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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62)화 (162/180)

162화

기어코 길었던 밤이 지나갔다.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 거라고 끊임없이 저를 다독였지만, 끝내 멍한 정신으로 밤을 지새우고 말았다. 옅게나마 잠들긴 했는데 대부분 상념에서 비롯된 꿈에 시달렸다.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빛이 스며들 무렵부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방에 멋대로 드나드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이후로 그는 기척을 내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집중하니 그의 인기척이 아주 미세하게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여덟 번. 그는 새벽 동이 틀 무렵부터 해가 훤히 밝아 오를 때까지 무려 여덟 번을 기웃거렸다.

덕분에 어느 순간부턴 완전히 잠이 깨 버린 탓에 자는 척하는 것도 꽤 고역이었다. 벨라는 그의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필사적으로 무시하며 시에나의 호박파이를 떠올렸다.

그녀가 밤을 지새우는 동안 그 역시 편안한 시간을 보내진 못했다. 어젯밤 단단히 충격을 받은 그는 복도에서 긴 새벽을 보냈다. 그러다 이른 아침이 되어서야 조심스럽게 방으로 들어온 것이다.

벨라가 자는 척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평소처럼 손을 뻗거나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결국 불편함을 견디지 못한 그녀가 살짝 뒤척였을 때가 되어서야 그는 침대에 살며시 걸터앉았다. 이어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

“……배는 안 고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리는 행동에 선연한 짜증이 묻어 있었다. 일순 머리로 열이 올랐지만, 그는 필사적으로 제 잘못을 되새겼다.

“말하기 싫어?”

당연한 침묵이 뒤따랐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불룩 솟은 이불의 능선을 짧게 훑고는 협탁 위로 손을 뻗었다. 노트와 펜을 집던 그가 잠시 멈칫거렸다.

“이 뭉툭한 펜이요! 이거 진짜 불편하고 짜증 나요. 그리고 나무로 만든 포크도 너무 싫어요! 저렇게 바깥이 듬성듬성 보이는 창문도 지긋지긋하고요, 이 나무 테이블도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살짝 올랐던 화가 언제 그랬냐는 듯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착잡한 숨을 삼키며 그녀의 머리맡에 노트와 펜을 놔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이불 속에서 작은 손이 쑥 삐져나와 노트와 펜을 차례로 가져갔다.

그는 사각사각 펜이 움직이는 소리를 들으며 그래도 글씨로는 써 주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직도 머릿속에선 그녀가 울며 원망하는 목소리가 선연히 맴돌았다.

[시에나랑 식사할 거니까 나가 주세요.]

시에나가 누구였더라.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매일 아침 그녀와 함께 식사하는 하녀의 이름이라는 것을 눈치로 짐작했다.

매일 낮에 벨라가 식사는 잘했는지 보고 받지만, 얼굴을 들여다보거나 한 적은 없었기에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았다.

그깟 하녀와 매일 아침 식사를 같이한다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그나마 살이 더 빠지지는 않으니 계속 그 하녀가 아침 식사를 담당하도록 지시했다.

버릇처럼 ‘오후에 올게’라고 말하려던 그는 또 한 번 멈칫거렸다.

“그리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시에나가 찾아오는 것도 싫고, 똑같은 시간에 에릭 경이랑 산책하는 것도 싫어요! 모조리 공작님께서 정해준 대로 움직이는 건 이제 정말…… 너무 싫다고요!”

“…….”

그는 입안 가득 차오른 험한 말들을 깊은 한숨에 흘려보냈다. 모조리 저를 향한 욕이었다.

결국 그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가 나간 후, 한참을 이불속에 웅크려 있던 벨라는 주변에서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자 살며시 이불을 끌어 내렸다.

고요한 방 안을 둘러보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걸렸다. 여태 그가 주었던 책들이 꽂혀 있는 책장이었다.

벨라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그 앞으로 다가갔다. 몇 가지 안 되는 책 중에서 유독 한 제목이 눈길을 잡아끌었다.

[카비나시아 대륙의 신화]

예전에 조금 읽다가 덮어 두었던 그 책이었다. 벨라는 그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문을 흘긋 살폈다.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살며시 책을 꺼내 펼쳐 보았다.

* * *

아무리 생각해 봐도 도출되는 결과는 하나였다.

벨라는 지금 제게 단단히 화가 났다는 것.

제 마음을 설명해 줘야 할 것 같아 과거의 일까지 모두 말해 주었으나, 벨라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더 화가 난 모습이었다.

도저히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문제 앞에서 그는 결국 두 손에 이마를 묻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예?”

보고를 마친 뒤, 가만히 그의 대답을 기다리던 에릭이 당황스러운 얼굴로 되물었다.

그는 그제야 잊고 있던 에릭의 존재를 상기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벨라 외에 다른 것이 파고들 틈이라곤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못 들었어. 다시 말해.”

“……주인님.”

“왜.”

