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토끼에만 집중하느라 벨라는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토실토실해서 느릴 것 같았던 토끼는 생각보다 정말 움직임이 빨랐다.
“리라!”
토끼는 벨라에게서 도망가면서도 한 번씩 멈추어 예쁜 꽃만 골라 똑똑 따 먹었다. 그럴 때마다 벨라의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다.
이 상황을 그가 알게 된다면 어떤 사달이 날까. 이 꽃들을 꽤 아끼는 것 같았는데…….
벨라는 결국 바구니를 내려놓고 본격적으로 토끼를 쫓기 시작했다. 이대로 두었다간 파릇파릇하던 화원이 사막처럼 황량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한바탕 벌어진 추격전 끝에 드디어 토끼가 속도를 줄였다. 벨라는 반색하며 얼른 쪼그려 앉아 토끼에게 손을 뻗었다.
“잡았……!”
복슬복슬한 털이 손에 닿았을 무렵, 검은색 구두가 쓱 밀려 들어와 시야 한쪽을 차지했다. 동시에 중심을 잃은 두 무릎이 바닥을 쿵 찧었다. 가쁘게 몰아쉬던 그녀의 숨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잠시 후, 그녀의 손끝에 닿았던 구둣발이 살며시 뒤로 물러났다. 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앞에 손수건을 얹은 손이 내밀어져 있었다.
그녀가 손을 잡지 않고 물끄러미 보기만 하자, 그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다친 곳은.”
“……없어요. 괜찮아요.”
옆으로 돌아간 그의 눈길이 엉망이 된 꽃밭에 닿았다. 벨라는 토끼를 놓아주곤 황급히 꽃망울이 떨어진 줄기들로 손을 뻗었다.
“아, 이건 제가─,”
“됐어. 신경 쓰지 마.”
평소와 다름없이 날카로운 어투였다. 동시에 그는 손수건을 덧댄 손등으로 그녀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그녀가 의아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그는 설핏 미간을 좁히더니 다시 말을 덧붙였다.
“……화원 망가지는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야. 토끼를 여기에서 키워도 된다고 허락한 건 나였으니까.”
벨라는 그가 왜 굳이 같은 말을 반복해 가며 설명을 덧붙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부드러워진 말투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뿐이었다.
그가 몸을 일으키자 벨라 역시 일어서 옷자락을 털었다. 할 일을 마치고 나니 어색한 침묵에 휩싸였다.
벨라는 손끝을 맞잡은 채 사뿐사뿐 돌아다니는 토끼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시선이 따가워 고개를 드는 것이 꺼려졌다.
“열은.”
“다 내렸어요. 지금은…… 좋아요. 아픈 곳도 없고요.”
여전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고 머리가 지끈거리긴 했지만, 굳이 그에게 티를 내고 싶진 않았다. 그가 별다른 말을 얹지 않자 또다시 기류가 어색해졌다.
토끼는 상태가 아주 좋아 보였고, 엉망이 된 꽃밭도 그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으니 더 이상 이곳에 머물 필요는 없었다.
“저, 이제 그만 가 볼게요. 리라 밥 주려고 잠시 들른 거라…….”
벨라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그를 지나쳐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등으로 따라붙는 그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하며 발을 움직였다. 그러나 낮게 들려온 목소리가 단박에 발목을 콱 움켜쥐었다.
“벨라, 잠시만.”
짧게 심호흡하곤 뒤를 돌아보니 그는 비스듬히 시선을 내린 채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벨라는 조용한 걸음으로 다시 그에게 다가갔다.
“네. 하실 말씀 있으세요?”
답지 않게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이마를 매만지던 그는 이내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중요한 일이 있어서 일주일 정도 남부에 다녀와야 해.”
눈을 두어 번 깜빡인 벨라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에 숨은 속뜻이 무엇인지 헷갈렸다. 자리를 비울 테니 그동안 이상한 짓 하지 말라는 건가?
“네, 조심히 다녀오세요.”
결국 말뜻을 알아채지 못한 벨라는 형식적인 인사를 건넸다. 그런 벨라에게 시선을 한번 둔 그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같이 갈래?”
“아.”
그 뜻이었구나. 그제야 그가 이리 머뭇대며 말을 꺼내는 이유를 알아챈 벨라는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흘렸다.
하지만 선뜻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그를 따라 소만에 갔던 날의 기억이 떠올라 머릿속을 꽉 메울 뿐이었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일었다.
“벨라, 같이 가 줬으면 좋겠어.”
그는 또 한 번 서툴게 손을 내밀었다.
* * *
벨리아르는 마차에 기대선 채 팔짱을 끼고서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했다. 벨라의 침실이 있는 건물 방향이었다.
짐을 든 사용인의 모습이라도 보여야 하건만, 푸른 잔디밭 위로 떠다니는 건 한산한 바람뿐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팔뚝 위로 얹어진 손가락의 까딱거림이 점차 빨라졌다.
그 모습을 내내 지켜보던 에릭이 옅은 웃음을 삼키며 넌지시 말을 붙였다.
“긴장되십니까?”
“까불지 마.”
그는 예정된 시간보다 일찍 출발하면 출발했지, 절대 늦는 법이 없었다. 에릭은 품에서 시계를 꺼내 슬쩍 시간을 확인하고 다시 넣어 두었다.
그는 여전히 출발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혼자서는 그 ‘중요한 일’을 해결할 수도 없고 그런들 의미도 없었다. 에릭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출발할 시간이 지났습니다.”
