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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65)화 (165/180)

165화

성이 지어진 후로 한 번도 주인을 맞은 적 없던 방에 드디어 주인이 생겼다.

벨리아르의 침실에서 반대편에 있는, 복도의 가장 끝 방. 성의 안주인을 위한 방이었다.

물론, 방의 주인이 된 벨라는 그 방이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처음엔 그와 같은 층에 있는 방을 쓰는 게 싫어 거부했지만, 그는 이곳이 가장 해가 잘 들고 창밖의 풍경이 멋지다는 말로 그녀를 구슬렸다. 물론,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벨라는 커튼을 열어 창밖의 풍경을 보자마자 시원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의 침실에서 보던 것보다 더욱 시야가 트여 있었고 정원의 모습도 훌륭했다.

방 안을 둘러보면 제 손으로 직접 고른 가구들이 이곳저곳에 놓여 있었다. 작은 장식품 하나까지, 모두 다.

처음 가져 보는 온전히 저만의 공간이었다. 정말이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벨라는 설레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창문을 살짝 열었다.

솔솔 불어오는 바람에 진정되긴커녕 조금 더 둥둥 떠 버렸다. 쓸데없이 날씨까지 좋은 한낮이었다.

저도 모르게 몸을 들썩이며 기분 좋음을 온몸으로 표현하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소렐 부인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었다.

“아가씨, 방이 마음에 드세요?”

벨라는 살짝 쑥스러운 듯 웃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너무 넓긴 한데……. 정말 좋아.”

“그렇게 좋으세요?”

“너무 좋아서 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냥…… 너무 좋아.”

소렐 부인은 나지막이 웃으며 그녀를 거울 앞 의자로 이끌었다.

“그럼 오늘은 머리를 반만 땋는 걸로 그 기쁨을 누려 볼까요?”

“아, 오늘은 그냥 편하게 묶어 줘. 최대한 움직이기 편하게.”

옛날보다 머리카락이 짧아져 관리하기 어렵지 않은데도 소렐 부인은 늘 그녀의 머리칼을 손수 빗겨 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음…….”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께는 말하지 않을 테니까요.”

요즘 벨리아르는 정말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일일이 알지 못했다.

에릭이 가끔 힌트를 주곤 했지만, 그가 먼저 사용인들을 붙잡고 그녀의 일과를 묻는 일은 없었다.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덕분에 벨라는 조금씩 행동반경을 넓혀 가며 성에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하고 싶은 건 최대한 해 보기로 했다.

“시에나랑 놀기로 했어.”

“시에나랑 논다고요?”

“응. 며칠 전부터 약속했던 거야.”

그러자 소렐 부인은 낮은 탄식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런……. 저는 시에나가 아가씨께 무슨 결례를 저지를까 너무 걱정된답니다. 이미 저지른 건 아니겠죠?”

결례……. 물론, 그동안 시에나와 급격히 가까워지며 남들에겐 말하지 못하는 비밀이 늘어나긴 했다.

삶은 달걀을 서로의 머리에 깨 보기도 하고, 시에나가 은밀히 가져온 외설적인 연애 소설을 함께 보며 웃기도 했다.

그 외에도 자잘한 일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지만, 벨라는 태연하게 웃으며 소렐 부인을 안심시켰다.

“그럴 리가. 시에나는 정말 착하고 다정해.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어.”

“아가씨, 물론 시에나는 착하고 다정한 아이가 맞아요. 하지만 늘 옳은 행동을 하진 않죠. 그 아이가 얼마나 사고뭉치인데요.”

소렐 부인은 그동안 시에나가 수도에서 얼마나 많은 사고를 쳤는지 아시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시에나가 없었다면 난 정말 힘들었을 거야.”

소렐 역시 시에나의 심성이 누구보다 착하다는 건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더 이상 말리진 않았다. 그저 벨리아르 공작의 눈에 띄어 잘못될까 걱정되는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무엇을 하고 놀기로 하셨는데요?”

“그건…… 비밀이야.”

사실대로 말했다간 분명 말릴 것이다. 소렐 부인의 가느다란 눈초리가 닿았음에도 벨라는 모르는 척 입을 꾹 다물었다.

“아가씨, 혹시 시에나가 같이 빨래를 하자거나 하는 무례한 말을 하면 무조건 혼을 내셔야 해요. 아시겠죠?”

“……내가 조금 도와줄 수는 있지 않을까?”

“아가씨!”

“농담이었어.”

벨라는 시에나와의 약속 장소를 최대한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정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 *

이 성에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피할 수 있겠지만, 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란 없었다.

어디선가 들리는 미세한 말소리에 그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정확히는 여인들의 웃음소리였다. 이 성에서는 거의 들을 일 없는 소리이기도 했다.

수도에서 데려온 하녀들이라고 하기엔 그들의 목소리는 그의 발목을 붙잡을 수 없었다.

갑자기 멈춰선 그를 보며 에릭이 의아한 듯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는 대답을 내어 주지 않은 채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무장에 들렀다 오는 길이라 원래는 집무실로 향하던 길이었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로 방향을 틀었다.

“벨라가 새로운 방을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는데.”

그가 자연스럽게 대화의 주제를 바꾸자, 에릭은 의문스러운 마음을 접어 두고 대답했다.

“좋아하실 겁니다. 며칠 전부터 계속 기대하셨으니까요.”

그가 향하는 방향 끝에는 성에서 잘 쓰지 않는 물품들을 모아 놓은 창고가 있었다. 그만큼 사용인들의 발길도 뜸하고 외진 곳이었다.

