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제법 오랜만에 보는 그는 조금, 아주 조금 해쓱해 보였다. 벨라는 입꼬리만 끌어 올려 웃는 그에게서 금방 눈길을 거두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 덕분에 머릿속이 말끔히 비워진 그녀는 망설임 없이 연보라색 드레스로 손을 뻗었다.
그사이, 그는 방 안을 짧게 훑어보곤 테이블 위 아기자기한 장식품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방 안에선 따스한 햇살 내음이 가득 풍겼다.
“뭐 하고 있었어?”
벨라는 여전히 그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노트에 글씨를 끄적였다.
[시에나와 산책하러 가려고 준비 중이었어요.]
“어디로 가려고?”
그 물음에 벨라는 잠시 침묵했다. 말없이 응시하는 모습에선 약간의 의심이 엿보였다. 그는 장식품을 내려놓곤 테이블에 살짝 기대앉았다.
“못 가게 하려는 거 아니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오늘은 성 밖으로 나가 보려고요.]
벨리아르는 노트 위의 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순간 글자들이 눈앞에서 멋대로 날아다니는 듯했다. 그는 낮은 숨을 흘리고선 희미하게 조소했다.
“요즘 이러는 이유가 좀 궁금한데. 나를 일부러 자극하려는 거야, 아니면 나를 피하고 싶은 거야.”
그는 속으로 대체 며칠 만에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지 세어 보았다. 일주일이었다.
아무리 끝과 끝 방이라지만 같은 층을 공유하며 생활하는데 그동안 벨라의 머리카락밖에 구경하지 못했다. 그녀의 침실에 와 본 것도 처음이었다.
[공작님 자극하려고 한 적 없어요. 피한 적도 없고요.]
저만 보면 토끼처럼 이리저리 숨기 바쁘면서 저런 뻔뻔한 말을 잘도 끄적이지.
이제 그녀의 노트는 오로지 그를 위해서만 존재했다. 노트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가 한층 가라앉았다.
그는 시선을 올려 버릇처럼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어 대는 벨라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봤다. 혹여 또 달아나 버릴까 싶어 최대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미소를 가장했다.
“피하는 게 안 되니까 자극해서 쫓아내려는 걸로 보여, 벨라. 그것도 아니면, 내가 어디까지 참나 궁금해?”
그래, 하녀와 어울리며 온갖 허드렛일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까진 눈감아 줄 수 있었다. 벨라가 즐겁다면 얼마든지.
하지만 멋대로 성을 나가겠다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금 이렇게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벨라는 저도 모르게 성을 나갔을 것이 아닌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서서히 머리로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나갔다면, 다시 돌아오긴 했을까. 지금도 이리 저에게 마음을 닫고 열어 주지 않는데, 그대로 영영 자신이 찾을 수 없는 곳으로 떠나 버린다면.
어느새 그는 굳은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삽시간에 타오른 불안감이 재가 되어 욕망을 부추겼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안고 싶었다. 그 맑은 목소리로 오로지 저만 부르며 매달리도록.
그가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녀를 침대로 넘어트리는 동안, 벨라는 꿋꿋이 노트에 글씨를 적었다.
그는 제 앞에 노트가 내밀어져도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녀를 한 번 더 눈에 담고서야 노트로 시선을 내렸다.
[저는 단순히 시에나와 산책하러 가고 싶은 것뿐이에요. 그동안 성안은 충분히 돌아다녔으니까요. 그래도 제가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게 싫으세요?]
“…….”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상념이 모조리 쓸려 나갔다. 그는 노트가 거둬진 후에도 그 빈자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텅 비어 버린 속으로 또 다른 불안감이 자리를 꿰찼다. 그동안 그녀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자고 그토록 참고 노력했는데, 또다시 저도 모르는 사이 그녀에게 올가미를 씌우려 했을까 봐.
[화내셔도 돼요. 또 발목에 족쇄를 묶어 방 안에 가둬 두셔도 되고요. 정말 싫지만, 공작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다면 저는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처지니까요.]
동글동글한 글씨가 참으로 잔인했다. 고작 까만 글씨 몇 마디가 그동안 자신이 저질렀던 짓들을 모조리 꺼내 늘어놓았다.
“너 진짜…….”
벨라는 그 말이 진심인 듯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지금 그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저항하지 않을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이 순간, 그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것은 지금도 제 깊은 내면에서는 그녀의 날개를 꺾으라고 외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 악마를 외면하려 애썼다.
그는 제 것이 자신의 통제를 벗어나는 상황을 가장 싫어했다. 하지만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벨라가 그 벽을 가장 두려워한다면, 그리하여 자신에게서 달아나려 하는 것이라면 어떻게든 억누를 생각이었다.
벨리아르는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까슬한 음성으로 물었다.
“……하녀랑 둘만 나가겠다고.”
[공작님이랑은 싫어요.]
“…….”
말하기도 전에 거절당한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았다. 이참에 그녀와 오붓하게 산책이라도 다녀오려던 그의 꿈은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럼 허락해 주신 것으로 알고 다녀올게요.]
우습게도 다녀오겠다는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이 되었다.
그는 드레스를 들고 저를 지나쳐 가는 벨라의 손목을 붙잡아 세웠다. 하지만 그녀가 설핏 인상을 찌푸리자, 곧바로 손의 힘을 느슨하게 풀었다.
“에릭도 데려가.”