최근, 에릭이 업무로 쌓인 스트레스를 푸는 소소한 방법의 하나였다.
그제야 저 멀리 꽂혀 있던 그의 시선이 에릭에게로 돌아갔다.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지금이라면 그가 당장 칼을 빼 들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다.
에릭은 제 허리춤에 찬 칼을 숨길 겸, 살짝 옆으로 몸을 틀었다. 동시에 정원 쪽을 흘긋 살피더니 다급히 입을 뗐다.
“아가씨가 보고 계십니다.”
그가 기가 찬다는 듯 조소를 내비쳤다.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가기 전에 네 그 못된 버릇이나 고쳐 놓을까.”
“……진짭니다.”
에릭이 조금 억울한 듯 말하자 그는 다시 정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정말 벨라가 자기 몸통만 한 짐가방을 들고서 낑낑대며 오고 있었다.
그는 설핏 인상을 구기더니 곧바로 그녀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멀었던 거리가 순식간에 좁아 들었다.
“이걸 왜 네가 들어.”
그는 그녀에게서 짐가방을 빼앗아 한 손으로 가볍게 들었다. 벨라는 한 걸음 앞서가는 그의 등을 흘끗 보곤 말없이 손목을 매만졌다.
“매일 붙어 다니던 하녀는 얻다 두고.”
안 그래도 벨라가 조금 늦은 이유는 침실에서 시에나와 한참이나 실랑이를 벌였기 때문이었다.
벨라는 간소하게 짐을 챙기려 했으나, 시에나가 하루당 최소한 세 벌의 옷은 있어야 한다며 저런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왔다.
거기선 벨라가 졌고, 짐가방을 들고 마차까지 배웅하겠다는 실랑이에선 시에나가 졌다.
“세라였나? 그 아이 말이야.”
“시에나예요.”
“아, 시에나.”
그는 대충 하녀의 이름을 한번 곱씹고는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으나 말없이 마차에 올라타는 그녀에게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그사이 에릭은 짐가방을 받아 마차 뒤쪽에 마련된 짐칸에 실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에게 슬쩍 깐죽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중요한 일, 잘 마무리하고 오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조금이나마 여유가 돌아온 그는 작위적으로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에릭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너야말로 토끼 밥 잘 챙기고 있어. 아, 정 할 일 없으면 토끼 산책도 좀 시켜 주고. 우리 아가씨 신경 쓸 일 없게. 알아듣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졸지에 에릭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토끼가 굶어 죽지 않도록 돌보는 것이 되었다.
* * *
벨라는 이번 일정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었다. 언제나 그랬으니 딱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물어봤자 대답해 주지 않을 게 뻔하니까.
그녀는 허벅지 위로 두 손을 고이 겹쳐 놓곤 조용히 닫힌 창만 바라봤다. 보이는 것이 없는데도 눈꺼풀이 일정하게 오르락내리락하며 보라색 눈동자를 촉촉하게 품었다.
그는 손을 뻗어 그녀 쪽에서 바깥이 잘 보이도록 창문을 열어 주었다.
사뿐히 흘러들어 온 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살랑거리자 그는 당장 벨라를 품에 안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그는 그것을 애써 참느라 얄팍한 인내심을 모조리 긁어모아야 했고, 그동안 벨라의 머릿속엔 온통 새하얀 토끼뿐이었다. 그 생각을 알 리 없는 그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무슨 생각해?”
“……토끼는 하루에 풀을 얼마나 먹을까 해서요.”
기껏 둘만의 시간을 마련했는데 처음 나오는 화제가 토끼라니. 그는 제 손으로 선물한 작은 짐승이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당근잎이랑 토끼풀이랑, 그리고 민들레도 잔뜩 놔두긴 했는데……. 혹시 모자라진 않겠죠?”
“에릭에게 수시로 돌보라고 했어. 그러니까 토끼 걱정은 그만해.”
“에릭 경께요?”
“걔 은근히 동물 좋아해.”
아마 지금쯤 화원에 가서 착실히 먹이 바구니를 채워 놓고 토끼를 어떻게 산책시킬지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벨리아르는 에릭이 겉으로 티는 내지 않지만, 의외로 귀여운 소동물에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벨라는 살짝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혀 안 그럴 것 같은데…….
여태 벨라가 본 에릭은 벨리아르만큼이나 냉정하고 단호했다. 왠지 지금쯤 토끼에게 엄한 태도로 ‘앉아’를 가르치고 있을 것 같았다.
“중요한 일이라고 하셔서 에릭 경도 함께 가시는 줄 알았어요.”
“중요한 일이니까.”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했다. 그러자 벨라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한번 짓씹었다.
“저는 필요해서 데려가시는 거예요?”
딱히 쓸모가 없을 텐데. 할 줄 아는 것이 별로 없으니 일에 도움이 되지도 않을 거고.
그러다 벨라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이 쓸모가 있든 없든, 어디에 이용할 건지는 그의 뜻에 달렸다는 것을.
벨라는 그의 앞에 있을 때마다 한없이 초라해지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당당하게 굴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아래로 향하는 고개마저도.
그는 몸을 낮춰 팔꿈치를 무릎 위에 받치곤 고개를 떨군 그녀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이어 나긋한 음성이 봄바람에 실려 그녀에게 닿았다.
“너랑 같이 가고 싶었어. 단순히 그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