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이제는 시에나와 아침 식사를 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되어 버렸다.
“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저 인형은 왜 벌을 서고 있는 거예요?”
시에나는 샐러드를 우물거리며 토끼 인형을 가리켰다. 벨라는 시에나의 손끝에 걸린 인형에 한번 눈길을 주곤 다시 포크를 움직였다.
포크를 들어 올리니 콕 찍혔던 채소가 힘없이 툭 떨어져 내렸다. 벨라는 짧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채소를 쿡쿡 찍었다.
“……나는 이 나무로 만든 포크가 정말 싫어. 뭉툭해서 잘 찍히지도 않고.”
“……포크가 마음에 안 드셔서…… 토끼가 벌을 서고 있다는 말씀이시죠?”
“응.”
너무 태연한 대답에 시에나는 눈만 데구루루 굴렸다. 조금, 아니, 많이 당황스러워 보이는 얼굴이었다.
그사이 벨라는 불퉁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곤 또 한 번 불만을 내뱉었다.
“나는 도대체 여기가 숲속인지 성안인지 모르겠어.”
“아가씨, 전 도저히 포크와 토끼가 무슨 관계인지 모르겠어요.”
시에나가 눈썹을 기울이며 말하자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곤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렇지? 나 요즘 이상한 것 같아.”
“왜요?”
“처음엔 저 인형이 마음에 안 들었어. 근데…… 마음에 안 드는 게 자꾸 늘어나. 밥 먹을 때마다 이 포크도 불편하고……. 침대에 앉아서 정원을 좀 보고 싶은데 저렇게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잖아.”
벨라는 저도 모르는 사이 철저히 그에게 길들어 있었다. 옷도 그가 골라 주는 것으로만 입었고, 먹는 메뉴를 선택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 지내고 있는 방 안에 있는 것들 역시 모조리 그가 선택하고 그가 허락한 것들이었다. 제 것이 아니니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점점 취향 없는 삶에 물들다 보니 지금의 이런 감정들이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하나하나 다 마음에 들지 않으니, 오히려 자신이 못된 사람이 된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나는 정말 쓸데없이 까탈스럽기만 한 사람이구나. 그러니 사랑 받지 못하지.
단순히 포크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고 가려진 창문이 거슬렸을 뿐인데. 늘어 가는 불만들이 발목을 잡고 자꾸만 아래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는 게 늘어나서 아가씨가 이상해지신 것 같다는 거예요?”
“너도 내가 이상하지? ……대체 왜 이럴까.”
벨라가 한숨을 푹 내쉬며 한탄하자 시에나는 포크를 탁 내려놓았다. 둘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테이블 매너란 없었다.
“아가씨, 사람이라면 불만이 있는 게 당연하죠. 저도 사소한 거 하나하나에 얼마나 불만이 많은데요! 이 원피스도 너무 불편해서 하루에 몇 번씩 치맛단을 찢어 버리고 싶다니까요. 제가 가지고 있는 불만들을 모두 말하면 아마 아가씨 귀에서 피가 날지도 몰라요.”
“……그래?”
“네! 불만이 없는 사람이 되레 이상한 거예요. 그러니까 전의 아가씨는 조금 이상했었다고 말할 수 있죠.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아닌데요? 아주 지극히 정상이에요.”
“음, 하지만…….”
“오히려 그런 걸 걱정하는 게 더 이상하다구요.”
그런가. 시에나의 말에 조금은 안심이 되었지만 찰나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저를 갉아먹는 것들은 아무리 눌러도 끊임없이 고개를 들었다.
“아가씨, 혹시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세요?”
“음……. 먹고 싶은 건 잘 모르겠는데, 가끔 수도에서 먹었던 호박파이가 생각나긴 해.”
“좋아요! 그럼 내일 아침 메뉴는 호박파이로 할까요?”
“괜찮을까?”
“당연히 괜찮죠! 마침 제가 호박파이를 완벽하게 배워 왔거든요. 내일은 제가 실력 발휘를 해 보겠어요!”
“기대해도 되는 거야?”
“마음의 준비를 철저히 하고 계세요. 너무 맛있어서 쓰러지실지도 몰라요.”
시에나는 활기찬 기운으로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들을 모조리 쳐내 주었다.
“아가씨, 기분이 가라앉는다고 느껴지면 호박파이를 떠올리세요. 기분이 좋아질 거예요.”
* * *
깊은 밤이 찾아왔고, 잠들 시간이었다. 정확히는 그가 정해 놓은 벨라의 취침 시간이라고 하는 게 옳았다.
하지만 벨라는 침대에 앉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언뜻 봐도 잠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그는 조용히 하녀를 불러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내올 것을 지시했다.
벨라는 그가 내민 우유 잔을 흘긋 보곤 못 본 척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직 한 페이지를 채 읽지도 않았으면서 책장이 술술 잘만 넘어갔다.
우유 잔을 들고 서 있는 그의 표정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늦었어. 자야지.”
그제야 벨라는 옆에 놓았던 노트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보란 듯이 글씨를 써서 내밀었다.
[저 우유 싫어해요.]
“왜 싫어?”
그 물음엔 펜이 움직이지 않았다.
우유를 좋아하냐 싫어하냐 묻는다면, 당연히 좋아했다. 신선하고 고소한 데다 꿀을 넣어 달기까지 한 우유를 어떻게 싫어할까. 하지만, 그가 강요하듯 건네는 우유는 싫었다.
“대답해 줘. 왜 싫은지.”
[억지로 마시고 싶지 않아요.]
“그동안 억지로 마셨어?”
[제가 먼저 우유 달라고 한 적 없었잖아요.]
그러자 그의 표정이 살짝 미묘해졌다.
“그럼 뭐가 좋아?”
