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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59)화 (159/180)

159화

아침부터 시에나와 부둥켜안고서 한바탕 눈물을 뽑아낸 덕분에 벨라의 눈가는 발갛게 부어 있었다. 그래도 펑펑 울고 나니 무언가 가벼워진 느낌이었다.

벨라는 잠시 홀로 남은 시간에 버릇처럼 협탁 위의 토끼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을 허벅지 위에 얹어 놓곤 부드러운 귀를 양손으로 만지작거렸다.

‘……귀여워. 시에나 같아.’

아닌가. 그러고 보니 시에나는 토끼보다는 좀 순하게 생긴 고양이를 닮았다. 아무렴, 둘 다 귀여운 건 매한가지였다. 그녀의 얼굴 위로 옅은 미소가 스몄다.

언젠가부터 협탁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이 토끼 인형의 존재를 눈치챘다. 그 뒤로 누군가의 시선을 피해 토끼 인형을 만지작거리는 건 그녀만의 은밀한 취미가 되었다.

새하얬던 토끼 인형은 조금씩 그녀의 손을 타다 보니 점점 말랑해지고 색이 변했다.

매일 보는 벨라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한 번씩 보는 다른 이들은 그 변화를 조용히 눈치채고 있었다. 그 누구보다 벨리아르가 가장 빠르고 민감하게 알아챘다.

시간 맞춰 에릭이 들어오자 벨라는 얼른 인형을 제자리에 놔두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에릭은 아무것도 못 본 척 자연스레 시선을 갈무리하며 물었다. 벨라는 습관처럼 노트를 집어 들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불편한 건 없으시고요?”

그 물음에 벨라는 자신이 쥐고 있는 뭉툭한 펜으로 시선을 옮겼다. 얼굴이 살짝 불퉁해졌다. 그녀는 살짝 힘주어 글씨를 쓰곤 펜을 같이 흔들어 보였다.

[이 펜 마음에 안 들어요.]

“아……. 죄송합니다. 그건 제가 어떻게 해결해 드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요.”

[괜찮아요. 에릭 경께서 사과하실 일이 아닌걸요.]

그가 이토록 집요하게 매달리니 목숨을 끊으려고 발버둥 치는 것조차 귀찮아졌다.

더 이상 그럴 마음이 없다고 써서 보여 줘도 그는 믿지 않았다. 이런 걸로 괜한 실랑이를 벌이는 것이 더 싫어서 그녀는 결국 침묵을 택했다.

“바람 쐬러 가실래요?”

[네. 오늘은 힘들면 벤치에서 잠시 쉬어요.]

쉬었다가 다시 걷자는 소리였다. 희망적인 신호에 에릭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예, 얼마든지요.”

푸릇한 잔디를 밟는 것이 처음도 아닌데 매번 조금 신기했다. 베른에도 춥지 않은 날이 있다는 것이.

물론 다른 지역의 봄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겨울에 비하면 충분히 따뜻한 날씨였다.

“아마 지금이 베른에서 가장 따뜻한 시기일 겁니다. 한두 달 후면 또 조금씩 쌀쌀해질 거예요.”

걸으며 노트에 말을 쓰려니 번거로워서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말았다. 에릭의 눈동자가 그런 벨라의 모습을 짧게 담았다.

“노트에 쓰기 귀찮으시죠?”

그녀가 어떻게 알았냐는 듯 바라보자 그는 작게 웃기만 했다.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살짝 부끄러워진 벨라는 결국 또 고개만 끄덕였다.

“펜은 제가 주인님께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들어주실 가능성은 적으니 기대는 하지 마세요.”

그러다 괜히 에릭이 좋지 않은 소리를 듣게 될까 봐 걱정되었다. 이런 건 고갯짓으로는 뜻이 잘 전달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노트를 펼쳤다.

마음에 들지 않는 뭉툭한 펜으로 글씨를 쓰려던 찰나, 실수로 노트를 떨어트리고 말았다. 곧장 주우려 손을 뻗었으나 에릭의 움직임이 훨씬 더 빨랐다.

땅에 떨어진 노트 하나 줍는 데에도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에릭은 반쯤 부푼 노트를 건네주며 짧게 덧붙였다.

“많이 쓰셨네요.”

그 말을 들으니 새삼 침묵하며 지냈던 시간이 정말 길었다는 것이 느껴졌다.

에릭을 보면 여전히 이안이 떠올라 마음이 아팠지만, 전처럼 괴롭고 힘겹기만 한 감정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벨라는 노트를 받으며 살며시 말을 전했다. 아침에 이어 또 한 번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에릭이 평소답지 않게 놀란 표정으로 그녀를 마주했다.

“……아가씨, 이제 목소리가 나오십니까?”

“……네.”

그래도 시에나보다는 훨씬 침착한 반응이었다. 느릿하게 숨을 내쉬며 말을 고르던 그는 이내 짤막하고 딱딱한 인사를 건넸다.

“축하드리고, 감사합니다.”

이제는 굳이 묻지 않아도 그 감사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벨라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웃었다.

“왜 웃으십니까?”

“반응이…… 너무 에릭 경다워서요.”

