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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73)화 (173/180)

173화

밖으로 나오니 높이 뜬 하늘에서 봄볕이 내리쬐었다. 근처에 바다가 있는 건 사실인지 제법 세게 불어온 바람에서 옅은 바다 내음이 묻어났다.

“춥지.”

괜찮다고 대답하려는 순간, 그는 이미 제 겉옷을 벗어 벨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혹여 바람이 들어갈까, 앞섶을 여며 주는 손길이 꼼꼼했다.

그에겐 딱 맞던 옷이 그녀에게선 품이 헐거운 채 아래로 길게 떨어져 내렸다. 그의 온기가 담겨 있어 적당히 따뜻하기도 했다.

벨라는 그의 손에 들린 목도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날씨에 왜 굳이.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자마자 그는 목도리를 그녀의 목에 칭칭 감아 주었다.

지금은 명백한 봄이었고, 특히 남부 지방인 라포드는 곧 여름을 맞이해야 할 만큼 날씨가 따듯한 편이었다.

벨라는 갑자기 훅 느껴지는 더위에 불만스러운 얼굴로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더워요.”

“추운 것보단 더운 게 나아.”

“여긴 베른이 아니잖아요. 너무 더우면 그것도 힘들다고요. 바다까지 조금 걸어야 한다면서요.”

“그럼 이건 풀까?”

“네.”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말없이 목도리를 풀어 주었다. 추워지면 언제든지 말해. 미련이 덕지덕지 붙은 말까지 덧붙이고서야 둘은 바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여기, 일하러 온 거 아니시죠?”

“일은 아니지.”

“그럼 왜 오신 거예요?”

“여기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다라길래.”

“…….”

굳이 제게 바다를 보여 주기 위해 이 먼 곳까지 시간을 내어 찾아왔다는 소리다. 사용인들은 전혀 대동하지 않은 채, 허드렛일까지 손수 해 가며. 그와 단둘이 여행이라도 온 느낌이었다.

“바다 보고 싶어 했잖아.”

“바다는 이미 실컷 봤어요.”

공작님에게서 도망치던 그때요. 굳이 그렇게까지 말하지 않아도 그는 충분히 그 의미를 알아챈 듯했다.

“늦어서 미안해.”

엄밀히 따져 보면 그가 자신을 바다에 데려가지 않았다는 게 이리 사과할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는 순순히 제 잘못임을 인정했다.

“……이상해요.”

“뭐가?”

“그냥…… 지금 다 이상한 것 같아요. 저도, 공작님도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는 아직도 무의식에 빠져 꿈속에서 헤매고 있는 건 아닐까. 그의 마음을 너무 간절히 바랐던 나머지, 제 소망이 이런 망상을 빚어낸 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이상한 게 굳이 나쁜 것만은 아니지. 좋게 생각해 줘. 내가 네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너는 그 모습이 낯설 뿐이야. 밀어내려고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마음속 깊숙이 파묻힌 서러움이 눈을 질끈 감은 채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그가 다정하게 굴수록 과거의 서러움이 웅크려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뜨거웠고, 꽝꽝 언 서러움을 조금씩 녹여 갔다. 서러움은 자신이 녹아 흐르는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그를 원망했다.

“손, 잡아도 돼?”

“……아니요.”

분명 거부했는데도 그는 살며시 손을 뻗었다. 손등을 다 덮은 옷을 걷지 않고 그대로 붙잡아 왔다. 황당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그는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미안, 옷이 너무 크네.”

벨라는 그에게 붙잡힌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러자 제 손을 붙잡은 그의 손에 살며시 힘이 들어갔다.

아프진 않았다. 다만, 그가 전하는 간절함이 이유 없이 버거웠다.

두툼한 겉옷을 뚫고 기어코 그의 온기가 맞닿았을 때, 그녀는 또 한 번 오래된 기억을 떠올려 냈다.

깍지를 끼고 손을 맞잡은 채 숲길을 거닐다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을 함께 올려다보던. 한적하고 고요한 밤이었다.

그는 제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곤 조용히 웃어 보였다.

“사랑해.”

그 말이 얼마나 달았던지, 저 밤하늘의 별을 모두 가져다준대도 바꾸고 싶지 않았다. 저는 곧장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벨리아르, 우리 결혼하자.”

성의 없는 프러포즈였음에도 그는 한 치의 고민 없이 “그래, 뭐든.” 하고 답해 주었다. 다정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낮게 웃던 모습에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저를 바라보고 있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옷 아래로 붙잡은 제 손을 살살 매만졌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파도 소리가 꼭 울창한 숲의 나뭇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 같았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니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거렸다.

사랑해. 그가 그리 말하는 듯했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떼어 멍하니 소리를 흘려보냈다.

“……벨리아르…….”

“…….”

순간 저를 꿰뚫는 붉은 눈동자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벨라는 흠칫 놀라며 그에게 붙잡힌 손을 빼냈다.

“……제가 방금 뭐라고 했어요?”

“왜?”

