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58)화 (158/180)

158화

물처럼 흘러간 시간이 어느덧 이 주나 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동안 홀로 있었던 시간이 없었다.

아침 해가 밝으면 그는 꼭 저를 깨워 놓고 나갔다. 그리고 딱 맞게 시에나가 아침 식사를 들고 찾아오고, 점심 식사 시간이 다가오기 전에 에릭이 찾아온다. 그 이후로는 쭉 그의 눈길이 닿아 있었다.

이런 일정은 절대 우연일 리가 없었다. 쉴 틈 없는 제 일과 역시 철저히 그의 통제 안이었다.

그는 절대 저를 죽이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그녀를 더없이 답답하게 만들었다.

“벨라, 이리 와.”

예전과 같은 부름이었지만 그 어조는 훨씬 부드러웠다.

그에게 가는 것이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가 얼마나 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더 귀찮은 일을 피하고자 이불을 걷고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그래도 수일간 에릭의 무릎이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힘찬 걸음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걸어갈 정도는 되었다.

벨리아르는 책상에 살짝 기대선 채 벨라가 제 앞에 당도할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렸다. 그의 눈길은 단 한 순간도 그녀에게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녀가 두어 걸음을 앞두었을 때, 그는 한 걸음을 성큼 내디뎌 그녀의 팔을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순간 중심을 잃고 휘청이는 그녀를 품 안에 단단히 끌어안고선 나긋이 등을 쓸어내렸다.

“잘했어.”

벨라는 이마에 맞닿은 그의 가슴팍을 고개로 살짝 밀어냈다.

“오랜만에 산책하니까 어땠어?”

낮에 에릭과 짧은 산책을 했다. 아직 몸 상태가 온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 겨우 몇 걸음 걷는 정도였지만, 바깥 공기가 생각보다 시원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벨라는 시선을 아래로 비스듬히 내리깐 채 머릿속으로만 산책의 감상을 짧게 흘려보냈다.

“조금 더 걷기 수월해지면, 밖에 나들이 갈까?”

“…….”

“가까운 폴번부터 가 보는 게 좋겠다. 사람 많은 게 싫으면 그냥 숲길만 거닐어도 좋고. 아니면 그날은 아무도 거리로 나오지 못하게 할까?”

“…….”

말할 수 있었더라도 입을 열지 않았을 터였다. 지금은 말을 못 해서가 아니라 다분히 고의적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이었다. 분명 그 사실을 알 텐데도 그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둘이 가자. 맛있는 거 사 줄게. 예쁜 옷도 사 주고. 음유 시인도 부를까.”

예전 같으면 혹했을 달콤한 말들이었다. 어느 정도 자유를 맛보여 주겠다는 말이었으니. 하지만 지금 그녀에겐 아무렴 소용없는 것들이었다.

그런 게 무엇보다 간절했던 날들이 있었다. 단순히 자유를 갈망했다기보다 그가 필요했었다. 그의 마음이 가지고 싶었고, 그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조금 더 일찍 말해 주었다면 어리석은 저는 마냥 좋다고 방실거렸겠지. 길가의 꽃집에서 꽃을 사 주었던 그날처럼.

하지만 이제는 그의 마음이 텅 비어 껍데기만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 버렸다. 이런 달콤한 말들도 결국은 고장 난 인형을 고치기 위한 수단일 뿐임을.

언젠가는 결국 프리스틴 황녀처럼 무참히 버릴 거면서.

“……벨라, 지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벨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 충동적이었다. 그가 노트를 가져다주자 망설임 없이 펜을 움직였다.

[시스란에서 온 공녀는 어디에 있어요?]

노트를 보여 주며 그의 표정을 살폈다. 반듯한 눈가가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그딴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

[거리에만 나가도 사람들이 숙덕이던걸요.]

그는 이내 인상을 팍 구겼다. 답답한 듯 짧게 한숨을 내쉬는 것까지 보며 벨라는 그에게서 눈길을 거뒀다.

“내가 그딴 걸 왜 받아.”

이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아예 헛된 소문은 아니었나 보다.

[딱히 상관은 없어요. 말씀 안 해 주셔도 돼요.]

벨리아르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나는 너만 보면, 과거에 내가 저질렀던 짓들을 모조리 후회해.”

네게 저질렀던 잘못들은 물론이고, 저를 거둬 준 아버지를 죽이고 지상으로 추방당한 것까지 모조리.

그녀 앞에만 있으면 주위가 깜깜해졌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서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겨우 손을 뻗으면 벨라는 악착같이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또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이젠 저 펜이 무서울 지경이었다.

[이제 공작님께 드릴 말씀은 없어요. 피곤해요.]

저를 밀어내는 손길에 그는 맥없이 밀려나고 말았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녀가 침대로 돌아가 이불 속에 웅크리고 눕는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억지로 품에 가둬 놓았던 온기는 빠르게 허공으로 흩어졌다. 벨라의 빈자리가 느껴질수록 그는 더욱 짙은 공허함에 빠져들었다.

성안의 사람들은 각자 저만의 방식으로 그녀가 걸어 잠근 마음의 방문을 두드렸다.

에릭은 그녀에게 사죄함과 동시에 조금씩 걸을 수 있도록 유도하며 밖으로 이끌었다.

시에나는 늘 아침 식사를 가지고 와 그녀와 실랑이를 벌였다. 한 입만 더요. 싫어, 배불러. 그래도 조금만 더요. 덕분에 그녀는 알게 모르게 먹는 양이 살짝 늘었다.

소렐 부인은 정해진 시간 없이 때때로 찾아와서 머리를 빗겨 주거나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별다른 말은 걸지 않고 그저 눈이 마주치면 부드럽게 웃어 주는 것이 전부였다.

