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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68)화 (168/180)

168화

날이 적당한 오후였다.

벨라는 침대에 앉아 조금 전 시에나가 가져다준 레몬 쿠키를 먹으며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요즘 다양한 취미에 관심을 두었다. 비록 그 흥미가 오래가진 못했지만, 이번엔 사흘째 체스 관련된 책을 붙들고 있으니 제법 진지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똑똑.

다소 투박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무언가 잊어서 다시 온 시에나거나 소렐 부인일 것이다. 벨라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응, 들어와.”

대답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평소와 다른 문소리에 번뜩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그가 다가오고 있었다.

벨라는 순간 멍하니 벌어지는 입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는 빙긋 웃으며 보란 듯이 인사를 건넸다.

“들어오게 해 줘서 고마워.”

분명 며칠 전 그에게 노크하라고 요구한 건 저였지만, 벨라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정말 이렇게 노크를 할 줄은 몰랐다. 비록 문을 닫는 소리는 조금 신사적이지 못했지만. 어차피 그는 신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다가오니 정원처럼 넓었던 방이 조금 작게 느껴졌다. 그는 침대 위를 눈짓하며 물었다.

“앉아도 될까?”

벨라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침대 한쪽에 걸터앉고 나서야 뒤늦게 작은 불만이 피어났다. 옆에 의자도 있는데, 굳이 침대에 앉는 이유는 뭘까.

“보고 싶어서 왔어.”

벨라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했다. 얼핏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대신전에서 손님이 왔는데,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그전에 널 보고 가면 내 성질을 죽이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렇게 그와 시선을 맞대고 있을 때면 늘 그녀가 먼저 눈을 피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그가 두려워서.

하지만 이번엔 그가 먼저 눈길을 돌리며 작은 한숨을 곁들였다. 그는 옅은 흉터가 남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가끔…… 아니, 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해. 숲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토끼를 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

“평범한 사냥꾼인 척하고 네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면 어땠을까.”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이고, 되돌릴 수 없는 일이니까.

그는 자조적인 미소를 띠며 깊은 회한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결과는 비슷했겠지. 내가 찰나의 친절을 베풀었다고 하더라도, 내 더러운 성질이 변하진 않았을 테니까. 난 그 뒤로도 어떻게든 너를 망가트렸을 거야.”

벨라는 저의를 알 수 없어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 역시 그녀에게 딱히 대답을 바라진 않는 눈치였다.

“난 그날, 네 눈앞에서 토끼를 죽인 걸 후회해. 그냥 그 사실을 네가 알아줬으면 해서.”

그와의 인연은 성역의 숲에서 시작되었다. 토끼를 죽인 것, 그건 아주 작은 시작점이었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그를 두려워할 순간은 수없이 많았다.

그는 지금 그 사소한 시작점으로 돌아가 뒤틀린 관계를 바로잡으려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이…… 조금 서툴러 보였다.

하지만 여전히 벨라는 그가 저를 통해 누구를 보고 있는지 헷갈렸다. 만약 자신이 그가 사랑하던 ‘벨라’가 아니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그 가정이 그녀를 너무 두렵게 만들었다.

그는 협탁 위에 놓인 토끼 인형으로 한번 눈길을 주었다. 이번엔 벽을 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도 토끼 좋아해?”

벨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그래.”

싱거운 물음 뒤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침대 위에 놓인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상태로 꽤 긴 침묵이 이어지고 나서야 그가 살며시 말을 꺼냈다.

“벨라, 저녁에 같이 식사할까?”

들인 시간에 비해 너무 사소한 말이었다. 그녀는 또 물끄러미 그를 바라봤다. 나른히 시선을 맞추고 있긴 하지만, 그는 분명 평소와 조금 달랐다.

“남자들은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한없이 서툴러요.”

왜 하필 지금 순간에 그 말이 떠올랐을까.

조용히 제 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는 조금, 아주 조금…… 초조해 보였다. 가만히 들여다본 붉은 눈동자엔 제 모습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 올라갔다.

“시간 맞춰서 에릭 보낼게.”

아까보다 표정이 훨씬 편안해 보이기도 했다. 벨라는 그의 작은 변화를 세세하게 관찰하며 눈에 담았다. 체한 것처럼 마음이 울렁였다.

“저녁에 봐.”

벨라는 그가 나간 뒤, 조용히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미워하려면 그가 보여 주는 것들이 모두 거짓이어야만 하는데, 그는 자꾸 서툴면서도 착실히 거리를 좁혔다.

그가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땅이 울리며 견고하게 세운 벽이 흔들렸다.

벨라는 기어코 제 벽을 무너트리고 말, 그의 진심이 두려웠다.

* * *

해가 지고, 그가 말했던 것처럼 에릭이 찾아왔다. 벨라는 애써 붙들고 있던 체스책을 내려놓곤 가볍게 단장한 뒤 에릭을 따라나섰다. 하마터면 잊을 뻔한 노트도 다행히 챙겨 들었다.

에릭을 보낸다고 했을 때부터 짐작은 했지만, 역시 그의 침실이나 다이닝룸으로 향하진 않았다.

며칠간 하도 돌아다니다 보니 이젠 성의 지리를 꽤 파악한지라 가는 방향만으로 목적지를 유추할 수 있었다. 동쪽 화원이었다.

“체스는 주인님께 배우시면 될 텐데요.”

길을 안내하려 조금 앞서서 걷던 에릭이 넌지시 말을 붙였다. 아마 아까 방에서 손에 들고 있던 체스책을 본 모양이다.

“에릭 경도 체스 좋아하세요?”

