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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74)화 (174/180)

174화

거의 대답과 동시에 문이 열렸다. 벨라는 그의 앞으로 다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저 목욕도 마쳤고 배도 안 고파요. 그리고 이제 곧 잘 거예요.”

그 말에 벨리아르는 원래 준비했던 ‘야식 먹을래?’라는 무기를 말끔히 포기했다. 이어 다른 핑곗거리를 찾듯 그녀를 빤히 훑어내렸다.

조금 전 목욕을 마친 벨라에게선 따끈하고 싱그러운 향내가 풍겼다. 머리칼 끝에 고인 물방울들이 톡톡 흘러내려 가슴께를 야금야금 적시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 물방울들을 하나하나 짓이기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문득, 천상에 벨라가 있었다면 자신은 만물이 우러러보는 자애로운 신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동시에, 가장 쾌락적이었을 것이다.

“머리 말려 줄게. 그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저도 손 있어요.”

“번거로우니까 내 손 써.”

벨라는 잠시 말을 잃은 채 그를 빤히 바라봤다. 내내 그녀를 담고 있던 붉은 눈동자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일거리를 좀 가져오지 그러셨어요.”

“나한테 너보다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그래서 네가 자는 동안 나도 자려고 했는데, 잠이 안 와.”

그가 말을 할 때마다 황당함의 연속이라 벨라는 작게 헛숨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살면서 상상이나 해 봤을까. 제국의 황제보다 더한 권력을 가진 그가 제 앞에서 잠투정을 부릴 거라고.

“원래 잘 안 주무시잖아요.”

“오늘은 잠들고 싶을 수도 있지.”

“차 내려 드릴까요?”

“아니.”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가 단호히 거절했다.

“네가 내리는 차는 형편없는데.”

벨라는 문득 그가 했던 말이 떠올라 표정이 살짝 불퉁해졌다.

“……너무 단호하신 거 아니에요?”

“같이 자고 싶어.”

“…….”

충분히 예상했던 의도인데도 막상 들이닥치니 말문이 막혔다. 당황스럽기보단, 조금 어이가 없었다.

“손만 잡고 잘게. 아니, 그냥 안고만 잘게.”

원래는 조건이 점점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의 태도가 너무 뻔뻔하다고 생각되는 한편, 나름 힘겨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을 되짚어 보면 그는 거의 매일같이 자신을 안았다. 저를 창문 없는 방 안에 가두었을 때는 더욱 심했었고. 그러다 근 몇 달간은 손끝 하나 건들지 못하고 있으니 그 성정에 오죽할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얌전히 그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차피 저 아니고서도 얼마든지 대체품은 찾을 수 있으면서.

어쩌면 그가 그동안 참을 수 있던 이유는 다른 곳에서 풀고 왔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가 꼭 저만을 안아야 한다는 법은 없으니까. 오히려 참는 것이 이상했다.

다른 여자를 안는 그를 짧게 상상했을 뿐인데 불쾌한 감정이 격렬하게 치솟았다. 괜스레 그를 한번 흘긋 쏘아보곤 문을 반쯤 닫았다.

“안 돼요.”

“알았어.”

예상외로 그는 한 번의 거절 만에 순순히 물러갔다. 요즘 많이 노력하고 있다곤 해도 이렇게 고분고분해질 사람은 절대 아닌데.

벨라는 그가 방으로 돌아간 후에도 의심의 끈을 놓지 못한 채 문 앞에서 서성거렸다.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조심스레 침대로 돌아갔다.

이불을 들치는 그녀의 손길에 제법 짜증이 묻어났다. 괜히 밤중에 찾아와서 마음만 들쑤시고 가 버리니 잠이 몽땅 달아나 버린 탓이다.

“하아…….”

벨라는 분한 숨을 내쉬며 침대 위로 털썩 앉았다. 무엇이든 방심한 순간에 일이 벌어진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침대에 앉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벌컥 열렸다. 태연하게 나타난 그는 한 손엔 베개, 다른 한 손엔 큰 이불을 가볍게 말아 든 채였다.

설마. 그녀의 머릿속에 불길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언제나 그런 좋지 않은 예감은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는 당당하게 침대 옆 바닥으로 들고 온 이불을 내던졌다. 대충 이불을 펴면서도 그의 표정엔 숨기지 못한 짜증이 묻어났다.

지켜보던 그녀의 눈빛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기어코 베개까지 던져 놓는 걸 보며, 벨라는 겨우 목소리를 꺼냈다.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잠이 안 오는 걸 어쩌겠어. 손잡는 것도 안 되고 안는 것도 안 된다고 하니까 그냥 눈으로만 봐야지.”

“아니, 그…….”

결국, 그는 바닥에 대충 펼친 이불 위로 몸을 뉘었다. 화들짝 놀란 벨라는 침대에서 튕겨 나오듯 내려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를 바닥에 눕혀 놓고 자신은 침대에 앉아 있는 불경한 짓을 저지를 순 없었다.

“공작님!”

여유롭게 손에 머리를 받친 채 옆으로 누운 그는 제 곁에 앉아 있는 그녀를 보며 나른한 미소를 곁들였다.

이어 이불 위를 손으로 툭툭 쳤다. 이리 오라는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바닥을 쳐 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고는 한다는 소리가.

“바닥이 딱딱하네.”

“…….”

진짜 딱 한 대만 때릴 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대체 왜 자꾸 자신을 이리 불경하게 만드는 걸까.

그는 그런 벨라를 보며 나직이 웃었다.

“때리고 싶으면 때려도 돼.”

그 말에 벨라는 저도 모르게 살며시 손을 말아쥐었다. 정말 한 대만 때릴까, 하는 생각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벨라는 손끝에 잡히는 이불을 꽉 그러쥔 채 조용히 그를 노려보았다.