아주 미세하지만, 분명 자물쇠는 헐거워지고 문 틈새는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마주한 문만큼은 작은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굵은 사슬로 빼곡하게 칭칭 감아 놓은 문 앞에서 그는 매번 무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면 조금씩 하늘이 높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어제는 한바탕 시원하게 비가 내리더니 오늘은 또 햇볕이 쨍쨍해서 땅이 금세 말랐다.

하루하루 그녀의 말들로 채워진 노트는 어느새 살짝 부풀어 있었다. 벨라가 깨어난 지 두 달째, 성은 온전히 일상에 젖어 들었다.

“오늘은 정말 조금만 가져온 거란 말이에요. 한 입만 더 드시면 정말 끝인데! 여기서 이렇게 포기하실 거예요?”

오늘도 시에나의 애원을 가장한 잔소리로 진정한 하루가 시작되었다.

“이러다가 바람 불면 우리 아가씨 날아가겠어요. 어휴, 걱정돼서 어떻게 사나 몰라…….”

시에나가 일부러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너스레를 떨자 벨라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웃으실 일이 아니라구요. 저랑 계실 때도 이렇게 안 드시는 걸 보면 점심이나 저녁 식사는 오죽하겠어요? 솔직히 말씀해 보세요. 공작님 앞에선 거의 안 드시죠?”

사실 시에나의 노력 덕분에 아침은 어느 정도 먹는 편이지만, 다른 식사 시간엔 거의 입만 대고 물리는 것이 사실이긴 했다. 그럴 때마다 그와 묘한 기 싸움을 벌이는 것도 이젠 지쳐 갈 즘이었다.

벨라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시에나는 과한 한탄을 내뱉었다.

“이거 봐, 이거 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요. 안 되겠다. 그냥 제가 삼시 세끼 다 챙겨 드릴까요? 지금 당장 아데인 경께 말씀드려서…….”

시에나는 당장이라도 에릭에게 찾아가 자신이 벨라의 식사 시간을 모두 책임지겠다고 말하려는 기세였다.

벨라는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몸을 들썩이는 시에나를 톡톡 건드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을 때마다 건네는 신호였다. 시에나는 곧바로 의자에 몸을 붙이곤 그녀에게 집중했다.

“네, 아가씨. 하실 말씀이 있으세요?”

오늘따라 시에나는 유독 기운이 넘쳤다. 활기찬 모습에 벨라의 입가에도 덩달아 잔잔한 미소가 스몄다.

그녀는 노트를 펼쳐 글씨를 적기 시작했다. 무언가 고민되는 게 있는지 중간에 몇 번 고민하기도 하고,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혹시 매일 아침 이러는 거 힘들진 않아? 너도 편하게 식사하고 싶을 텐데……. 공작님 지시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거라면 내일부턴 오지 않아도 돼. 내가 공작님께 잘 말씀드려 볼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미안해.]

천천히 글을 읽어 내려가던 시에나의 표정이 점점 어둡게 가라앉았다. 내내 자신감 넘치게 올라가 있던 눈꼬리 역시 아래로 조금 처졌다.

벨라는 그 표정을 유심히 살피며 역시 그동안 시에나도 힘들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무리 돈을 받고 일하는 처지라지만 이렇게 자신의 아침 식사를 위해 매일 실랑이하는 건 상당히 고생스러울 테니 말이다.

“……아가씨께서 왜 사과를 하세요?”

[내가 이래서 괜히 너까지 고생시키는 것 같아 너무 미안해.]

“아가씬 정말…….”

“아…….”

갑자기 울먹거리며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벨라는 멍한 소리를 내뱉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어찌할 줄 모르고 허공에서 맴돌던 손이 끝내 조심스럽게 시에나의 등을 다독였다.

그러나 도리어 울음소리가 더욱 커지자 결국 벨라는 살며시 시에나를 끌어안았다.

“공작님이 시키셔서 하는 거 아니에요. ……저는 그저, 아가씨께서 얼른 기운 차리셨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시고……. 사과를 하시면…….”

“…….”

울음 섞인 목소리가 중간중간 끊기고 엉망이었지만, 벨라는 한마디 한마디 놓치지 않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진짜 서운해요…….”

벨라는 누군가의 진심 어린 애정을 받는 것에 미숙했다. 어색하고 낯설어서 당장 눈앞에 디밀어도 제 것인 줄 모르고 피해 버리는 것이 습관이었다.

그래서 당연히 시에나가 보인 행동들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형식적인 건 줄로만 알았다.

시에나는 생각할수록 서러웠는지 “공작님께서도 아가씨가 몇 입이나 드셨는지까지는 모른다구요……! 그건 저밖에 몰라요!”라며 소리쳤다.

그런 시에나가 귀여우면서도 또 미안하고 고마웠다. 이런 마음을 꼭 전해 주고 싶은데.

자그맣게 입술을 달싹이던 벨라는 이내 목에 힘을 주었다.

“……고마워…….”

살며시 말을 꺼내 보니 전혀 거리낄 것 없이 매끄럽게 목소리가 나왔다.

문제가 있다면 너무 오랜만에 말을 해서 그런지 발음이 살짝 뭉개진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제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조금 낯설었다.

순간 시에나의 울음이 뚝 멈췄다. 그녀는 토끼처럼 놀란 눈을 하고서 멍하니 벨라를 바라봤다.

“……아가씨? 지금, 뭐라고…….”

“……고마워, 정말.”

“아가씨……!”

다시 한번 말을 건네니 시에나는 감격 어린 얼굴로 벨라를 와락 끌어안았다.

끊임없이 문을 두드리던 시에나는 결국 가장 먼저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