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지금, 맞게 들은 걸까? 일순 멍해진 벨라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서 익숙한 감정을 찾아보려 해도 딱히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분노, 짜증, 그런 것들 말이다.
[진심이세요?]
“농담이길 바라?”
[아니요. 더 확실하게 말씀해 주세요.]
“네 방, 따로 내어 줄게. 그리고 앞으로는…… 내 허락 없이 방을 나가도 좋아. 네가 어딜 가고 무엇을 하는지 알려고 하지 않을게.”
멍하니 들어도 그 말뜻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차분하고 정확한 말투였다.
아직 실감은 나지 않았지만, 그에게 확답을 받고 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자유롭게 나가도 된다니. 그의 말을 곱씹을수록 서서히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벨라는 지금 당장 문밖으로 나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 펜을 움직였다.
[좋아요.]
“……그런데 벨라, 오해하지 말고 들어. 이건 정말 내가 너를 옭아매려는 게 아니라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말씀하세요.]
“방 밖으로 나갈 땐 하녀든 기사든 아무나 데리고 다니면 안 될까.”
[왜요?]
“나는 이제 네가 무엇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모를 거야. 그럼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른다는 거고. 그러니 믿을 만한 사람을 데리고 다녔으면 해. 네 안전을 위해서.”
그는 최대한 많은 것을 내려놓으려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에서 비롯된 불안까지 내려놓기엔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 모양이다.
[공작님, 저는 이 성안이 그 어느 곳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여기서 누가 저를 헤칠 수 있겠어요? 저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은 공작님뿐이에요.]
벨라가 이 성안이, 그의 울타리 안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게 한 것은 그였고 그는 절대 벨라를 죽일 수 없었다.
그는 조목조목 적힌 말을 보며 한숨 쉬듯 웃고 말았다.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글씨가 참 예쁘네. 문서 대필시켜도 되겠어.”
[허락해 주시면 그런 것도 해 보고 싶어요.]
그는 정말 벨라를 온종일 곁에 두고 대필을 시킬까 하다가 금방 마음을 접었다. 그녀의 손에서 펜이 닿는 부분이 이미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손 다쳐.”
다친다는 표현은 너무 과하고 그냥 굳은살이 조금 박이는 정도겠지만, 그의 눈엔 그 붉은 자국마저 매우 거슬렸다.
그녀 역시 새로운 일을 해 보고 싶긴 하지만, 굳이 그의 곁에 있고 싶진 않았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요리도 배워 보고 싶어요.]
“그건 안 돼.”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가 그녀를 보더니 짧은 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다시 부드러운 어투로 말을 덧붙였다.
“주방은 위험해. 칼도 있고 불도 쓸 테고. 이런 펜 하나 바꿔 주는 것과는 다른 일이야.”
[그렇게 따지면 주방이 아니더라도 위험한 곳은 많아요. 당장 저기 이불로도 목을 맬 수 있지 않을까요?]
침대 위의 이불을 한번 본 그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표정을 굳혔다.
“……벨라.”
[물론,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어요. 그냥 예시였어요.]
그 역시 머리로는 이 성안에서 그녀가 위험에 빠질 일이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가장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벨라였다.
그는 그녀를 죽일 수 없지만, 벨라는 얼마든지 스스로를 죽일 수 있으니까.
“……솔직히 말할게. 나는 아직 너를 믿지 못하겠어. 단순히 내 통제를 벗어나겠다는 건 어떻게든 참겠지만, 나는 네가 또 그런 선택을 할까 봐 너무 불안해. 그 불안을 도저히 덮어놓을 수가 없어.”
[저는 요즘 하고 싶은 게 정말 많아졌어요. 그런데 이 방에서 공작님과 단둘이 있기만 하면 숨이 막혀요. 여전히 깊은 바닷속에 가라앉은 것처럼요.]
글씨를 하나하나 짚어 내려가는 눈동자가 희미하게 흔들렸다. 그의 표정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여전히 나 때문에 죽고 싶어?”
[공작님께서 달라지신다면 제가 그런 선택을 할 일은 없을 거예요. 저 역시 약속할게요.]
그는 노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방금 쓴 부분을 찢어 냈다. 그러고는 큰 손으로 작은 종이를 접으며 물었다.
“……지금은 어때.”
그는 지금 자신이 보여 준 태도에 대해서 묻는 것이었다. 부드럽게 대화를 청하고, 최대한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려는 노력 말이다.
[좋았어요.]
그는 고이 접은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노력할게.”
그 말을 끝으로 둘의 대화는 순조롭게 마무리되었다. 그는 책상으로 돌아가더니 서류를 챙겨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가고 난 뒤에도 그의 목소리가 밤새 귓가를 맴돌았다.
노력할게.
그것은 선전 포고였다.
* * *
“가구는 모두 아가씨께서 직접 고르셨고, 제작에는 이 주 정도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그전에 당장 필요한 것들은 임시로 들여놓아 불편해하실 일 없도록 처리했습니다.”
