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똑똑.
그때, 들려온 노크 소리가 날카롭게 상념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가씨, 저예요.”
“응, 들어와.”
시에나가 트롤리를 끌고 들어오자 달콤한 냄새가 뒤따랐다. 그녀는 가장 먼저 벨라의 손에 들린 책을 보곤 활기찬 목소리로 말을 붙였다.
“책 읽고 계셨어요? 무슨 책이에요?”
“이거.”
책 표지를 보여 주니 시에나는 당연히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화 책 읽고 계셨군요. 그거 재밌지 않아요? 아, 거기에 공작님 가문과 이름이 같은 신도 나오잖아요.”
“응, 봤어.”
“그것 때문에 공작님에 관한 소문이 더욱 시끄럽긴 하죠. 공작님께서 오랜 시간 젊음을 유지하시는 이유가 그 추방당한 신의 현신이라서 그렇다고…….”
시에나는 뒤늦게 그녀의 어두워진 표정을 보곤 다급히 입을 다물었다. 게다가 상태도 영 엉망이었다. 눈이 퉁퉁 부은 데다 눈가가 짓물러 발갛게 번져 있었다.
벨라는 버릇처럼 눈을 비비다가 따가운 통증에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시에나는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는 대신, 재빨리 호박파이를 테이블 위로 올려놓았다.
“아가씨! 호박파이예요! 무려 제가 직접 만든!”
시에나가 새벽부터 일어나 정성스럽게 만든 호박파이는 단박에 그녀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먹음직스러운 주황빛으로 반들반들한데다 하얀 크림을 꽃처럼 장식하기까지 해, 먹기 아까울 정도였다. 벨라는 순간 파이를 감상하는 데에 정신을 빼앗겼다.
“정말 네가 만든 거야? 모양이 너무 예쁜데?”
“그거 칭찬이죠?”
“당연하지! 와……. 정말 먹기 아까울 정도로 예뻐. 디저트 가게 열어도 되겠는걸.”
그 말에 시에나는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그럼 돈 모아서 나중에 디저트 가게를 열까요?”
“나, 매일 갈 거야.”
“특별히 아가씨는 평생 공짜로 해 드릴게요.”
능청스러운 답변에 벨라는 오랜만에 기분 좋은 웃음을 터트렸다. 시에나는 그 틈을 타 포크를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얼른 드셔 보세요!”
벨라는 호박파이의 모양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장식이 없는 부분만 살짝 떠서 맛보았다. 한입 먹자마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수도에서 먹었던 맛과 비슷하긴 한데, 그것보다 조금 더 달고 부드러웠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벨라는 조금 달게 먹는 것을 좋아했다. 그에게 홧김에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했던 건 한 치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았던 것이다.
살짝 긴장된 얼굴로 그녀의 반응을 살피던 시에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뗐다.
“어때요?”
“너무 맛있어. 이거 진짜 네가 만든 거야? 내가 먹어 본 것 중에 제일 맛있어!”
시에나는 그제야 긴장했던 마음을 내려놓고 살짝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요. 호박 따는 것부터 모조리 제가 다 한 거라구요.”
“정말 대단하다. 이런 건 대체 어떻게 만드는 거야?”
숲에 살았을 때 아무리 무언가 만들어 보려고 해도 마음처럼 잘되지 않았다. 어차피 혼자 해서 혼자 먹는 거니 맛과 모양을 그리 신경 쓰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예쁜 디저트들을 보면 묘하게 욕심이 생겼다.
이젠 더 이상 하고 싶은 일을 참고 싶지 않아졌다. 요리 하나 해 보려는 것뿐인데도 그의 눈치를 봐야 하는 제 처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벨라는 곧이어 무언가를 결심했다.
“……저, 시에나.”
“네?”
“나도 이거 만들어 보고 싶은데.”
“……네?”
“혹시, 시간 되면 내게도 만드는 법을 알려 줄 수 있을까?”
“……네에? 아, 아니……. 아가씨께서 직접 호박파이를 만드시겠다고요?”
그녀가 한마디 할 때마다 시에나의 눈과 입이 더욱 크게 벌어졌다. 결국 잔뜩 놀란 얼굴로 되묻는 모습에 벨라는 살짝 시무룩해진 모습으로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역시, 너무 어려울까?”
그런 뜻으로 놀란 게 아니었던 시에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당연히 아가씨께서는 정말 잘하실 거예요! 저도 아가씨랑 같이 만들면 정말 좋을 거구요! 하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라…….”
공작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실 텐데…….
곤란해하는 시에나의 얼굴로 그 고민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벨라 역시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문제라 선뜻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음…….”
어제 그렇게 화를 냈으니 당장 이런 말을 꺼내기엔 조금 곤란하고……. 굳이 그에게 말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단순히 요리를 배워 보겠다는 것뿐인데.
그냥 하고 싶은 대로 움직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혹시 시에나에게 불똥이 튈까 걱정이었다.
시에나는 고민에 잠긴 그녀의 손을 살며시 붙잡았다.
“아가씨, 저는 언제든 아가씨와 호박파이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어요. 다음에 꼭 같이 만들어요.”
지금 당장 하지 않아도 되니 천천히 생각해 보자는 말이었다. 그 말에 벨라는 편안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호박은 내가 딸게. 나 그런 거 잘해.”