“한때 검술보다 깊게 파고든 적이 있었죠. 주인님을 한 번이라도 이겨 보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이기셨나요?”

“아니요. 매번 농락만 하시고 절대 안 져 주시더군요. 그래서 다시 검술에 몰두했죠. 검은 그나마 받아 주시니까요.”

“그런 공작님께 체스를 배우라고요?”

조금 황당해서 물으니 에릭은 고개를 한 번 갸웃거렸다.

“아가씨께는 져 주시지 않을까요?”

정말 이상하게도 벨라는 그 말에 동의했다. 지금 그의 상태라면 얼마든지 제게 킹을 내어 줄 것 같았다. 그러니 더욱더 문제였다.

머릿속이 조금 복잡해지려 하자 벨라는 버릇처럼 그에 관한 생각을 잠시 접어 둔 채 대화를 틀었다.

“요즘 많이 바빠 보이세요.”

괜히 꺼낸 말이 아니라 에릭은 정말 한동안 잘 보이지 않았다. 원래는 하루에 한 번씩은 꼭 마주쳤는데 요즘은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물론, 벨라는 의도적으로 에릭도 피했었기에 그 물음을 던진 것이 조금 마음에 찔렸다.

“이곳저곳 멀리 돌아다닐 일이 좀 있었습니다. 주인님께서 꽤 까다로운 지시를 하셨거든요.”

“무슨 일이었길래……. 위험한 일은 아니었죠?”

에릭은 그녀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이제 저한테 화는 다 풀리신 겁니까?”

화가 나다니. 벨라는 작게 숨을 들이켜며 손사래를 쳤다.

“전 에릭 경께 화난 적 없어요.”

“계속 피하시길래 화나신 줄 알았습니다.”

“그땐…… 그냥 좀 생각이 많아서 그랬어요. 절대 에릭 경께 화가 난 건 아니었어요.”

“그럼 여전히 주인님께 화가 나신 거군요.”

아랫입술을 한번 말아 문 벨라는 그 사실을 더 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

“……네, 맞아요. 공작님께 화가 났어요. 요즘 자꾸 이상한 행동을 하시잖아요. 지금도 그렇고…….”

“음.”

“경께서 보시기에도 그렇지 않으세요? 자꾸 제게 다정하게 대하시는데, 공작님은 절대 그럴 분이 아니시잖아요.”

“……그렇긴 합니다만.”

“제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이젠 그런 방법까지 쓰시는 거예요. ……제가 다른 사람이 되길 바라시지만, 저는 저일 뿐이에요.”

“제 눈엔 아가씨께서 지금 화를 내시는 걸로 보이지는 않는데요.”

순간 에릭의 말에 걸음이 무뎌졌다. 벨라는 하마터면 멈춰 설 뻔한 다리를 겨우 움직였다.

분명 그의 거짓된 태도에 화가 나고 짜증이 났는데, 화를 내는 걸로 보이지 않는다고 하니 그 안에 가려져 있던 감정을 들킨 것 같아 불안했다.

“……그럼 어떻게 보이시는데요?”

어느덧 화원 입구 앞까지 다다랐다. 에릭은 대답 대신, 옅게 웃으며 화원의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고는 들어가 보라는 듯 안쪽을 향해 눈짓했다. 화원 내부에선 따스한 온기가 풍겼다.

벨라는 조심스레 화원 안으로 발을 들였다. 저녁 식사를 하자더니 내부에는 아무것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내부를 둘러보던 중, 보라색 꽃들 사이로 새하얀 털 뭉치 같은 것이 그녀의 눈길을 잡아끌었다.

처음엔 누가 목도리를 떨어트려 놓았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털 뭉치가 움직였다. 낯선 존재에 무서움보단 호기심이 더욱 크게 일었다. 가까이 다가가니 그 정체가 무엇인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털 뭉치가 뒤를 돌아보았다. 오물오물 풀을 씹느라 쫑긋 솟아난 두 귀가 움찔거렸다. 벨라는 털 뭉치와 눈을 맞추며 멍하니 중얼거렸다.

“토끼…….”

……토끼가 왜 여기 있지?

더군다나 일반적인 토끼가 아니었다. 야생의 토끼라기엔 털이 매우 반질거리고 깨끗했으며 눈 색도 범상치 않았다. 토끼는 각각 빨간색과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오드아이였다.

동쪽 화원은 이 성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공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가 허락하지 않는 한 누구든 발을 들이지 못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는 절대 이런 작은 동물을 들일 만큼 자비롭지 않았다. 그런데…….

“가끔…… 아니, 요즘은 자주 그런 생각을 해. 숲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내가 토끼를 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난 그날, 네 눈앞에서 토끼를 죽인 걸 후회해. 그냥, 그 사실을 네가 알아줬으면 해서.”

문득, 그가 낮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래도 설마.

의구심이 뻗칠 무렵, 멀리서 발소리가 들렸다. 벨라는 반사적으로 토끼를 품에 안아 들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당연하게도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토끼의 숨을 무참히 빼앗아 갔던 총성이 머릿속을 거세게 울렸다. 벨라는 불안한 눈빛으로 그의 손을 훑었다. 총이 들려 있어야 마땅한 손엔 부드러운 풀만 쥐어져 있었다.

“걱정하지 마. 또다시 후회할 짓 안 해.”

그는 천천히 다가와 그녀가 안고 있는 토끼의 입에 풀을 대 주었다. 토끼는 여전히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풀을 받아먹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이질적이었다.

“이번엔 네가 잘 돌봐 줘.”

그러니까 이 토끼는, 그가 건네는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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