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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69)화 (169/180)

169화

벨라는 얌전히 품에 안겨 있는 토끼를 바라봤다. 야생에서 봤던 토끼와는 달리, 정말 얌전하고 애교가 많았다.

토끼는 열심히 풀을 받아먹고선 짤막한 두 손으로 열심히 제 얼굴을 닦더니 그녀의 품으로 폭 몸을 기대었다.

순간 벨라의 뺨이 발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새하얀 토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벨리아르 역시, 그런 벨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마음에 들어?”

이 사랑스러운 토끼가 마음에 들지 않을 리가. 벨라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품 안 가득 느껴지는 토끼의 따스한 온기에 모든 감각이 나른히 풀어져 버리는 듯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어떤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찰나의 낯선 기억은 곧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 머릿속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벨라, 이것 좀 봐. 통통한 놈으로 잡아 왔어.”

풀숲을 헤치며 나타난 그가 토끼의 양 귀를 잡은 채 달랑달랑 들고 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마자 자신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어서 놔줘! 아파하잖아!”

“그럼 지금 죽일까?”

“뭐? 이렇게 귀여운 애를 왜 죽여!”

“고기 먹고 싶다고 했잖아.”

맞아. 언젠가 그에게 고기가 먹고 싶다고 한탄했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고기가 먹고 싶은 건 맞는데! 이렇게 귀여운 애를 봤는데 어떻게 먹어……. 봐, 방금 눈도 마주쳤단 말이야.”

“그럼 내가 안 보이는 데서 죽이고 올게.”

“안 돼! 얜 놔줄 거야.”

그리고…… 저는 그에게서 토끼를 빼앗아 도로 놔주었다. 어서 가라고 엉덩이를 톡톡 다독여도 토끼는 눈앞의 풀만 야금야금 뜯어 먹을 뿐 꼼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폴짝폴짝 뛰어 제게로 몸을 기대기까지 했다.

그녀는 얼른 쪼그려 앉아 토끼를 쓰다듬었다. 그 모습을 본 그가 미간을 좁히며 땅을 툭툭 찼다.

“멍청한 놈이야.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도 않고. 봐, 놔줘도 어리바리하잖아. 놔주면 어차피 다른 짐승한테 잡아먹힐걸. 그럴 바엔 내가…….”

“내가 마음에 드나 봐. 그럼 우리가 키우자!”

그는 당연하게도 표정을 와락 구기며 토끼를 노려봤다.

“수컷이면 절대 안 돼.”

“암컷이야.”

당당하게 말하니 그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표정으로 마음에 안 든다는 티를 팍팍 내는 건 여전했다.

“벨리아르, 얘 이름은 뭐로 할까?”

“아무렇게나 대충 지어. 난 한낱 짐승한테까지 이름 줄 생각 없으니까.”

“음……. 그럼 리라 어때? 우리 둘 이름에서 두 번째 글자를 따온 거야.”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피식하고 짧게 웃었다. 비웃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더니 같이 쪼그려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자신이 토끼를 쓰다듬듯, 그 역시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벨라, 네 이름은 정말 사랑스러워.”

“……그래서, 내가 지은 이름은 이상하다는 거야?”

“아니, 그냥 네가 사랑스럽다고.”

그러면서 그가 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모든 장면이 자연스럽게 스쳐 지나갔고, 낯선 기억은 아주 천연덕스럽게 제 기억의 한 부분으로 스며들었다.

벨라는 살짝 혼란스러운 채로 그를 바라봤다. 그의 표정이 평소와 달라 보였다. 눈앞의 안개가 걷힌 것처럼 희뿌옇기만 하던 그의 감정이 조금은 아른거렸다.

“선물이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만회하고 싶었어. 널 기쁘게 해 주고 싶었고, 어떻게 해야 네가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믿어 줄까 싶어서.”

그래도 웃어 주진 않네. 그가 자그마한 중얼거림을 덧붙였다.

