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남부, 라포드에 도착하기까지는 나흘 정도가 소요되었다. 이곳에도 그의 별저가 따로 있다고 했고, 당연히 수도나 소만에서처럼 사용인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모든 짐작은 빗나갔다. 우선, 저택의 규모가 수도보다 훨씬 작았다.
이층집에 너른 마당이 있는, 겉으로 보기엔 풍족한 가족이 살 법한 평범한 가정집처럼 보였다.
벨라는 조심스럽게 집 안으로 발을 들였다. 어두운 내부로 발소리가 은은하게 울렸다. 불이 모두 꺼져 있는 것을 보니 정말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그는 가는 곳마다 불을 밝히며 그녀를 이끌었다. 천천히 내부를 둘러보니, 밖에서 본 것보다는 제법 넓었다.
“배고프지? 아까 식사 제대로 못 했잖아.”
“괜찮아요.”
다이닝룸에 들어와서도 곳곳을 살펴보는 데에 정신이 없는 벨라를 향해 그가 테이블의 의자를 빼 주었다.
벨라는 의자에 앉으면서도 그가 서 있는 이런 가정집이 정말 신기하고 낯설다는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잠시 쉬고 있어.”
벨리아르는 그녀를 앉혀 두고 어디론가 향하려다가 다시 돌아왔다.
“샌드위치 좋아해? 아니면 가볍게 샐러드 먹을래? 배를 든든히 해야 하니 샐러드는 안 골랐으면 하는데. 아니, 샐러드 먹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근데 스테이크도 있어.”
원하는 답이 너무 뻔해서 벨라는 조금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꼭 골라야 하는 건가요? 지금은 별로…….”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뭐든 말해. 안 먹겠다는 말만 빼면 다 좋아.”
“그럼 샐러드 먹을래요.”
“…….”
그 많은 선택지 중에 굳이 샐러드를 고르자 그의 눈가가 잠시 움찔거렸다. 그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말간 얼굴로 테이블 위의 촛대를 만지작거리는 벨라를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참, 은근히 고집도 세고. 말도 안 듣고. 이럴 땐 깡다구도 부릴 줄 알고.
그럼에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그 모습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는 끝내 바람 빠지듯 웃으며 그녀가 만지던 촛대를 가까이 놔주었다.
“중증이야.”
“네?”
“그래. 샐러드.”
그는 능청스럽게 메뉴를 다시 확인하며 손끝을 머뭇거렸다.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고 싶은데 제 손길이 닿았을 때 소스라치게 놀라던 모습이 떠올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설마…… 직접 하시겠다는 건 아니죠?”
“심심하면 책 가져다줄까? 방에 들어가면 책 좀 있을 텐데.”
“아뇨, 책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의자를 빼며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그는 단호한 손길로 의자를 다시 밀어 넣었다. 그러고는 의자를 톡톡 두드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입에 걸었다.
“쉬고 계세요, 아가씨.”
벨라는 제자리에 앉아 어디론가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가 남긴 잔상이 너무 낯설고 어색해서 정신을 차리는 데에 조금 시간이 필요했다.
이어 어디선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마 위에서 무언가를 썰고 접시를 꺼내는 것 같은, 주방에서 요리할 때 들릴 법한 소리였다.
벨라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조용히 일어나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가 보았다.
분명 사용인들이 보이지 않았는데. 소리를 죽인 채 주방으로 고개를 내미니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이어 그가 제법 능숙하게 요리하는 모습을 보고선 벨라는 절로 벌어지는 입을 손으로 가렸다.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세상에. 하지만 아무리 봐도 그 공작님께서 손수 요리를 하고 계셨다.
벨라는 놀라움을 금치 못한 채 한참을 그 모습을 지켜보다 다시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봐선 안 될 것을 몰래 훔쳐본 느낌이 든 탓이다.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에도 오만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기분이 너무 묘했다. 방금 훔쳐본 그는 마치…… 일반적인 가정의 평범한 남자 같았다.
가만히 테이블에 앉아 그가 요리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숙녀처럼 얌전하게 있을 수가 없었다. 이어 먹음직스러운 음식 냄새가 코끝으로 스미자 그 몽글거리는 느낌은 더욱 심해졌다.
잠시 후, 그가 테이블 위로 접시를 하나둘 올려놓기 시작했다. 말한 건 단순히 샐러드뿐이었는데 무언가 가짓수가 많았다.
먹음직스럽게 구운 스테이크와 양파와 버섯으로 만든 포타주, 그리고 스테이크 옆에 조그맣게 담긴 아스파라거스 샐러드. 이어 그는 배 콩포트를 그녀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내려놓았다.
“이건 식사 마치고 디저트로 먹어.”
그 와중에 샐러드 위로 얌전히 앉은 사과 토끼 두 마리가 눈길을 잡아끌었다. 포크를 들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으니 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왜. 속이 안 좋아? 아니면 원하던 메뉴가 아니라서 그래? 다른 샐러드 해 줄까.”
