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별안간 방문이 벌컥 열렸다. 들어온 존재를 확인한 시에나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고개를 숙였다.
벨리아르는 침대에 누워 열 뜬 숨을 내쉬는 벨라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은 채 지시했다.
“나가.”
시에나는 머뭇거리지 않고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벨라는 느릿하게 눈꺼풀을 들어 올려 흐린 눈동자로 그를 좇았다.
새까만 장막이 드리워질 때마다 그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이내 그가 침대에 걸터앉자, 매달려 온 차가운 바람이 살며시 뺨에 닿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점막이 뜨겁게 달군 구슬을 감싸는 듯했다. 더불어 숨을 내쉴 때마다 입술로 뜨거운 열기가 닿으니 자신이 꼭 활활 타오르는 별이 된 것 같았다.
그런 상상을 하는 스스로가 우스워 입술 새로 메마른 웃음이 삐져나왔다.
“뭘 잘했다고 웃어.”
그는 낮은 목소리로 타박하며 젖은 수건을 집어 들어 그녀의 이마에 올려 두었다. 갑자기 차가운 것이 닿은 탓에 벨라의 눈가가 살짝 움찔거렸다.
순간 이마가 차가워지니 흐릿하던 시야가 조금은 뚜렷해졌다. 덕분에 벨라는 그가 어떤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제법 화가 났는데, 그 화를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의 이마 위에 놓인 수건을 반대로 뒤집었다. 열이 심하게 오른 탓에 찬물에 적신 천이 금방 미지근해졌다.
“이번엔 네가 잘못했어, 벨라. 혼날 만하지.”
그가 수건 위로 손을 얹었다. 힘을 싣지 않아서 버겁지는 않았지만, 벨라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화가 나 굳었던 표정과 달리 나긋한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무리 날씨가 따뜻해졌더라도 여긴 베른이야. 설령 따뜻한 곳이더라도 그렇게 오랜 시간 비를 맞으면 몸이 상할 수밖에 없고.”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서 웅웅 울렸다. 벨라는 더운 숨을 뱉으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곧장 단호한 음성이 따라붙었다.
“듣기 싫어도 들어.”
매번 느끼는 거지만, 이렇게 열이 심하게 나고 아프면 사고가 조금 이상해지는 것 같다. 감정적으로 되고, 묘하게 충동적이다. 작은 서러움에도 큰 해일이 일었다.
자신이 왜 그곳에서 비를 맞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울며 힘들어했는데. 왜 그런지는 하나도 모르면서, 제 잘못만 탓하는 그가 너무 미웠다. 그 외에도 서러워질 이유는 차고 넘쳤다.
“우산을 챙겨 갔는데도 그 꼴로 왔으면 일부러 비를 맞았다는 건데, 그 의미를 내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네가 뭘 하고 다니든 아예 간섭하지 마? 그 뜻이야?”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듯하자 벨라는 아랫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아무리 고개를 돌렸다고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그의 눈길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 없었다.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살펴보던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굳었던 표정이 서서히 풀어져 내리며 약간의 당황이 스몄다.
“……울어?”
벨라는 그 말을 듣자마자 이불을 끌어 올려 눈두덩이를 꾹 눌렀다. 다시는 그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비추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내젓는 동시에 이불에 물기를 완전히 닦아 냈다.
“그럼 왜.”
그가 사뭇 답답하다는 듯이 덧붙였다. 그러다 버릇처럼 이불을 강제로 끌어 내리려는 손끝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움찔거렸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느린 한숨을 뱉었다.
“다그치기만 해서 미안해. 걱정돼서 그랬어. 밖에 비는 내리지, 그런데 나갔다는 애는 한참을 기다려도 안 오지. 그러다 돌아온 꼴이 이러니까.”
벨라는 삐져나올 뻔한 비웃음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한들, 그는 한결같이 이기적이고 냉소적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제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이안을 죽인 게 누구인데.
눈가가 완전히 마르고 나서야 그녀는 이불을 끌어 내렸다. 눈물이 고였던 흔적은 살짝 발개진 눈가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 희미한 흔적마저도 놓치지 않았다.
“많이 힘들었어? 그랬으면 나한테 말을…….”
