하면 한없이 겸손해졌다. 다 자신이 못난 탓이다.
동그란 머리에 입술을 묻고서 지그시 눈을 감으니 낮에 저를 부르던 목소리가 떠올라 귓가를 맴돌았다.
“……벨리아르…….”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래전,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며 웃던 그 날처럼.
절대 어떠한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그녀를 안은 팔에 살며시 힘을 주며 속으로 읊조렸다.
벨라, 네가 또 내 이름을 불러 줬으면 좋겠어.
그녀가 새로이 덧씌워 준 기억이 더없이 소중했다. 더욱 욕심이 나고, 무엇도 포기하고 싶지 않을 만큼.
따뜻한 온기가 조금도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가두고 싶은 마음에 그는 점점 빠듯하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으…….”
그러다 품 안에서 짤막한 신음이 흐르자 그는 얼른 팔을 느슨하게 풀고선 벨라의 상태를 살폈다. 평온하던 얼굴이 어느새 사뭇 찡그려져 있었다.
“벨라.”
조용히 불러도 더욱 고개를 숙이며 몸을 웅크릴 뿐 잠에서 깨어나진 않았다. 그저 조금 세게 끌어안아서 그런 걸까 싶었지만, 품에서 떼어 낸 뒤에도 그녀는 힘겨운 숨을 내쉬었다.
왠지 괴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흔들어 깨우려 손을 뻗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과 함께 애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살려…… 주세요…….”
거대한 망치로 심장을 내리치면 이런 느낌일까.
여태껏 벨라가 잠든 모습을 수없이 보았고, 그동안 악몽에 시달리는 모습도 숱하게 보았다. 그 악몽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는 후회하지 않았다.
그렇게나마 깊숙이 자리 잡은 공포가 제게서 떠나지 못하도록 벨라를 단단히 휘감고 있었을 테니. 그러니 그녀가 꿈결에 저를 부르는 목소리마저 기꺼워했다.
“……제발……. 흑, 살려…….”
그런데 지금은 물기 어린 애원의 목소리가 왜 이리 아프고 괴로운지 모르겠다.
그는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을 애써 외면해 왔다. 그 기꺼움 아래에 이런 두려움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음을. 자신의 이 나약한 감정을 마주하는 순간, 저는 벨라를 더 이상 묶어 두지 못한다는 것을.
어쩌면, 조금은 희망이 생겼다고 믿었을지도 모르겠다. 제게 서서히 거리를 내어 주는 벨라를 보며 어쩌면…… 다시 그 여린 마음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혹여 단순한 악몽을 꾸는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이 스쳤지만, 곧이어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무참히 짓밟히고 말았다.
“흐으……. 공, 작님…….”
그녀가 꿈결에 내뱉은 한마디로 모든 것이 와장창 무너져 내렸다. 벨라는 이후로도 하염없이 제게 살려 달라 빌었다. 씻을 수 없는 원죄가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려 그를 내리눌렀다.
왜. 너는 왜 이럴 때만 그 입으로 나를 찾을까. 나는 여전히 네 꿈속에서 너를 죽이려 할까. 지금도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헤맬 만큼, 내가 만든 지옥이 그토록 견고했구나.
그는 곧, 자신이 벨라에게 새긴 상처는 이런 가벼운 노력들로 치유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제 성질을 죽이고 다정하게 구는 것으로 그녀의 마음을 조금은 얻을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저는 충분히 그녀에게 이기적이었다.
그는 조심스레 상체를 일으키고선 그녀의 어깨를 살살 쓰다듬었다.
“벨라.”
그제야 밭은 숨소리가 차츰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며 긴 속눈썹이 움찔거렸다. 스르륵 눈꺼풀이 올라가자 물기가 촉촉이 스며든 보랏빛 눈동자가 반쯤 드러나 일렁였다.
“미안해. 더 자.”
눈을 감겨 주곤 등을 도닥이니 그녀는 금방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편안한 얼굴로 숨이 안정되는 것까지 확인한 후에야 그는 최대한 조용히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찬기가 스미지 않도록 그녀의 목 끝까지 이불을 꼼꼼히 덮어 주곤 방을 빠져나갔다.
그에겐 더없이 괴로운 밤이었다.
* * *
성은 이 주 만에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기 위해 분주했다. 따로 준비할 건 없었지만, 그가 이리 오래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오는 날엔 이유 없이 성 전체가 긴장에 얼어붙곤 했다.
마차가 들어오자 에릭이 둘을 맞을 준비를 했다. 그가 먼저 마차에서 내리고, 벨라가 내릴 차례가 되었을 때 에릭은 답이 나오지 않는 고민을 시작했다.
벨라는 그와의 작은 스킨십조차 거부하고, 그렇다고 자신이 잡아 주자니 주인의 질투를 고스란히 받아 내야 한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오늘의 고민은 아주 짧은 사이에 해결되었다. 벨리아르가 손을 내밀자 벨라는 잠시 머뭇거리긴 했지만, 결국 그의 손을 잡고서 마차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녀가 깨어난 뒤로 손 한번 못 잡아 봤다며 괴로워하던 그를 생각하면……. 이번 여행으로 둘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듯 보였다. 에릭은 조용히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후 집무실로 올라와 그와 둘만 있을 때가 되어서야 에릭은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에릭의 인사에도 그는 답하지 않은 채 책상으로 다가갔다.
분명 마차에서 내릴 때 둘의 사이는 전과 조금 달라 보였다. 물론, 좋은 쪽으로 말이다.