“……아니요.”
혹시 요리사가 몰래 숨어 있는 건 아닐까. 문득 든 생각에 부엌 쪽을 흘긋거렸지만 전혀 그런 기색은 없어 보였다. 벨라는 멍하니 포크를 들어 사과 토끼를 콕 건드려 보았다.
“토끼…….”
그녀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는 샐러드를 그녀의 앞으로 놔 주었다.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 * *
어떻게 식사를 마쳤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영부영 음식을 입으로 넣다 보니 어느새 달콤한 콩포트까지 맛보고 있었다. 놀랍게도 그의 음식 솜씨는 상당히 훌륭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벨라는 설거지는 자신이 하겠다고 나섰으나 그에게 가볍게 제지당했다.
할 수 없이 그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그녀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안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기어코 설거지를 마친 그는 태평하게 손의 물기를 닦으며 거실로 나왔다. 벨라는 혹여 그 모습이 익숙해질까 봐 무서웠다.
“벨라, 밖에 나오면 뭐가 제일 하고 싶었어?”
그는 찻잔 두 개를 테이블 위로 올려 두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직 여러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벨라는 혀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천천히 생각해도 돼.”
“공작님.”
그는 찻잔을 입에 대며 말하라는 듯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일, 안 하세요?”
황당한 듯하지만 당연한 물음이었다. 그는 조용히 웃으며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원하는 게 내가 일하는 거라면……. 그런데, 그건 조금 곤란해. 베른에서 일에 관련된 것들은 아무것도 안 가져왔거든.”
“……중요한 일 때문에 오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하고 있어.”
“무슨…….”
“바다 보러 갈래?”
그의 물음을 끝으로 결국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 차 버렸다.
여기 바다가 있다고?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는 이곳, 라포드가 남부 끝에 있다는 것뿐이었다. 생각지 못한 말에 그녀는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벨라, 이리 앉아 봐.”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한쪽에 놓인 스툴을 톡톡 두드렸다. 또 하나의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벨라는 반쯤 포기한 채 그곳에 옮겨 앉았다.
그는 어디론가 가더니 곧 빗과 머리 끈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것을 본 벨라의 입이 벌어졌다.
“머리 땋아 줄게.”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제 머리카락을 사수했다.
“네? 아니, 그건 제가 해도…….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이 거세게 두근거렸다. 요리에 설거지에, 이젠 하다 하다 머리 손질까지. 그가 일부러 저를 괴롭히려고 이러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솟구치는 건 당연했다.
그 혼란스러운 표정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그가 그녀에게 손을 대기 전에 물었다.
“무서워?”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밖에 바람 많이 불어. 머리만 땋아 줄 테니까 잠시만 가만히 있어.”
그의 완강한 태도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벨라는 다시 주춤주춤 스툴에 앉았다.
그가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기 시작하자 그녀의 어깨가 사뭇 굳어졌다. 그가 물었듯이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혼란스럽고 놀라운 마음이 두려움을 앞섰다.
처음엔 조금 어색하던 손길이 빗질을 몇 번 반복하고 나니 점점 능숙해졌다.
그는 베른의 공작이 아니라 이 집에서 쭉 살던 사람 같았다. 아내가 매일 귀찮게 굴어도 군말 없이 다 해 주는 다정한 남편처럼.
그의 손길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워 자꾸만 고개가 숙어졌다. 살짝 열이 오른 귀로 그의 손끝이 스칠 때마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거렸다.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생각한 그는 최대한 제 손길이 그녀에게 닿지 않도록 애썼다.
“거의 다 됐어.”
“……이런 건 어디서 배우셨어요?”
“글쎄. 어쩌다 보니.”
어느 귀족이 어쩌다 보니 여인의 머리칼을 땋는 법을 배우게 될까. 게다가 소렐 부인만큼이나 야무지게 머리칼을 손질하고 있었다.
“혹시…… 숨겨 둔 딸이라도 있으세요?”
생각을 거치지 않은 충동적인 물음이었다.
“뭐?”
그가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제야 질문이 말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벨라는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금 한 말은 그냥, 그냥…… 잊어 주세요.”
그가 머리카락을 땋던 손길을 멈추고 가만히 있자 그녀의 부끄러움은 배가 되었다.
그는 벨라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일부러 뜸을 들였다. 음. 그의 낮은 목소리가 훤히 드러난 목덜미로 닿아 등줄기를 타고 내렸다.
벨라는 입술을 짓씹으며 어깨를 움츠렸다. 금방이라도 그의 손이 바짝 소름이 돋아난 살갗을 쓸어내릴 것 같았다.
“너를 닮으면 사랑스러울 텐데.”
“…….”
그는 조용히 웃으며 땋은 머리칼의 끝을 묶어 갈무리했다.
“다 됐어.”
그러고는 기회를 틈타 그녀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예쁘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이번엔 동그란 머리에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그는 애써 제 욕망을 억눌렀다. 가볍게 입술을 찍고 나면 다른 것이 또 욕심날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