그가 말하며 손을 움직이는 순간, 좋지 않은 기억이 범람한 건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차가운 손이 뺨에 닿자 벨라는 저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간단한 손길 한 번에 몸속 깊숙이 박혀 있던 공포가 이를 드러내며 그녀를 집어삼켰다.
“…….”
그는 허공에 뜬 제 손과 잘게 떠는 그녀의 어깨를 느릿하게 번갈아 보았다. 그의 목울대가 한번 출렁였다.
벨라는 삽시간에 가빠진 숨을 내뱉으며 이불을 꽉 그러쥐었다. 거세게 뛰는 심장 소리가 커다란 북소리처럼 귓전을 울렸다.
눈을 질끈 감는 순간, 온통 새까만 세상에 갇혀 버렸다. 창문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는, 철저히 고립된 방에.
발목부터 서서히 휘감고 올라오는 사슬이 기어코 제 목을 조르고 말 것 같았다. 상상은 쉽게 현실로 번졌다. 순식간에 굵은 사슬이 목을 감아 죄며 숨을 틀어막았다.
그녀가 옆으로 돌아누워 몸을 웅크리자, 둥글게 솟아오른 이불 언덕이 희미한 떨림을 내비쳤다.
“……벨라.”
낮은 음성이 번개처럼 뇌리에 내리꽂혔다. 저를 부르는 그 목소리는 지독한 악몽의 시작이었다. 저리 부르고 나면 주저 없이 손길을 뻗어 올 테고, 저를 저 밑바닥까지 끌어내려 짓밟을 것이다.
희망이 다시 싹을 피워 낼수록 곁에 묻어 두었던 공포가 더불어 자라났다. 그의 손에 길든 몸은 그 두려움을 잊지 않고 철저히 저를 굴복시켰다.
“……창, 문…….”
벨라가 힘겹게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창문?”
“커튼 좀…… 걷어 주세요…….”
벨리아르는 계속해서 비가 내리기에 일부러 쳐 놨던 커튼을 쳐다봤다. 커튼 색은 밝은 편이었지만, 바깥이 워낙 어두워 별 의미는 없었다.
그는 그제야 벨라가 왜 저리 벌벌 떨면서 커튼을 걷어 달라고 하는지 이유를 깨달았다. 또 창문 없는 방 안에 자신을 가둬 두었을까 봐.
그는 말없이 일어서 커튼을 열어젖혔다. 굵은 빗줄기가 여전히 땅을 내리치고 있었다. 그는 허한 손을 한번 꽉 쥐었다가 펴곤 다시 그녀에게로 몸을 돌렸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여 떠는 몸을 당장이라도 품에 안고 싶었지만, 그녀가 헤매고 있는 지옥이 제 손으로 빚은 것이라는 걸 알기에 어떠한 손길도 내밀 수 없었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어. 무서워지면 창밖을 봐.”
그는 모든 창이 훤히 보이도록 커튼을 다 걷어 놓고선 방을 나갔다.
헛헛한 고요가 흐르자 벨라는 살며시 고개를 들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그가 없었다.
떨림이 잦아들었지만 심장은 여전히 귀가 아프도록 거세게 뛰어 댔다. 그녀는 불안정한 안도에 몸을 맡긴 채 서서히 무의식에 잠겼다.
열병으로 정신이 흐릿한 와중에 안개처럼 시간이 흘러갔다. 몽롱하게 눈을 깜빡일 때마다 달빛 아래로 붉은 눈동자가 스쳤다.
그저 꿈이려니 했다. 그가 나오는 악몽은 지긋지긋하게 꾸었으니.
벨라는 그 악몽이 저를 집어삼키려 할 때마다 훤히 드러난 창문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그때마다 붉은 눈동자는 없었다.
달빛마저 구름에 가려 어두운 새벽엔 희미한 빗줄기만이 그녀의 불안을 잠재워 주는 구원이었다.
* * *
길고 짧았던 새벽이 지났다. 아침이 밝자 구름이 걷히고 쨍쨍한 해가 모습을 드러냈다. 시에나가 테이블보를 펼치는 동시에 창틀에 매달려 있던 빗방울이 톡 흘러내렸다.
“나 때문에 잠도 제대로 못 잤지? ……고마워.”