앞으로 그녀의 일과는 보고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기에 에릭이 해야 할 말은 평소보다 훨씬 짧았다.
그는 버릇처럼 벨라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려다가 긴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누군가 제 입에 재갈을 물려 놓은 것도 아닌데 도통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는 답답한 마음을 억누르려 지그시 눈을 감고서 의자에 몸을 기댔다.
“할 말 끝났으면 나가 봐.”
에릭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넌지시 이야깃거리를 던졌다. 반드시 해야 할 보고는 끝이었고, 지금부터는 그냥 소소한 잡담에 불과했다.
“어제 아가씨께서 하녀와 호박파이를 만드신다길래 따라가 보았습니다.”
“…….”
아니나 다를까. 그는 ‘아가씨’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주인님께서 시키지 않은 일이라는 것도 명확히 밝혔습니다. 저도 그냥 할 일이 없던 차에 궁금해서 따라가 본 겁니다.”
할 일이 없어서. 참 성의 없는 핑계였다. 그냥 궁금했다고만 할 것이지.
가문의 군사적인 일들은 모두 로드릭이 처리하고 있으나, 그 외의 것들은 모조리 벨리아르와 에릭의 몫이었다.
그는 다른 귀족에 비해선 상당히 일을 성실히 하는 편이었지만 에릭 외에 가신을 두진 않았다. 쓸데없이 통제선을 넓히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 말인즉, 에릭이 소화하고 있는 업무량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할 일이 없어 벨라를 따라갔다는 건 정말 터무니없는 헛소리였다.
그는 조소를 머금은 채 나른히 맞받아쳤다.
“앞으로 네가 할 일을 다 없애 버리는 것도 좋은 생각 같네.”
“생각보다 재밌었습니다. 저번에 눈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눈치챘지만…… 아가씨께선 손재주가 없으십니다.”
그는 제 검에 달린 매듭 장식에 눈길을 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아주 오래전부터 손재주가 없었다. 벨리아르는 가볍게 웃으며 허리를 세웠다.
“오랜만에 너와 이런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것도 좋지. 계속해 봐.”
그는 태연하게 서류를 훑어보며 에릭의 말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이건 벨라의 일과를 보고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벼운 담소일 뿐이라고, 분명히 되새기며.
“직접 호박을 따러 가셨는데 그건 제법 능숙하게 하시더군요. 호박이 몸통만 하다는 얘기로 하녀와 한참을 웃으셨습니다.”
첫마디를 듣자마자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서류가 조금 구겨졌다. 그는 여전히 서류에 눈길을 고정한 채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아아. 벨라가 직접 호박을 땄구나. 그래, 재밌었겠네.”
“그리고 별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재료를 손질하시다가 칼에 손을 조금 베였을…….”
그는 에릭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의사는. 치료는 했어? 피는 얼마나 났는데. 그런 일이 있었으면 당장 보고했었어야지!”
그답지 않게 언성이 높아졌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방으로 쫓아갈 기세라 에릭은 다급히 입을 뗐다.
“주인님, 조금만 진정하십시오. 살짝, 아주 살짝 베인 것뿐입니다. 피도 거의 나지 않아서 지혈할 정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말해도 그는 쉽사리 감정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살벌한 눈빛이 저를 향하자 에릭은 최후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지금 찾아가시면 아가씨께서 싫어할 겁니다.”
그 말에 잠시 멈칫거린 그는 이내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답답한 듯 창문 너머 탁 트인 풍경으로 눈길을 한번 주고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호박파이는 제대로 만들었어?”
“호박파이는 망했습니다. 온도 조절을 잘못해서 다 타 버렸거든요. 그래도 아가씨는 정말 즐거워하셨습니다. 호박을 써는 것도 재밌어하시던데요. 설거지도 능숙하게 하시고. ……하지만, 그릇은 하나 깨셨습니다.”
단 한 순간도 방심할 틈이 없었다. 잘 가다가 그녀가 설거지를 했다는 말에 그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설거지…….”
과거와 현재는 많은 것이 달라졌다.
과거엔 제국이 없었고, 벨리아르와 벨라는 둘만 존재하는 숲속에서 자유롭게 살았다.
하지만 현재의 그는 누구보다 높은 권력을 손에 쥔 사람이었다. 사용인을 부리는 것에 익숙했고, 허드렛일과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더 이상 그녀가 손수 더러운 접시를 닦고 있을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다. 찬물에 손을 불려 가며 그딴 일이나 하라고 곁에 두는 것이 아니었다.
설거지를 하는 벨라의 모습이 멋대로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는 다시 의자에 몸을 묻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고는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손에 꼭 쥐었다. 화를 가라앉히려는 다분한 노력이었다.
“벨라가 아주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야. 나를 시험하려고 일부러 그러는 거겠지.”
“그래도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아가씨께서 역시 요리는 저와 잘 맞지 않으시다며, 그냥 하녀가 해 주는 걸 맛있게 먹겠다고 하셨거든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그는 지금 벨라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