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그녀는 놓으면 그대로 부서져 내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서럽게 삼키는 울음소리가 사정없이 그를 할퀴었다.
“……너를 지키고 싶어서 그랬어. 네가 내 곁을 떠나는 게 너무 두려워서.”
그 말에 벨라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공작님은 지금 착각하시는 거예요. 제가 곁을 떠나는 게 두려운 게 아니라, 하찮은 제가 공작님 뜻에 반하는 게 화가 나시는 것뿐이라고요.”
벨라는 저를 안고 있던 그를 확 밀어냈다. 눈물로 잔뜩 어그러진 시야에 그의 모습이 흐릿했다. 그녀는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노려봤다.
“저는 공작님께 보기 좋은 인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어요. ……제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리셨다면, 저를 그렇게 이용하셨으면 안 됐어요. 저를 그렇게…….”
벨라는 결국 끝까지 말을 잇지 못하고 양손에 고개를 묻었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다고 여기며 묻어 놓았던 것들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말았다.
“명분이 필요해서.”
“……명분이요?”
“그래. 레오니스가 반역을 꾀하려는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보였고, 그 일을 내가 나서서 정리하려면 그럴 명분이 필요했어.”
그는 저를 이용했다고 스스럼없이 말했다. 그게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한 얼굴로. 물론, 그것엔 문제가 없었다. 그는 마땅히 자신이 가진 것을 이용했을 뿐이니까.
하지만 그가 이용한 것이 제 마음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무참히 버려질 줄도 모르고 선뜻 마음을 건네 버린 자신이 너무 밉고 한심했다.
“벨라, 내가 원하는 건 네가 아니야.”
그는 아마 모를 것이다. 저를 안은 후 토해 내듯 내뱉은 그 말이 제 가슴속에 얼마나 지독하게 박혀 있는지.
그땐 그 말이 무슨 뜻인 줄도 모른 채 막연히 아파했다. 하지만, 후에 엘리아스에게 그의 과거를 듣고 난 다음에야 그 말뜻이 무엇이었는지 깨달았다.
“그가 진심으로 사랑했던 건 오로지 옛 연인뿐이에요. 당신은 그 대용품일 뿐이고.”
그는 처음부터 저를 한순간도 온전히 대한 적 없었다. 제게 소유욕을 내비치는 것도, 지금 이리 다정한 척 구는 것도, 모두 저를 향한 마음이 아니었다.
“……공작님께서 안 계실 때, 어떤 남자가 가끔 찾아왔었어요. 제게 엽서를 주었던 엘리아스라는 남자요.”
“알고 있어.”
“그 사람한테 공작님 과거 얘기도 모두 들었어요. 누굴 사랑했었는지, 어떻게 헤어졌는지, 그리고…… 저를 왜 살려 두셨는지.”
가만히 말을 듣던 그가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그래서, 네가 그 여자와 닮았기 때문에 지금 내가 이러고 있다고 생각해?”
“……사실이잖아요. 그래서 프리스틴 황녀도…….”
“벨라.”
나직이 부르는 목소리에 뒷말이 파묻혔다. 벨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꽂았다.
“내가 다 얘기해 줄게. 그러니까, 그놈한테 들었던 이야기는 잊어. 그놈은 우리가…….”
“듣고 싶지 않아요.”
“아니. 너는 들어야 해. 내가 너를 통해 누구를 보고 있는지 정확히 알아야지.”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차피 우리의 관계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벨라는 그 다짐을 곱씹으며 그에게 시선을 두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묵묵히 말을 이었다.
“엘리아스는 내 형제야.”
그 말에 언젠가 읽었던 책의 한 부분이 스쳐 지나갔다.
[태초에 여신 타라는, 생명의 대지에서 빛과 어둠을 창조했다. 둘은 이름처럼 태생부터 근본이 달랐다.
빛은 운명을 관장하는 테리테스로부터, 어둠은 주신 세딘으로부터 생명을 받았다.
타라는 두 존재를 공평히 사랑했기에 아끼는 이름을 나눠 주었다. 빛은 엘리아스, 어둠은 벨리아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