걸음을 뗄수록 어디선가 들려오는 말소리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에릭 역시 이제야 그 소리를 듣고는 살며시 미간을 좁혔다. 익숙한 목소리였다.

“벨라는 요즘 뭘 하고 다니지?”

예고 없이 날아온 물음에 에릭은 잠시 당황하여 대답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지금 그가 벨라의 근황을 물은 것과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의 주인, 그리고 그가 왜 뜬금없이 이런 곳으로 발길을 돌린 건지.

세 가지 포인트엔 아주 명확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가 일순 걸음을 멈추며 에릭을 향해 몸을 돌렸다.

“왜. 나도 우리 아가씨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정도는 궁금해할 수 있잖아.”

“제가 일부러 숨기려 한 것이 아니라, 저 역시 잘 모릅니다. 요즘 아가씨가 제게도 인사만 하고 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시거든요.”

그는 입꼬리를 끌어 올려 조용히 웃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서 이런 곳에 숨어 있나 본데.”

에릭이 대답하려 입을 벙긋거리는 순간, 그는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뜻을 내비쳤다.

가만히 소리를 죽이고 있으니 모퉁이 너머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조금 선명해졌다. 무언가 찰박거리는 소리도 함께였다.

“힘들진 않으세요?”

“응, 전혀. 너랑 같이하니까 놀이하는 것 같아서 재밌는데? 정말이야.”

“저도 그래요. 성에 오면 온전히 주방 일만 하면 되나 싶었는데……. 하녀장님은 제 몸이 세 개는 되는 줄 아시나 봐요.”

“그래도 소렐 부인이 너를 얼마나 예뻐하는데.”

분명 벨라의 목소리였다. 벨리아르와 에릭은 기척을 숨기고서 모퉁이를 넘어갔다.

창고 앞엔 벨라와 시에나가 커다란 나무통에 시트를 잔뜩 넣은 채 열심히 발로 치대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벨리아르의 표정이 점점 차갑게 굳었다.

“저를 예뻐한다고요? 어휴, 두 번 예뻐했다간 제 몸이 으스러지겠어요.”

“내가 자주 도와줄게.”

“아이참, 그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자주는 말고…… 가끔 한두 번씩……?”

“그래. 가끔 한두 번씩.”

앞으로도 저딴 짓거릴 계속하겠다는 소리였다. 그의 입에서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이 샜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언제는 주방에 가서 요리와 설거지를 했다질 않나, 이번엔 또 치마를 걷어붙이고선 맨다리를 훤히 드러낸 채 빨래를 하고 있다.

이러다간 더러운 걸레를 쥐고 바닥이라도 닦을 판이다. 아니지,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이미 저질렀을 수도 있는 일이다.

조용히 그의 화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에릭은 불안한 시선으로 벨라 쪽을 살펴보며 나직이 속삭였다.

“제가 가서 모셔 오겠습니다.”

곧장 튀어 나가려던 에릭을 그가 손을 뻗어 막아 세웠다. 이어 차갑게 얼어붙은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뭘 빤히 쳐다보고 있어. 눈 파내 버리기 전에 고개 숙여.”

“……죄송합니다.”

에릭은 곧장 제 실수를 깨달았다. 그가 지금 화가 난 이유가 단순히 벨라가 빨래를 하고 있다는 것뿐만이 아니라는 것을.

그럼에도 그는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고, 왔던 길로 걸음을 틀었다.

“안 가 보셔도 되겠습니까?”

“사내놈들은 이쪽으로 얼씬도 못 하게 해. 내 귀로 벨라가 저리 치마를 걷어 올린 채 빨래를 하더라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베른의 공작이 미친 나머지 이젠 기사들 눈깔까지 파내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질 테니까.”

에릭은 그 말이 단순히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 * *

벨라는 외출용 드레스 두 벌을 놓고서 깊은 고민에 잠겼다.

최대한 장식이 화려하지 않고 디자인이 단순한 것으로 골라 왔다. 일부러 눈에 띄지 않으려는 게 아니라, 그녀의 원래 취향이 이런 쪽이었다.

“나는 왜 매번 옷 고르는 일이 가장 힘들까.”

디자인은 비슷하고 색만 다른 건데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고 한참을 고민 중이었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시에나가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하지만, 그만큼 즐거운 고민도 없죠.”

“맞아. 그건 그래.”

평소엔 옷 고르는 데에 이리 심혈을 기울이진 않지만,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었다. 제 발로 성문 밖을 나간다고 생각하니 벌써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어 댔다.

“그럼 아가씨, 천천히 준비하고 계세요. 저는 주방에 다녀올게요. 아직 정리할 것들이 남아 있어서요.”

“응, 조심히 다녀와.”

시에나가 나간 뒤에도 그녀는 제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고민을 이어 나갔다.

사실 연보라색 드레스가 마음에 들긴 한데, 혹여 다른 사람을 마주칠까 봐 걱정되었다.

물론, 베른에서 제게 적대적으로 대할 사람이 거의 없으리라는 건 알지만……. 그래도 괜히 신경 쓰여 걱정을 놓기가 힘들었다.

그러던 중, 문이 다시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는 당연한 듯이 뒤를 돌아보며 입을 뗐다.

“왜? 뭐 놓고 간…….”

벨라는 말하면서도 순간 시에나는 절대 노크 없이 방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무리 다시 들어올 때라고 해도 말이다. 제 방에 노크 없이 들어올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벨라는 그를 보자마자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런 그녀에게 벨리아르는 나른히 인사를 건넸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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