‘네? 어떻게 아가씨께 그런 일을!’이라고 외치려던 시에나는 한껏 들뜬 벨라의 표정을 보곤 그저 웃고 말았다.
* * *
그는 조금 달라졌다. 남들이 들었다면 코웃음 칠 만한 변화였으나, 그 작은 변화가 더없이 크게 보일 만큼 그는 아주 오만한 남자였다.
아침에 나간 후로 내내 모습을 보이지 않던 그는 저녁 식사 때가 되어서야 방으로 돌아왔다. 고요한 침묵 속에서 그녀의 식사가 준비되었고, 벨라는 여느 때처럼 포크를 들었다.
음식을 물끄러미 보기만 하던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언가를 먹을 기분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그가 원하는 대로 얌전히 식사하고 싶지 않았다.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있으니 예상했던 대로 그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또 의미 없는 실랑이가 이어질 것은 안 봐도 뻔한 일이었다.
그는 벨라에게 다가와 테이블 위의 음식들을 훑었다. 벨라는 애꿎은 음식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그를 외면했다.
이어 그가 손을 뻗자, 벨라는 고개를 돌리며 눈을 감아 버렸다. 이만하면 그의 성질치곤 많이 참았지. 곧장 거친 손길이 저를 덮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벨라를 건들지 않았다. 그녀가 꽉 쥐고 있던 포크를 빼 테이블 위로 올려놨을 뿐.
“먹기 싫으면 그만 먹어도 돼.”
차분한 목소리에 벨라는 살며시 눈을 떴다. 고개를 돌린 곳엔 낯선 모습의 그가 있었다. 그는 평소 느낌과 조금 달랐다. 조금…….
“졸리면 지금 자도 되고, 심심하면 소파에 앉아서 책을 읽어도 돼. 침대도 상관없고.”
벨라는 경계 어린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부드러운 말투 안에 또 어떤 분노를 감추고 있을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녀는 버릇처럼 그가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 파악하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그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아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아니, 오히려 그가 그녀를 올려다보는 모양새였다.
“나와 대화해 줬으면 좋겠어.”
“…….”
벨라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번엔 일부러 침묵한 것이 아니라, 정말 머릿속이 멍해져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낯설고 이상했다. 지금 그가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고작 자신과 대화를 나누겠다고 이리 부드러운 태도를 보이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평소라면 그는 저를 앉혀 두고 강압적으로 지시했을 테다. 벨라, 뭐가 문제인지 말해. 라고.
그녀는 지금 제가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살며시 손끝을 꼬집어 보았다. 살짝 느껴지는 아픔은 눈앞의 그와 같이 아주 선명했다.
“말로 하지 않아도 돼.”
그는 안쪽 주머니에서 얇은 펜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다. 뭉툭한 모양새의 이상한 펜이 아니라, 평범한 펜이었다.
“벨라, 이 펜으론 널 죽일 수 없어. 그러려면 아주 괴로울 거고, 그전에 내가 막을 거야. 네가 다치는 일은 없어.”
그것은 아주 부드럽고 친절한 경고였다. 또는 스스로에게 하는 다짐이거나.
그녀는 짧게 심호흡을 하곤 노트를 집어 들었다.
확실히 끝이 뭉툭한 펜보단 얇은 것이 더욱 편하고 마음에 들었다. 벨라는 아주 살짝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의 대화를 받아들였다.
[의자에 앉으세요. 대화하고 싶으시다면서요.]
그가 의자에 앉자, 벨라 역시 자세를 살짝 고쳐 앉았다. 잠시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동안 그는 할 말을 골랐고, 벨라는 지금 느껴지는 어색한 기분의 원인을 찾으려 했다.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그저 그와의 위치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늘 저를 내려다보던 그는 지금 제 앞에서 고개를 살짝 떨구고 있었다. 벨라는 뒤늦게 그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나는, 네가 그렇게 힘들어하는 줄 몰랐어. 사실 지금도 네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해. 그러니까 알려 줘. 알려 주면 고칠게.”
여전히 그의 앞에선 말하는 것이 조금 불편했다. 일부러 침묵하는 것도 있지만, 아직도 가끔 그의 눈을 마주하면 누군가 틀어쥔 듯 목이 막히곤 했다.
벨라는 차분히 노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먼저 알려 달라고 한 건 그였으니 더 이상 속마음을 숨길 이유는 없었다.
[공작님과 한 공간에 있는 게 불편해요.]
“…….”
[제 방을 따로 내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도 저만의 시간이 필요해요.]
“한 번도 건들지 않았잖아.”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공작님이 계속 지켜보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편하게 행동할 수 있겠어요. 숨쉬기도 불편하단 말이에요.]
“……그리고 다른 건.”
[방 밖도 자유롭게 나가고 싶어요.]
“나는 너를 가둬 둔 적이 없어. 산책하고 싶으면 언제든 해도 돼.”
[에릭 경 없이요. 아무도 없이 저 혼자. 그리고 제가 나가는 걸 공작님께서 모르셨으면 좋겠어요.]
“…….”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칼을 한번 쓸어 올린 그는 노트 위의 글씨와 한참이나 눈싸움을 벌였다.
역시. 그녀가 체념하며 다시 펜을 움직이려는 순간, 그가 살며시 손을 붙잡았다.
“……알았어. 그렇게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