찰나 흔들렸던 그의 표정 역시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되묻자, 벨라는 방금 지나간 일 또한 제 머릿속에서 벌어진 몽상인 건가 싶었다.

“제가 뭔가 공작님께 말을 한 것 같아서…….”

“글쎄.”

“……죄송해요. 실수였어요.”

“아니, 전혀.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다기엔 그를 부르던 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를 맴돌았다.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것처럼 심장이 불안하게 뛰어 댔다. 벨라는 땅을 보고 걸으며 허전한 손을 맞잡았다.

“벨라, 고개 들고 저기 봐.”

그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멍하니 걷다 보니 어느새 눈앞의 풍경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소담한 마을 사이로 에메랄드빛 바다가 살며시 모습을 드러냈다. 몇 채 되지 않는 작은 집들은 저마다 지붕 색이 달랐다.

그중에서도 드문드문 보이는 바다의 청량한 색감이 황홀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벨라는 순간 홀린 듯 바다를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벨라는 백색 모래사장 앞에서 멈춰선 채 거세면서도 차분히 밀려드는 파도를 바라봤다.

“……발 담가 보고 싶어요.”

“바람 많이 불어서 파도가 셀 텐데.”

“저 앞에만 살짝 가면 괜찮지 않을까요?”

그는 조용히 웃더니 무릎을 굽혀 앉아 손수 그녀의 신발을 벗겨 주었다.

“아, 신발은 저 앞에 가서 제가…….”

그에게 신발을 맡기는 것이 너무 어색하고 민망해서 발을 뒤로 뺐으나 금방 다시 붙잡히고 말았다.

“신발 더러워졌다고 찡찡대지 말고.”

마치 그런 적이 있다는 투였다. 평소라면 당장 그럴 일 없다고 발뺌하겠지만, 지금은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혹여나.

“……그럴지도 몰라요.”

그는 자신의 신발도 나란히 벗어 놓고선 먼저 모래사장으로 발을 디뎠다. 곧이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저를 불렀다.

“이리 와, 벨라.”

그녀는 살며시 눈을 감은 채 한 걸음을 내디뎠다. 오후의 봄볕에 적당히 달궈진 모래가 포근하게 발을 감쌌다.

복잡한 상념은 시원한 파도에 쓸려 보내고선 차가운 바닷물이 선사하는 감각을 즐겼다. 파도가 멀어지면 조심스레 쫓아가 보고, 훅 밀려들면 아이처럼 웃으며 달아났다.

그러다 치마의 끝자락이 젖어 잠시 걱정에 빠져들 땐 그가 괜찮아, 하고 다독였다.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괜찮아졌다.

이런 꿈이라면 영영 갇혀 있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깊고 깜깜했던 심해 위로 오늘의 에메랄드빛 해변이 덧씌워졌다.

* * *

“침실로 쓸 수 있는 방이 하나밖에 없어.”

“…….”

별저로 돌아와 그가 해 준 저녁을 먹고 나니 황당한 수작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여기서 지내는 동안은 어쩔 수 없이─.”

그에겐 기막힌 우연이자 사용인의 짜증스러운 실수였다. 하필 벨라가 손댄 방문이 매끄럽게 열렸다. 그 많은 방 중에 하필, 제대로 잠기지 않은 방 하나가 그녀의 손에 걸린 것이다.

벨라는 침대는 물론이고 욕실까지 완벽히 갖춰져 있는 방을 한번 쓱 둘러보곤 그를 향해 물었다.

“이 방은 뭐예요?”

그의 눈가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녀는 이제 그 표정이 어떨 때 나오는 것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무언가 상당히 마음에 들지 않는데 억지로 참을 때.

그는 능숙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여유로운 말투를 이어 갔다.

“그 방이 마음에 들어? 너무 안쪽이라 무서울 것 같은데.”

“전혀요. 제가 이 방 쓸게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짧은 시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는 그 시간에 벨라가 마음을 바꿔 주길 바랐겠지만, 그녀의 태도는 굳건했다. 결국, 고집을 꺾어야 하는 건 그였다.

“그래. 그렇게 해.”

벨라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안녕히 주무세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곤 단호하게 문을 닫았다. 문에 기대어 선 채 밖으로 귀를 기울이니 그가 잠시 후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짧은 시간에 얼핏 한숨 소리가 섞여 있었다.

하루가 길었다.

날씨가 그리 춥진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고 나니 온몸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방에 들어온 후, 얼마 되지 않아 그가 찾아와 손수 발을 씻겨 주겠다고 실랑이를 벌인 탓에 더욱 피곤함이 쌓인 것 같다.

자신이 의견을 내세우면 그는 더 이상 강요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벨라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아 협탁을 더듬거렸다. 순간 버릇처럼 토끼 인형을 찾다가 성이 아님을 깨닫고선 멋쩍게 손을 거두었다.

그럼 젖은 머리카락이 마를 동안엔 뭐 하지. 이 방엔 책장도 없었다. 살짝 방 밖으로 나가 볼까 하던 순간, 그가 또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고. 짧게 한숨을 내쉰 벨라는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리며 대답했다.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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