[저 피곤해요. 잘래요.]
“뭘 좋아하는지 말해 줘.”
아까는 늦었다고 자라면서, 막상 잔다고 하니 붙잡는 모습에 살짝 짜증이 일었다. 하지만 벨라는 꿋꿋이 노트에 말을 적었다.
[싫어요.]
구구절절 적는 것도 귀찮아서 딱 필요한 말만 썼다. 그와 이런 실없는 실랑이를 벌이고 있으니 금세 피곤함이 온몸을 덮쳤다.
그는 짤막한 대답을 보며 한숨 쉬듯 헛웃음을 내뱉곤 우유 잔을 내려놓았다.
“노트에 쓰는 거 번거롭고 귀찮지? 이 뭉툭한 펜도 싫고.”
벨라는 알면 더 이상 귀찮게 하지 말라는 얼굴로 그를 응시했다. 하지만 벨리아르는 교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제부턴 에릭과 산책할 땐 아예 노트를 안 가지고 간다면서. 하녀랑은 같이 식사하며 일상 대화도 잘만 나누고.”
오늘도 벨라는 그에게 단 한 번도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았다. 이젠 말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는 걸 그는 매우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인내하다가 결국 이제 와서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좋아하는 거 하나만 말해 줘. 그럼 더 이상 귀찮게 하지 않을게.”
[케이크 좋아해요.]
딱 봐도 귀찮은 기색이 역력한 글씨였다.
이제 됐죠?
동그란 눈이 그렇게 말했다. 이제 정말 대화를 끝내고 누우려는 벨라를 그가 다시 붙잡아 일으켰다.
“말해 달라고 했어.”
낮은 목소리가 서늘하게 내리꽂혔다. 예전 같았으면 곧장 얼어붙으며 시선을 내리깔았겠지만, 지금은 그가 두렵지 않았다.
그가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냈듯이, 벨라 역시 꾹 눌러 참고 있던 것이 확 터지고 말았다. 벨라는 살짝 젖어 든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면서도 꿋꿋이 노트를 집어 들었다. 이런 순간까지도 말없이 글씨를 적는 벨라를 보며 그는 와락 인상을 구겼다.
결국 참다못한 그가 벨라의 손에 든 노트를 뺏어 옆으로 던져 버렸다.
“나랑은 단 한 마디도 섞기 싫다는 거지.”
벨라는 저 멀리 내팽개쳐진 노트를 잠시 노려보다 그에게로 확 눈길을 틀었다.
눈물이 가득 차오른 눈동자가 원망을 품고 거세게 일렁였다. 벨라는 그에 대한 감정을 토해 내듯 소리쳤다.
“네, 싫어요! 정말 끔찍하게 싫어요!”
“…….”
벨리아르가 그토록 듣고 싶어 했던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걸어 주기를 간절히 고대했다. 공작님, 아니면 네, 라는 짧은 대답만이라도.
그토록 원하던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그는 전혀 기뻐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엔 그녀가 저를 향해 원망을 쏟아 내는 모습이, 울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너무도 선명하게 담겼다.
“공작님은 늘 이런 식이셨어요. 지금도 제가 얘기하기 싫다고 했는데 억지로 입을 열게 만드시잖아요! 이제 속이 시원하세요?”
“…….”
“좋아하는 게 뭐냐고 물으셨죠. 저는 그 물음이 너무 어려워요. 싫어하는 건 정말 많은데, 좋아하는 건 잘 떠오르지 않아요.”
“……뭐가 그렇게 싫었는데.”
한번 터지기 시작한 말은 거센 홍수처럼 범람해 그를 마구 적셨다. 그의 착잡한 물음을 시작으로 벨라는 그동안 꽁꽁 뭉쳐 놓았던 것을 그에게 내던지기 시작했다.
“이 뭉툭한 펜이요! 이거 진짜 불편하고 짜증 나요. 그리고 나무로 만든 포크도 너무 싫어요! 저렇게 바깥이 듬성듬성 보이는 창문도 지긋지긋하고요, 이 나무 테이블도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
“…….”
“그리고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시에나가 찾아오는 것도 싫고, 똑같은 시간에 에릭 경이랑 산책하는 것도 싫어요! 모조리 공작님께서 정해 준 대로 움직이는 건 이제 정말…… 너무 싫다고요!”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했다. 그녀가 쓰러져 있을 땐 그저 살아만 달라고 빌었는데, 막상 깨어나니 그 마음에 욕심이 뻗쳤다.
물기에 흠뻑 젖은 목소리가 고스란히 그의 심장으로 스며들어 먹먹하게 적셨다.
“저 토끼 인형이랑 제가 뭐가 달라요? 공작님께서 일어나라면 일어나고, 먹으라면 먹고, 죽으라면 죽어야 하고, 살라고 하면 죽고 싶어도 살아야 하고! 제가 대체 저 인형이랑 뭐가 다르냐고요!”
“……벨라.”
“……저는 무엇보다 공작님이 가장 싫어요! 제가 죽고 싶었던 건, 오로지 공작님 때문이에요. ……공작님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으셨어요. 여전히 저를 그저 인형 취급하시잖아요!”
제 마음을 모조리 쏟아 낸 벨라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눈을 질끈 감자 뺨을 타고 후두둑 흘러내린 눈물방울이 이불을 흠뻑 적셨다.
벨리아르는 제 욕심이 또다시 그녀를 얽매어 죄고 있었다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는 조용히 벨라를 품에 안았다. 밀어내고 때리는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 내며 한없이 어리석기만 한 저를 책망했다.
사슬이 칭칭 감긴 문을 억지로 부수고 들어가니 벨라는 빛 하나 들지 않는 곳에서 홀로 웅크려 울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