“……대체 뭐가 문제예요?”

사람이 왜 이렇게 꼬였냐, 꼭 이런 식으로 놀려야 직성이 풀리냐. 쏘아붙이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최대한 이성을 붙잡았다.

“이렇게 안 하면 돌아 버리겠는데 어떡하겠어. 다음부턴 이러지 않을 테니까, 오늘 한 번만 봐줘.”

노력하겠다더니, 말투만 부드러워지면 단 줄 아는 모양이다. 당장 나가라고 매몰차게 쫓아내고 싶었지만, 그가 했던 어설픈 노력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벨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오늘 한 번만이에요.”

“키스해도 될까?”

이 뻔뻔한 태도에도 면역이 생기는 모양이다. 벨라는 그의 베개를 빼앗아 가며 맞받아쳤다.

“되겠어요?”

“왜 이렇게 사랑스럽지. 사랑해서 그런가.”

그녀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은 채 그의 베개를 침대 위로 던졌다. 소심한 불만의 표시였다.

성의 침대보다 크기가 훨씬 작은 탓에 둘이 오르니 생각보다 여유가 많지 않았다. 벨라는 두 베개를 제자리에 놔두곤 침대 중간을 손으로 그었다.

“여기 넘어오시면 안 돼요.”

“알았어.”

그가 얼핏 비웃는 것 같았지만 벨라는 그에게서 돌아눕고선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거의 침대 끝에 웅크려있는 모양새라 그가 제 옆을 톡톡 두드렸다.

“그러다 굴러떨어지지 말고 이리 와. 안 건들게.”

차라리 악마의 말을 믿지. 벨라는 조용히 입을 삐죽거리곤 이불을 휙 끌어와 턱 아래까지 꼼꼼히 덮었다.

“……안녕히 주무세요.”

“잘 자, 벨라.”

웃음기 섞인 나직한 목소리를 끝으로 벨라는 눈을 감았다. 그와 실랑이를 벌이다 보니 어느새 머리카락도 거의 다 마른 채였다.

잠이 오지 않으면 어쩌지, 라는 걱정이 무색하게 금세 잠결 속으로 빠져들었다.

순간 꽤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에 스르륵 눈이 떠졌다. 눈앞에 벽이 있는 것처럼 무언가에 가로막혀 있었다.

그녀가 잠시 상황을 파악하려고 눈을 깜빡거리는 사이, 그의 손이 뒤통수를 감싸 지그시 눌렀다. 그의 품에 고개를 파묻히게 되고 나서야 벨라는 자신이 그에게 안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가 몸을 바르작거리자 머리를 쓰다듬던 그의 손이 자연스레 등으로 내려가 도닥였다.

“자.”

“……넘어오지 말라고 했는데.”

비몽사몽 중에 원망을 담아 중얼거리니 그가 끌어안은 팔에 더 힘을 주며 낮게 웃었다.

“난 안 넘어갔어. 네가 넘어왔지.”

그 말에 벨라는 멈칫거렸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잠결에 반대로 돌아누운 것 같기도 하고. 왠지 더 말을 했다간 손해만 볼 것 같아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살며시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무섭진 않아?”

“……네. 괜찮아요.”

“고마워.”

손만 잡고. 아니, 안고만 자겠다던 그는 슬그머니 그녀의 머리에 입술을 묻었다. 다행히 손을 엮고 지분거리는 손길은 얌전히 손에만 머물러 있었다.

지금 이것도 다 그 ‘노력’에 들어가는 걸까.

그에게 침대를 허락했을 땐 어느 정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아무리 선을 넘어오지 말라고 말했다지만, 그는 절대 그 말을 순순히 따라 줄 사람이 아니니까.

조금 있으면 늘 그랬듯 저를 탐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저를 안은 채 가만히 손만 만지작거렸다. 마치 소중히 대하는 것처럼.

그와 맞닿은 배에서 특히 뭉근한 감각과 함께 짙은 열기가 느껴졌다. 겉으론 평온해 보여도 속은 꽤 어지러운 모양이다.

그가 저를 사랑한다고 말했을 땐 원망과 부정이 먼저였다. 그리고 지금은, 묘한 죄책감이 일었다.

“……저는, 공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어요.”

“상관없어. 내가 지금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저는 저일 뿐이에요.”

“알아.”

“그런데도 저를 사랑하세요?”

태연하게 대꾸하는 모습에 이상한 오기가 치밀었다. 부정의 대답이 나오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그의 대답이 바뀌지 않길 바랐다.

“내가 단순히 네가 내 옛사랑과 닮아서 이런다고 생각해?”

“……솔직히는요.”

“그럼 네가 아니라 프리스틴을 사랑했겠지. 더 닮았으니까.”

가정일 뿐임을 알면서도 그 말을 듣자마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내가 지금 사랑하는 건 너야, 벨라. 네가 누구든 상관없어. 그러니까 네가 누군가의 대용품이라는 헛된 생각은 버려. 아직도 나를 믿지 못하겠다면, 믿음이 생길 때까지 끝없이 노력할게.”

대체 무엇이 두려운 걸까. 깊은 밤중의 속삭임은 더욱 벌어진 틈새를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사랑해, 벨라.”

편안히 눈을 감은 순간, 그의 고백이 한겨울 눈송이처럼 스며들었다.

그는 꺼질 듯 말 듯 한 작은 불씨에 불과한 제게 끊임없이 장작을 주고 바람을 불어 주었다. 그러고는 끝내 제 몸을 던져 녹아들었다. 이건 반칙이지.

그는 정말 교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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