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벨라는 성에서 나오기 직전에 그와 노트로 대화한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느 날 공작님께서 제게 이름을 물어보셨어요.”
“이름?”
“네. 사실…… 아가씨께서 방을 옮기기 전까지는 매일 오후에 공작님께 보고를 드렸거든요. 아가씨의 아침 식사에 대해서요.”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
시에나는 무척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벨라에겐 그다지 새삼스럽지 않은 이야기였다. 오히려 그에게 보고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더욱 놀랐을 것이다.
벨라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시에나는 지레 걱정하며 다급히 말을 얹었다.
“간단한 보고였어요! 그냥 아가씨께서 아침 식사는 잘했냐고 물으셨고, 저는 매일 잘하셨다고 대답했어요. 정말 그뿐이었는걸요.”
벨라는 최대한 제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는 시에나의 노력이 고마워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괜찮아. 전혀 기분 나쁘지 않으니까 걱정할 거 없어.”
그제야 시에나 역시 마음을 놓듯이 웃고는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공작님께서 한 번도 제게 다른 말을 거시거나 제 이름을 부르신 적은 없었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제게 이름을 물어보시지 뭐예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이름을 말씀드렸더니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가 버리셨어요.”
혹시나 그가 시에나에게 무언가 해코지를 하진 않았을까 걱정하던 벨라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별일 아니어서 다행이야.”
그러나 시에나는 그 말이 오히려 놀라운 듯했다.
“별일 아니긴요! 이게 얼마나 놀라운 일인데요! 공작님께서 일개 하녀인 저한테 직접 이름을 물어보셨다니까요? 이게 무슨 뜻인지 짐작 가는 게 없으세요?”
시에나의 말에 한 번 더 고심해 보았으나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었다. 사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별로 좋은 쪽으로 짐작되진 않았다.
“음……. 잘 모르겠어. 그냥 네 이름이 궁금하셨던 게 아닐까?”
시에나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가씨, 이건 저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아가씨에 관한 관심인 거예요. 제가 아가씨와 보내는 시간이 많으니 은근히 신경을 쓰시는 거라구요.”
역시, 시에나의 이름을 물은 건 그다지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벨라는 살짝 어두워진 얼굴로 대꾸했다.
“그럴 수도 있지. 요즘 내게 화가 많이 나셨을 테니까.”
“그래서 아가씨께 화를 내시던가요?”
“내가 피해 다녀서 화를 내실 틈도 없었을걸. 아, 그래서 네게 이름을 물어봤을 수도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내게 바로 알려 줘. 알았지?”
그녀가 진지하게 걱정을 더하자 시에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께서 더 잘 아시잖아요. 공작님은 절대 찾아가서 화를 내시지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죠. 부르면 그만이니까요. 그리고 저 같은 하녀를 벌하는 데에 그리 시간을 두실 분도 아니시구요.”
그제야 벨라는 조금 이상하긴 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모조리 말했다지만, 분명 그의 선을 넘는 행동들이 여럿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태까지 그는 조용했다. 물론 오늘 방에 찾아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티를 내긴 했어도 결과적으로는 성을 나가는 것 역시 허락해 주었다.
무언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한 그녀의 표정을 슬쩍 살피던 시에나가 넌지시 결론을 말했다.
“하여튼, 공작님이 요즘 조금 이상하다는 말이었어요.”
“……맞아. 그렇긴 해. 하지만…….”
“남자들은 겉으론 강해 보이지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한없이 서툴러요.”
“……벨라, 네게 상처 줘서 미안해.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해.”
순간 그 서툴렀던 고백이 떠올랐다. 그 말은 절대 진심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설령 진심일지라도 온전히 제게 향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의 옛 연인이 자신이었다는 소리는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이었다. 세상에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그는 분명…… 저를 이용해서 과거의 그리움을 해소하려는 것뿐일 터였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그럴까?”
“아가씨께서 어떤 분을 말씀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모든 남자는 다 똑같다고 생각해요. 여자도 그렇고요. 사람은 모두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바보가 되곤 하거든요.”
“…….”
“조금 이상해지기도 하고요.”
그는 제게 한없이 냉정했고, 때로는 다정하기도 했다. 그 상반된 두 모습이 마구 엇갈려 머릿속을 헤쳐 놓았다.
대체 어디까지가 진심이고 거짓인지 헤아릴 수 없어 마음이 복잡했다.
* * *
한편, 그녀가 나간 이후로 저 멀리 성문 쪽만 뚫어져라 보고 있던 그는 결국 더 이상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로드릭을 불러들였다.
얼떨결에 그의 맞은편에 앉아 술잔을 받게 된 로드릭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바쁘게 머리를 굴려야 했다.
“경에 대한 치하가 늦었군.”
로드릭이 끝까지 셀리온에 남아 정리해 준 덕분에 모르가타와의 전쟁은 깔끔하게 끝을 맺었다.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여 각하께 폐만 끼친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로드릭은 술잔을 입에 살짝 대기만 하곤 테이블 위로 잔을 내려놓았다. 이런 기회를 틈타 슬쩍 한잔 마실 법도 하건만, 그는 정직한 기사답게 근무 중엔 음주를 하지 않았다.