그가 담담히 던진 돌멩이는 그녀가 단단히 쌓아 올린 벽을 조금씩 허물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가 최선을 다해서 던지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 돌멩이가.

그는 차근차근 잘못된 관계를 되짚어 가고 있었다. 첫 만남부터 잘못되었으니, 이 토끼는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첫 인연의 꼬인 매듭이었다.

모든 것이 거짓이라고 생각했는데……. 제게 향하는 그의 마음이, 제게 보여 주는 그 사소한 노력들이.

어쩌면 믿고 싶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토록 닿고 싶었던 마음을 이제야 건네주는 그가 미워서, 그동안의 일들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벨라는 고개를 숙인 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전히 그가 밉지만, 비로소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힘겹게 입술을 떼어 들릴 듯 말 듯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전했다.

“……고마워요.”

그의 입매가 조용히 늘어졌다. 그녀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그가 한 걸음 성큼 다가왔다.

“목소리가 작아서 잘 안 들렸어. 뭐라고, 벨라?”

그래도 친절하게 말을 반복해 줄 만큼 응어리가 풀린 건 아니었다. 벨라는 다시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그를 바라봤다. 그는 상당히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 토끼 이름, 지었어요.”

“그래? 벌써 이름을 지어 준 걸 보니 마음에 드나 보네. 뭐로 지었을까?”

못된 마음이지만 그 기분을 조금이라도 망치고 싶었다. 알량한 치기였고 그가 짓밟아 놓은 자존심의 잔해였다.

“……리라요.”

오만하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서서히 일자로 굳어졌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는 그를 보니 확실해졌다.

새롭게 제 속을 파고든 그 기억 한 조각은, 우리의 빛바랜 교점이었다.

“……그래. 좋은 이름이네.”

* * *

“찾으셨습니까?”

방으로 찾아온 에릭을 보며 벨라는 잔뜩 곤란한 얼굴을 했다.

“죄송해요. 이렇게 부르려던 게 아닌데…….”

단지 창밖을 보며 상념에 잠겨 있다 보니 누군가가 떠올랐을 뿐이었다. 뒤이어 에릭이 떠올랐고, 시에나에게 그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에릭을 불러 달라거나 하는 말은 아니었는데 시에나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모셔 올게요!”라고 외치더니 곧장 나가 버렸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릭이 찾아왔다. 얼떨결에 자신이 그를 부른 꼴이 되어 버렸다. 감히, 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에릭은 아무렇지 않은 듯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저는 전혀 상관없으니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부르셔도 됩니다. 그것에 익숙해지셔야 하고요.”

익숙해져야 한다, 라……. 그 말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던 벨라는 그저 옅은 미소로 답했다. 그러고는 창밖으로 눈길을 돌렸다.

“날씨가 흐리네요.”

“예, 곧 비가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기분이 정말 이상했다. 흐린 날씨 탓인지 생각의 흐름도 먹먹하게 흘러갔다. 누구에게도 쉬이 털어놓을 수 없는 이 마음을 홀로 끌어안고 있는 것이 조금 벅찼다.

시에나도 편한 친구고 에릭도 소중한 친구지만, 아직은 투명한 벽이 존재했다.

온전히 제 모습으로 사귄 친구가 아니어서 그런지 자신이 조금만 잘못하면 그 관계가 틀어져 버릴까 두려웠다. 그래서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다.

이럴 때면 문득 이안이 떠올랐다. 숲속에 숨어 사는 마녀여도 상관없고, 사람들에게 천시 받는 존재여도 상관없고, 처음으로 제 존재가 소중하다고 말해 주며 손을 내밀어주던 그가 이런 날엔 유독 그리웠다.

이안, 나 내가 누군지 잘 모르겠어.

그럼 이안은 분명 다정한 말로 저를 북돋아 주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 응원이 조금 간절했다.

“……에릭 경.”

“예, 아가씨.”

“저 이안이 보고 싶어요. ……이제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에릭뿐이었다. 아마 그는 이안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겠지.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입니다. 괜찮으시다면 제가 길을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장소만 알려 주세요. 시에나랑 같이 다녀올게요.”