벨라는 지난밤 계속 방안에 드나들며 제 열이 내리도록 간호해 준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하도 고열에 시달리느라 정신이 없어서 정확히 누군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시에나일 거라고 짐작했다. 그게 가장 좋은 각본이었다.
하지만 시에나는 전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요, 저는 어제 아무 일 없이 잘 잤어요.”
“……그럼 소렐 부인이 다녀갔나?”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소렐 부인뿐이었다. 그러나 시에나는 생각이 조금 달라 보였다.
“아가씨, 어젯밤엔 공작님께서 이 층에 드나드는 사용인들을 모두 물리셨어요. 잠을 제대로 못 잔 건 제가 아니에요. 물론, 하녀장님도 아닐 거구요.”
시에나가 말하고 싶은 사람이 누군지 벨라 역시 알고 있었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었다.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던 사실이기도 했다.
벨라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 잠깐씩 보았던 커다란 인형과 붉은 눈동자는 절대 착각이 아니었음을.
차라리 끝까지 나쁜 사람이면 그나마 마음이 편할 텐데. 벨라는 한바탕 비가 내려 촉촉이 젖은 바깥을 살며시 쏘아봤다.
“……나쁜 놈.”
“……네? 아가씨, 방금 뭐라고…….”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일단 내뱉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주었던 선물이 떠올랐다. 희고 작은 토끼, 리라. 이어 불쑥 찾아든 이상한 기억까지.
“아, 리라 밥 줘야 하는데.”
“제가 방금 무슨 소리를 분명히 들었어요. ……근데, 리라가 누구예요?”
“내가 키우는 토끼 이름이야.”
“와, 아가씨 토끼도 키우세요? ……가 아니라! 식사는 아가씨께서 먼저 하셔야죠! 지금 토끼 밥을 줄 때가 아니……!”
시에나가 말하는 사이, 겉옷을 챙겨 움직인 벨라는 벌써 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식사는 좀 이따가 할게. 토끼 밥 주고 와서 말할 테니까, 그때까지 시에나 너도 조금 쉬고 있어.”
“아니 저는 밤새 잘 잤다니까요! 쉴 필요가 없다구요!”
시에나의 외침을 뒤로하고 복도로 빠져나오니 뒤늦게 온전하지만은 않은 몸 상태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행히 열은 내렸지만, 머리가 조금 지끈거렸다.
그렇다고 토끼의 존재를 떠올린 이상 계속 방안에 틀어박혀 있을 순 없었다.
“이번엔 네가 잘 돌봐 줘.”
설마 자신이 돌보지 않았다고 굶고 있진 않겠지만, 그래도 건강히 있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벨라는 옅은 한숨을 내쉬며 조심스레 걸음을 뗐다. 복도 끝에 있는 그의 방문에 잠시 시선이 닿았다. 부디, 그와 마주치는 일이 없길 바랐다.
그의 허락 없이 홀로 동쪽 화원에 향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화원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지키는 기사들이 있었다.
잔뜩 긴장한 채 걸음을 옮겼지만, 기사들은 조용히 예를 갖추며 길을 터 주었다.
화원에 발을 들이자마자 보이는 광경에 벨라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입을 벙긋거렸다. 더 큰 문제는 화원 안에 있었다.
그가 아끼던 화원이 며칠 새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그 범인은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니는 토끼 한 마리였다.
토끼 전용으로 한쪽 바구니에 싱싱한 풀과 건초를 잔뜩 쌓아 놓았는데, 토끼의 입맛은 생각보다 고급이었던 모양이다. 토끼의 키가 닿는 곳마다 꽃이며 풀이 엉망으로 뜯겨 있었다.
벨라는 그 모습을 보곤 곤란한 숨을 내뱉으며 얼른 토끼 먹이가 담긴 바구니를 챙겨 들고 토끼에게 다가갔다.
“리라, 이 꽃들은 먹으면 안 돼. 이 풀 먹자, 응?”
나름 맛있어 보이는 풀을 골라 토끼의 앞에 흔들어 보았지만 토끼는 그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하얀 꽃을 하나 똑 따먹었다.
“안 돼……! 공작님께서 화내실 거야. 착하지.”
벨라가 바구니를 들고 토끼의 뒤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니는 사이, 조용히 화원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