그런데 지금 그는 왜 이리 냉기를 풀풀 휘날리고 있는 건지. 더 이상 이해하기를 포기한 에릭은 눈치껏 여행에 관한 이야기는 덮어 놓는 것을 택했다.
“성을 비우신 동안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주인님 앞으로 온 서신들은 한쪽에 모아 두었으니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토끼도 무탈합니다.”
“그래. 수고했어.”
토끼로 넌지시 대화거리를 던져 보았으나 그마저도 튕겨 나왔다. 아무리 봐도 기분이 썩 좋아 보이는 상태는 아니었다.
여전히 책상 위 서류로 눈길을 고정한 그는 크라바트를 느슨히 풀어내며 말을 던졌다.
“왜. 더 할 말 있어?”
“괜찮으십니까?”
그 물음에 벨리아르는 바람 빠지듯 픽 웃었다. 벨라가 만족스러워한 여행이었으니 괜찮기는커녕 기분이 좋아야 마땅한데, 애석하게도 괜찮지 못했다.
그렇다고 에릭에게 하소연을 늘어놓을 만큼 가벼운 고민도 아니었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삼키며 손에 든 서류를 툭 내려놓았다.
“그렇게 바다를 좋아하는 줄 알았으면 진작 데려갔을 텐데. 조금 후회가 돼서 그렇지, 나쁘진 않아. 좋아.”
그런 얼굴로 좋다고 말해 봤자. 에릭이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사이, 그가 여전히 시선을 주지 않은 채 지시했다.
“주방장에게 앞으로 벨라의 디저트는 케이크나 쿠키 같은 거 위주로 준비하라고 해. 단것 좋아하더라.”
“예, 말씀하신 대로 지시하겠습니다.”
에릭은 집무실을 빠져나와 곧장 주방장에게 향하면서도 끝내 둘 사이의 의문을 풀지 못했다.
* * *
요즘 벨라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건 하얗고 매력적인 눈 색을 가진 토끼, 리라였다.
벨라는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손수 만든 목걸이를 들고 화원으로 달려왔다.
“리라, 이리 와 볼래? 선물을 가져왔어.”
부름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건지 토끼는 단박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원체 사람의 손길에 친숙했던 토끼는 그녀가 목걸이를 걸어 주는 동안에도 열심히 입만 오물거릴 뿐 얌전했다.
벨라는 리라의 이름이 각인된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며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단순히 목걸이 줄을 만드는 데에도 꽤 애를 먹었다.
그러던 중,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 화원에 출입할 수 있는 사람은 저를 제외하면 둘뿐이었다. 공작님이거나 에릭 경이거나. 문 닫히는 소리가 제법 부드러운 걸로 보아 에릭 경이다.
짧은 추리를 마치고 뒤를 돌아본 곳엔 예상대로 에릭이 있었다. 리라에게 손수 만든 목걸이도 걸어 주고, 간단한 문제도 맞히고. 아침부터 기분이 좋은 벨라는 싱긋 웃으며 인사를 전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예.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에릭은 자연스럽게 다가와 무언가 달라진 토끼를 관찰했다. 수제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목걸이를 본 에릭의 입가가 희미하게 씰룩였다.
“목걸이는 직접 만드신 건가 봅니다.”
“어떻게 아셨어요?”
“그냥, 뭐……. 아가씨 취향인 것 같아서요.”
줄이 분홍색이라. 에릭은 목걸이를 손짓하며 그럴듯한 이유를 덧붙였다. 다행히 다른 의미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벨라는 그저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잘 어울리죠?”
“예, 귀엽……. 잘 어울리네요.”
무심코 본심을 말하려던 에릭은 재빨리 표정을 딱딱하게 갈무리했다. 그 찰나의 변화를 보고 만 벨라가 몰래 웃음을 삼켰다. 괜스레 한번 헛기침한 에릭은 아무렇지 않은 척 대화를 이어 갔다.
“토끼는 활동량이 많아 넓은 공간에서 키우는 게 좋다고 합니다. 친구도 있으면 더 좋고요.”
“그럼 제가 공작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토끼를 더 데려오는 건 힘들지 몰라도…… 성내에 풀어놓고 키우는 건 허락해 주실 거예요.”
“예. 아가씨께서 직접 말씀드리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저, 그런데요. 혹시 토끼 키우는 법에 관해서 찾아보신 거예요?”
순수한 물음이었으나 에릭은 잠시 침묵했다. 사실을 그대로 말하기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둘이 성을 비운 이 주 동안 자신과 리라는 제법 친해졌음을, 없는 시간을 쪼개어 리라와 놀아 주고 틈만 나면 토끼와 관련된 책을 읽었음을.
“……이 정도는 상식입니다.”
자초지종을 모르는 벨라는 대체 에릭이 생각하는 상식의 범위는 어디까지일까 궁금했다.
“그…… 토끼한테 손을 달라고 한번 해 보십시오.”
“토끼가 어떻게 손을 줘요?”
“리라는 똑똑하니까 줄 수도 있잖습니까.”
그 많은 꽃과 풀 중에 비싼 것만 골라 뜯어 먹는 걸 보면 똑똑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그래도 사람 말을 알아듣고 저 짤막한 손을 준다는 건 영 미심쩍었다.
“혹시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저 동물 별로 안 좋아합니다.”
그 말도 별로 신빙성은 없어 보였다.
“……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애매하게 답하자 에릭은 무언가 더 설명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