완강한 거절에 에릭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릭이 알려 준 장소는 정말로 성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아가씨, 여기쯤인 것 같아요. 아데인 경께서 써 주신 대로라면…….”

시에나가 종이를 들여다보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벨라는 어느 묘지 앞에서 멍하니 서 있었다.

“……여기야.”

차가운 비석에 적힌 ‘이안 에드레이즈’라는 이름이 너무 비현실적이었다.

시에나가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을 붙였다.

“저는 잠시 주위 좀 걷고 있을게요. 혹시 무슨 일 생기면 힘껏 소리를 지르세요. 제가 당장 뛰어올 테니까요.”

“고마워.”

시에나는 가져온 우산 두 개 중 하나를 그녀의 발치에 놓아두곤 자리를 비켜 주었다.

벨라는 묘지 앞에 우두커니 선 채 이안과 배를 탔던 그날로 되돌아갔다. 칼에 찔려 상당히 괴로울 텐데도 그는 저를 보며 웃어 주었다. 무서워하지 말라는 듯.

처음엔 그 모습이 저를 지독히도 괴롭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저를 위한 이안의 마지막 배려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덕분에 자신이 기억하는 이안의 마지막 모습은 그렇게 웃는 얼굴이었다.

벨라는 쪼그려 앉아 비석 위로 손을 얹었다. 그러곤 온기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디찬 비석을 애틋하게 쓰다듬었다.

“……이안, 나 아주 잘 지내고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슬퍼하지도 말고.”

죄책감과 그리움이 한데 뭉쳐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이안을 죽게 만든 것이 그인데, 그에게 조금이라도 마음을 열었다는 사실이 너무 죄스럽게 느껴졌다.

머릿속엔 온통 미안하다는 말과 보고 싶다는 말밖에 떠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이안이 듣고 있다면 어느 쪽이든 슬퍼할 테니.

벨라는 고개를 숙인 채 자조적인 웃음을 흘려보냈다.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는데……. 나 정말 바본가 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어.”

여태까진 다 괜찮은 척이었다. 더 이상 이안이 이 세상에 없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안을 떠올리지 않으려 발버둥 칠수록, 그 빈자리의 공허함이 거대한 파도가 되어 저를 덮쳤다.

그리고 비로소 이안의 죽음을 마주한 지금, 꾸역꾸역 들고 있던 바위를 내려놓은 느낌이었다. 이안은 분명 다 괜찮다고 저를 다독여 주었을 테니까.

“……정말 고마워.”

한두 방울씩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 서서히 어깨를 적셨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기억이 스몄던 그때처럼.

벨라는 비를 맞으며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밖으로 흩어지지 못한 더운 숨이 모여 눅진한 열기를 더했다. 어깨로 사정없이 내리치는 비가 시원하게 느껴졌다.

잠시 후, 누군가 다급히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서 그녀의 상태를 보고 달려온 시에나는 얼른 우산을 펼쳐 씌워 주었다.

“아가씨! 제가 이럴 줄 알았어요! 아휴, 우산도 안 쓰시고 비를 다 맞고 계시면 어떡해요…….”

하지만 언제부터 이러고 있던 건지 이미 옷은 비에 흠뻑 젖은 상태였다. 시에나는 애타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구르며 그녀의 어깨를 다독였다.

“……아가씨, 이러다가 감기 걸리셔요. 이제 그만 돌아가요. 네?”

벨라는 세차게 내리치는 빗속에 파묻혀 한참을 그 상태로 꼼짝하지 않았다. 그러다 조용히 몸을 일으켰을 땐 비를 맞은 등이든, 얼굴을 파묻고 있던 치마든, 온통 젖어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벨라는 발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담담하게 비석을 바라봤다. 그러다 비석 위로 찰박찰박 튀어 오르는 빗방울로 눈길이 내려앉았다. 그녀는 제 우산을 묘지 위에 펼쳐 두었다.

“다음엔 꽃을 들고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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