“이미 세 번째 보고드렸습니다.”

에릭은 자신이 앵무새가 되는 건 상관없지만, 제 주인이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건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누가 봐도 그는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

“……오늘은 됐으니 나가 봐. 벨라에게도 갈 필요 없어.”

“어제 아가씨와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그를 이렇게 흔들어 놓는 사람은 에릭이 아는 한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기어코 벨라의 이야기를 꺼내니 그의 이마에 옅게 주름이 잡혔다.

“아가씨께서 말씀을 안 하시는 것 때문에 그러십니까?”

“……아니. 말을 너무 잘해서. 해도 너무 잘해서.”

에릭은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동안 말할 수 있으면서도 그에게만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있었는데, 그럼 어제 드디어 목소리를 들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런데 그의 상태가 이렇다는 건…….

“……대체 무슨 말을 들으셨길래 그러십니까?”

그는 멍하니 어딘가를 응시하며 짧은 숨을 내뱉었다.

“내가 벨라를 사랑해.”

“예,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 아니잖아.”

“예, 전혀요.”

정말 하나도 놀랍지 않은 사실이라 에릭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답했다.

“근데, 왜…….”

“……아가씨께도 사랑한다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러자 그는 스스로를 비웃듯 헛웃음을 내비쳤다.

“내 마음을 부정하던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어젯밤 둘 사이에 무언가 대단한 말들이 오고 갔다는 건 확실해 보였다.

에릭은 지금 당장은 둘 사이가 더 악화되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이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선 걸음을 떼야 하는 법이다. 비록 내디딜 때마다 푹푹 빠지는 늪이더라도.

그 말은 언젠가 그가 에릭에게 해 주었던 말이었다.

“주인님께선 아가씨를 충분히 사랑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건 분명합니다. ……제가 보기엔 조금 잘못된 방식인 것 같기도 하고요.”

“그래, 그러니까 네가 벨라가 도망치도록 도왔겠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녀는 분명 그를 마음을 품고 있었다. 에릭은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고 믿었다.

그 마음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역시 알 것 같기도 했지만, 어차피 지나가 버린 일들이었다. 중요한 건 현재였다.

“아가씨는 주인님이 싫으신 게 아니라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아서 주인님의 마음을 믿기 두려운 것 아닐까요? 그러니 이제부턴 주인님께서 성격을 조금 죽이시고…… 다시 아가씨의 마음을 얻는 것부터 시작하시는 게 어떨까 합니다.”

“그래서, 그 마음을 얻는 방법이 뭔데.”

“…….”

술술 말을 내뱉던 에릭의 입이 딱 다물렸다. 내내 당당하던 눈빛 역시 기세가 조금 사그라들었다.

“……주인님께서 모르시는데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뭐?”

“주인님께선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지만, 여인의 마음을 얻는 방법 같은 건 알려 주신 적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여태까지…….”

뻔뻔하게도 저를 원망하는 태도에 그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하도 어이가 없어 한마디 해 주고 싶었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라 저 역시 할 말이 없었다.

“우선, 차분히 대화를 나눠 보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지금 주인님께선 아가씨의 마음을 몰라서 그러시니, 있는 그대로 말하고 물어보는 겁니다. 단, 화내시면 안 됩니다.”

끝말에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누가 들으면 매사에 화만 내고 다니는 사람인 줄 알겠네.

그는 냉랭한 시선으로 에릭을 꿰뚫었다.

“내가 언제 화를 냈어.”

“……저는 지금 주인님께서 화내는 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특히 아가씨께서는 겁이 많으니 더 조심하셔야 하고요. 최대한 말투도 부드럽게 하시고, 최대한 아가씨의 말을 들어 주세요.”

……여기서 얼마나 더.

그는 전날 저를 쏘아보며 또박또박 소리치던 벨라의 모습을 다시 한번 떠올리곤 조소를 내비쳤다.

이젠 그 겁마저도 사라진 것 같은데.

“알았으니까 나가 봐.”

에릭이 나가자 그의 고민은 다른 길로 들어섰다.

그래,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벨라의 마음을 얻는 것부터 시작하자는 것은 좋은 생각이다.

하지만 그에겐 조금 이해하기 힘든 것들이 있었다.

최대한 부드럽고, 친절하게…….

저는 여태까지도 충분히 제 성질을 죽이고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벨라는 제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소리쳤다.

벨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사실을 그가 받아들이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 *

그가 깊은 고뇌에 빠져 있을 무렵, 벨라는 빼곡한 글자를 읽어 내려가며 천천히 책장을 넘겼다.

신화의 내용에 깊이 빠져들수록 그가 말해 주었던 일들이 차례차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어쩌면…….’

사람들이 지어낸 허구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딘가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장이 넘어갈수록 더욱 깊은 구렁텅이로 빠지는 느낌이었다. 머릿속이 더없이 혼란스럽고 어지러웠다.

문득, 그의 이름이 궁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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