[산책하는데 감시가 붙는 건 싫어요.]
“감시가 아니라, 보호하려고 붙이는 거야.”
[그럼 차라리 다른 기사를 붙여 주세요.]
“로드릭을 붙여 줄까? 둘 중에 골라. 다른 기사는 내키지 않으니 이건 나도 양보 못 해. 네가 지금 가려는 곳은 성 밖이고, 거긴 네게 위험해.”
정확히 어딜 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성 밖이 위험하다는 건 분명 사실이었다. 벨라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지 잠시 고민하는 듯 눈을 굴렸다.
[그럼 에릭 경과 같이 갈게요. 대신, 제가 밖에서 무엇을 했는지 에릭 경께 묻지 않겠다고 약속해 주세요.]
“…….”
당연히 성 밖으로 나가는 거니 이후에 에릭에게 일과를 보고 받을 생각이었던 그는 또 한 번 말을 잃었다. 그녀는 항상 그가 하나를 내려놓으면 또 하나를 더 내려놓으라 종용했다.
[감시가 아니라면서요?]
“……알았어.”
[무엇을요?]
똑똑하게 정확한 답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교묘하게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는 긴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밖에서 무엇을 하고 다녔는지, 에릭에게 묻지 않을게. 약속해.”
[저 옷 갈아입어야 해요.]
그러고는 무언가를 잊었다는 듯 입 모양으로만 ‘아.’ 하더니 빠르게 글씨를 끄적였다.
[그리고, 앞으로 제 방에 들어오실 땐 꼭 노크를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는 결국 터져 나오는 헛웃음을 참지 못했다. 자신이 이 성에서 노크하고 들어가야 하는 방은 벨라의 침실이 유일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생각의 방향을 틀었다. 앞으로 꼭 노크하라는 말은 언제든지 찾아와도 된다는 말 아닌가? 그깟 노크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었다.
“오늘 내 잘못은 노크를 안 했다는 거지?”
그는 벨라가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하기도 전에 문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러다 순간 걸음을 멈추고는 나지막이 숨을 한번 내쉬었다.
그는 곧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던 벨라를 지나쳐 침대 옆 협탁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토끼 인형의 동그란 뒤통수에 닿았다.
이어 내내 벽을 보고 있던 토끼 인형을 앞으로 휙 돌려놓았다.
“얘가 서운해하잖아.”
벨라는 그가 나간 빈자리를 보며 잠시 황당함을 삼켜야 했다.
* * *
“마차를 준비할까요?”
“아니요. 멀리 가지 않을 거예요.”
벨라의 단호한 대답에 에릭은 더 이상 권하지 않았다. 그녀는 거대한 성문 앞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의 앞에선 당당한 척 굴었지만, 사실 성문을 제 발로 나선다는 건 그녀에겐 상당히 큰 의미였다.
조금 긴장한 탓인지 벨라는 성문을 나서 멀어질 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가장 먼저 깬 건 에릭이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대화 나누십시오.”
그는 정말 호위에만 집중하겠다는 듯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걸었다. 사뭇 딱딱하던 분위기에 틈이 생기자 시에나는 눈치껏 벨라에게 말을 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도시락도 싸 올 걸 그랬어요.”
“조금 멀리 갈 걸 그랬나?”
“저는 걷는 거 좋아해요. 아가씨께서 힘드실까 봐 걱정이죠.”
“나도 걷는 거 좋아해. 아마 내가 너보다 달리기도 잘할 거야.”
“에이, 저를 무시하시는 거예요? 제가 무려 일곱 살에 식당에서 빵을 훔쳤다구요. 물론, 잡히지 않았어요.”
“그럼 우리 달리기 시합이라도 해 볼까?”
“그거 좋은 생각인데요?”
“……아가씨.”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에릭이 결국 조용히 그녀를 불러 제지했다. 그러지 않으면 정말 여기서 둘이 달리기 시합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벨라와 시에나는 서로 눈을 맞추며 천진하게 웃었다. 이어 시에나에게 살짝 주의를 주려던 에릭은 그 생각을 잠시 접어 두었다.
“오랜만에 나오신 건데, 이렇게 산책만 하다가 가도 괜찮으세요?”
“응, 난 지금 아주 만족해. 내 발로 자유롭게 성을 빠져나왔잖아.”
“마을에 구경 가고 싶진 않으세요?”
“……예전엔 그랬는데, 지금은 딱히 관심 없어. 사람들은 날 반기지 않을 테니까. 나는 이제 더 이상 아프고 싶지 않아.”
벨라는 그 사실만으로 지금 매우 행복했다. 사실 이제 사람들과 섞이고 싶다거나 하는 소망은 희미해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굳이 그를 거스르며 성을 나오고 싶었던 이유는, 그저 자유로워지고 싶었기 때문이다.
분명 제겐 그의 울타리 안이 가장 안전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저를 가두는 감옥이 안온하다고 느낄 수는 없었다.
“맞아요. 꼭 사람들과 섞여야만 행복한 건 아니니까요. 저는 이렇게 아가씨와 숲길만 걸어도 정말 행복해요.”
“나도 그래.”
슬쩍 그녀의 눈치를 보던 시에나는 넌지시 다른 주제를 던졌다.
“아직도 공작님께는 말 안 하세요?”
그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에릭은 눈치껏 걷는 속도를 살짝 늦춰 거리를 벌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