“이번에 가족 모두 베른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아들들은 수도에 있고, 아내만 베른에 있습니다.”
“아내와 사이가 좋은가 보군.”
그가 술을 한 모금 넘기며 조용히 입매를 늘였다. 로드릭을 부른 이유는 아주 사소했다.
“로드릭을 불러와.”
“퇴근했습니다.”
“벌써?”
“셀리온에서 돌아온 후로 퇴근 시간을 칼같이 지키길래 물어봤더니, 가택을 베른으로 옮겼답니다. 집에 부인이 기다린다고요.”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로드릭처럼 아내와 사이가 좋은 남자였다. 그러나 로드릭 입장에서는 그가 먼저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상당히 당황스러웠다.
“예, 뭐……. 나쁘진 않습니다.”
“아내와는 어떻게 만났지?”
아무리 당황스럽더라도 일단 주군이 물었으니 답은 해야 옳았다. 로드릭은 의아함을 거두지 못하면서도 착실히 입술을 뗐다.
“입단 시험을 보러 수도에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는데, 그때 아내가 도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첫눈에 반했습니다.”
딱딱하고 올곧기만 한 로드릭의 입에서 나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답변이었다.
“흥미롭네.”
그는 낮게 웃고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다리를 꼬았다. 본격적으로 말을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저…… 외람된 말씀이오나,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됐지?”
그는 로드릭의 질문을 가볍게 무시했다. 결국, 로드릭은 모든 의문을 덮고선 그가 원하는 이야기를 내놓기로 했다.
“……입단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어깨를 다친 상태라 제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기라도 했나 보군. 아, 그땐 실력이 형편없었으니 부상 때문이 아니려나.”
로드릭은 잠시 그의 앞이라는 것도 잊은 채 헛숨을 내뱉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저리 태연히 흘러나올 만한 주제는 아니었다. 자신이 처음 입단 시험에 떨어진 건 웬만한 이들이 알고 있었지만, 그때 어깨 부상이 있었다는 건 가족밖에 모르는 사실이었다.
“대체 어디까지 알아보신 겁니까?”
“그러니까, 그런 뻔한 얘기 말고 재밌는 얘길 해 봐. 웬만한 정보는 네가 기사들을 끌고 성에 쳐들어오기 전부터 알고 있었으니까.”
벨리아르는 또 한 번 로드릭의 아픈 곳을 들쑤셨다. 아마 그는 평생 그날의 일로 로드릭을 놀릴 것이 분명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로드릭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입단에 실패했으니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도저히 아내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냥 그대로 수도에 눌러앉았습니다.”
“그렇다고 넘어오던?”
“그럴 리가요. 정식으로 기사가 되면 만나 주겠다고 하길래, 그날부터 미친 듯이 훈련에 열중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이런저런 일도 다 해 보고, 틈틈이 시간을 내어 아내를 보러 갔습니다. 젊어서 가능했었죠.”
“그러고 입단 시험은 또 떨어졌고.”
노력파였던 로드릭은 삼수 만에 페이트 기사단 입단에 성공했다. 이 사실 역시 가족을 비롯한 친한 동료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이젠 놀랍지도 않은지 로드릭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대신 아내의 마음을 얻는 데에는 성공했습니다. 입단 시험에 떨어져서 좌절하고 있을 때, 아내가 먼저 마음을 표현해 주었죠.”
“무능한 모습에 반하기라도 한 건가?”
로드릭은 순간 울컥 올라온 감정을 삼켜야 했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술이 당겼다.
“……제 성실함과 정직한 태도가 좋다고 했습니다.”
그는 낮게 웃으며 술잔을 집어 들었다.
“특이한 취향이네.”
“각하께서 이런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래서 지금 상당히 당황스럽기도 하고요.”
“내가 경에게 배우고 싶은 게 있어서.”
“……예?”
순간 로드릭은 제 귀가 잘못되었나 진지하게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게 그의 입에서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우겠다는 말이 나오다니.
“부부싸움 해 본 적 있나?”
“셀 수 없이 많죠.”
“하지만, 여전히 아내와는 사이가 좋고.”
“부부싸움은 칼로 물 베기라는 소리도 있잖습니까. 사소한 말다툼일 때도 있고,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가 버릴 만큼 큰 싸움일 때도 있죠.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가 버릴 정도면 어떻게 풀어야 하지?”
“그럴 땐…… 보통 시간과 노력이 답이긴 하지만, 제겐 아내와 산 세월이 준 비법이 있죠.”
“그래, 그 비법을 내게 전수해 주었으면 해.”
순간 ‘예, 얼마든지요.’라고 답하려던 로드릭은 잠시 멈칫거렸다. 그제야 이 대화가 매우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로드릭은 빠르게 눈을 깜빡이며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부인이 있으셨습니까?”
벨리아르는 무릎 위에서 맞잡은 손을 까딱이며 조용히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 경은 벨라가 내실에 기거하는 게 어떤 의미라고 생각하지?”
로드릭은 지금 순간, 어느 날 제 첫째 아들이 처음 보는 아가씨를 데리고 와 임신했으니 혼인하겠다고 말했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