덩달아 작게 미소 지은 에릭은 마침 가까이 있는 벤치를 가리키며 물었다.

“조금 쉴까요?”

벨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곤 천천히 벤치로 다가가 앉았다. 그저 말을 했을 뿐인데 열심히 몸을 움직이기라도 한 것처럼 지쳤다. 그 기색을 눈치챈 에릭이 차분한 말로 도왔다.

“편하신 대로 하세요. 말로 하셔도 되고, 노트에 쓰는 게 더 편하시면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오랜만에 말을 하니 조금 힘들었을 뿐, 절대 노트에 글씨를 써서 보여 주는 것이 더 편하진 않았다.

벨라는 노트의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살며시 말을 꺼냈다. 문득 에릭에게 하고 싶었던 말이 떠올랐다.

“……그, 인형 말이에요.”

“예. 인형이요?”

“제 방에 있는 토끼 인형…….”

“……아. 무슨 인형인지 압니다.”

“에릭 경께서 놔두신 거죠? 혹시 좀 이상하게 볼까 봐 아무한테도 말은 안 했는데……. 그 인형 마음에 들어요.”

이 말을 노트에 썼다면 분명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찢어 버리거나 새까맣게 지워 버렸을 것이다. 다 큰 숙녀가 그런 토끼 인형을 좋아한다는 건 조금 부끄러운 일이었다.

벨라의 뺨이 옅은 선홍색으로 물들었다. 그 모습은 주위가 다시 겨울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고마워요. 전에 수도에서 인형을 주시겠다고 했을 땐 그냥 농담하신 줄 알았거든요. 근데 진짜로 주실 줄은…….”

에릭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벨라는 다급히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고맙다고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러나 어째 에릭의 표정이 점점 미묘해졌다. 혹시 자신이 무언가 불편한 말을 했나 싶어 벨라의 표정 역시 차츰 가라앉았다.

“왜 그러세요?”

“……아가씨, 그 인형 말입니다.”

에릭은 답지 않게 말을 꺼내고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뒷말을 이었다.

* * *

벨라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협탁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토끼 인형을 노려봤다.

“사실, 그 인형……. 주인님께서 사 오신 겁니다.”

/벨라는 그 말을 듣고서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심지어 주문 제작한 것도 아니고 길거리 가판대에서 샀다는 것도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거짓말하시는 거죠? 제게 그런 인형을 선물한 게 쑥스러우셔서…….”

“제가 선물한 것이었으면 주인님께서 가만히 놔두셨겠습니까. 그 인형도 저도, 지금 이렇게 무사하진 못했을 것 같은데요.”

천천히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다. 이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 중 어느 것 하나 그의 허락 없이 들여진 것은 없었다. 저마저도 그러할진대.

……그런 줄도 모르고.

괜스레 토끼 인형이 원망스러워졌다. 한없이 착한 모습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인형을 보니 불쾌한 감정이 울컥 치밀었다.

벨라는 곧장 다가가 토끼 인형을 벽 쪽으로 돌려놓았다. 아예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 버리려다가, 그러려니 또 마음 한편이 불편했다.

그녀는 토끼 인형을 등지고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썼다.

아무리 남몰래 만져 봤다곤 하지만, 그는 분명 자신이 토끼 인형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이 이어지니 이불 속에서 마구 발버둥 치고 싶어졌다. 그냥 진작 물어볼 걸 그랬다. 처음부터 알았다면 눈길도 주지 않았을 텐데.

또 조금 있으면 그가 돌아올 시간이었다. 의식하자마자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벨라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모든 감각을 무시하려 애썼다.

벨리아르는 겉옷을 벗어 소파에 놓아두며 침대 위로 시선을 두었다. 이어 느릿하게 주변을 훑던 눈동자가 등 돌린 토끼 인형에 걸려 멈추었다.

오늘은 외출했다가 바로 침실로 들어온 터라 에릭에게 따로 보고를 받지 못했다.

일부러 기척을 내며 다가갔는데도 동그랗게 웅크린 이불에선 아무런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침대에 걸터앉아 버릇처럼 손을 뻗었다가, 이내 거둬들였다.

“벨라.”

대신 조심스레 불러 보았으나 여전히 답이 없었다.

“많이 피곤해?”

잠든 모습을 지켜본 것이 얼마인데 잠든 척과 진짜 자는 것도 구분하지 못할까. 이건 저와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분명한 거부의 표현이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진 않았는지 물어보려다가 곧바로 생각을 접었다. 묻는다고 답해 줄 것 같지 않으니, 나중에 따로 에릭을 불러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그는 그녀가 답답하지 않도록 이불 끝을 살짝 들쳐 주곤 시트 위에 흐트러진 머리칼만 만지작거렸다.

“잘 자.”

벨라는 이불 속에서 나긋한 인사를 들으며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잘 자라는 인사마저 자는 것을 허락해 주겠다는 뜻으로 들려 달갑지 않았다.

이불을 살짝 그러쥐느라 희미하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는데도 그는 말없이 책상으로 돌아갔다.

벨라는 그에 대한 원망을 소리 없이 쏟아 내다 어느 순간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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