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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57)화 (157/180)

157화

“저기 정원 보이세요? 저 꽃들 제가 직접 심은 거예요. 다는 아니지만……. 그래도 꽃은 제가 골랐어요. 예쁘죠?”

그녀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시에나는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 서서 꽃이 가득 심긴 정원을 가리켰다. 이렇게 위에서 보는 건 또 느낌이 다르다며 감탄하기도 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손뼉을 짝 치며 허둥지둥 트롤리로 다가갔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시에나는 침대 옆 작은 테이블 위로 음식들을 날랐다. 그 와중에도 나무로 된 접시나 커트러리가 눈길을 끌었다. 테이블마저도 나무인 판인지라 당연하게도 나이프는 없었다.

음식은 다양하지도, 많지도 않았다. 부드러운 수프와 식감이 질기지 않은 빵이 전부였다.

시에나는 이인분의 식사를 간단하게 차려 놓곤 자연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저랑 아침 식사 같이해요. 일부러 아가씨 좋아하시던 감자 수프로 준비했어요.”

벨라는 공허한 눈빛으로 음식들을 훑다가 이내 짧은 숨을 내쉬었다.

[공작님께서 뭐라고 하셨어?]

“…….”

갑작스러운 물음에 시에나는 무어라 답을 하지 못했다. 순간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지나가느라 답을 할 타이밍을 놓쳤다는 게 옳았다.

그 침묵을 어떻게 해석한 건지, 벨라의 얼굴이 조금 더 굳어졌다.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아도 돼. 나도 알고 싶어.]

그제야 시에나는 둘 사이에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오해가 끼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이럴 땐 괜스레 말을 돌리는 것보다 최대한 사실을 전달해 주는 것이 낫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공작님께서 저와 하녀장님을 비롯한 사용인 몇 명을 성으로 부르셨어요. 대부분 아가씨와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이니 불편하지 않으실 거예요.”

[왜?]

“저도 자세한 이유는 모르지만…… 아마 아가씨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싶으신 것 아닐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물론, 마냥 공작의 편을 들어주고 싶진 않았다. 시에나도 성에 와서 벨라가 단순히 그의 피후견인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되었고, 둘의 관계도 조금은 파악했다. 시에나는 전적으로 벨라의 편이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그냥 예전처럼, 저랑 같이 식사해요.”

벨라는 더 이상 노트에 말을 쓰지 않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라는 시에나의 말과는 달리, 그녀의 마음은 한없이 복잡해졌다.

그사이 시에나는 수프를 한 스푼 떠 그녀의 입까지 가져다주었다.

“자, 드시고 얼른 기운 차리셔서 저랑 몰래 놀러 가자구요. 이번엔 아데인 경께 안 들킬 자신 있어요. 성은 저택과 비교도 안 되게 넓어서 이리저리 숨어 다닐 곳이 많던걸요.”

도저히 음식이 당기지 않아 고개를 돌리며 피해도 시에나는 끊임없이 구슬렸다. 간절한 애원에 못 이겨 결국 한 입씩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한 입만, 한 입만 하던 것이 벌써 몇 번째였다. 벨라는 결국 다급히 노트를 펼쳤다.

[이제 배불러. 그만…….]

“제발 한 입만 더요. 이번이 진짜, 진짜 마지막이에요. 이렇게 쥐꼬리만큼 드시니까 제 마음이 너무 아파 죽겠어요. 지금 제 눈에 눈물 맺힌 거 안 보이세요?”

황당해서 눈을 맞추니 정말 눈가가 그렁그렁 젖어 들었다. 황당함이 더욱 깊어짐과 동시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결국, 벨라는 또 한 입을 받아먹을 수밖에 없었다. 수프는 시에나의 집념 덕분에 거의 바닥을 보였다. 마지막이라는 말은 진짜였는지 시에나는 뿌듯한 얼굴로 스푼을 내려놓았다.

“저 아가씨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요. 성에 오고 싶어서 하녀장님께 졸라 봤던 것도 사실이고요.”

시에나의 시선이 붕대가 감긴 손목에 닿자, 벨라는 살며시 손을 이불 아래로 숨겼다.

“저는 아가씨가 정말 좋아요. 그러니까 너무 많은 생각을 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

모르겠다. 그 마음을 가볍게 받아도 되는 건지 이젠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또 시에나마저 잘못된다면…….

그가 어디선가 저를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벨라는 고개를 떨군 채 시에나를 외면했다. 더는 마음속에 누군가를 들이고 싶지 않았다.

“아가씨, 내일 또 올게요.”

노트에 안 와도 괜찮다는 말을 적으려는 찰나, 시에나는 천진하게 웃으며 인사하곤 빠르게 모습을 감춰 버렸다.

다시 홀로 남겨진 벨라는 시에나가 다녀간 시간이 울창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볕뉘 같다고 생각했다.

손에 잡히지도 않고, 잠시 스쳤다가 사라지는.

* * *

멍하니 앉아만 있다 보니 귓가에서 이명이 울렸다. 머리까지 아파지는 듯해 그녀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 순간, 또다시 노크 소리가 끼어들어 이명이 끊겼다. 시에나의 조심스러웠던 노크와는 달리 이번엔 소리가 단정하고 선명했다.

에릭 경이구나.

노크 소리만 듣고도 벨라는 문밖의 상대를 눈치챘다. 눈을 한 번 깜빡이니 문이 열리고 예상대로 에릭이 들어왔다.

벨라의 기억상으론 무의식에서 깨어난 뒤 에릭을 마주치는 것이 처음이었다.

오랜 시간 쓰러진 채 누워 있었다고 해도, 그녀의 머릿속엔 에릭이 이안을 찌르던 모습이 바로 어제 기억처럼 생생했다. 그녀가 느끼기엔 조금 긴 꿈을 꾸었다가 일어난 것뿐이었으므로.

그래서 에릭을 보자마자 괴로운 기억이 범람했다. 벨라는 고개를 숙인 채 에릭을 바라보지 않았다. 차마 볼 수 없었다. 이미 머릿속엔 이안이 쓰러지던 모습이 끊임없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아가씨.”

“산책하러 가실까요?”

당연히 이런 말들이 날아올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아까처럼 혼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익숙한 고요가 온몸을 내리눌렀다.

그러다 혹시 나간 건가 싶어 살며시 고개를 든 순간, 벨라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짤막하게 숨을 들이켰다.

에릭은 방의 구석 쪽에서 그녀를 향해 무릎을 꿇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숨소리조차 죽이고서 아무런 미동이 없었다.

당황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머릿속에 맴돌던 괴로운 기억들이 무참히 쓸려 나가고 말았다. 그 자리엔 단순한 의문만이 들어찼다.

왜 그러고 계시냐고, 당장 일어나 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말이 나오지 않아 답답함만 늘 뿐이었다.

노트에 말을 끄적여 흔들어봐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벨라는 입술을 짓씹으며 여러 번 한숨을 토해 내길 반복했다. 답답한 마음에 제 가슴을 여러 번 치기도 했다. 서로가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녀는 결국 노트와 펜을 쥐고서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깨어난 이후 걷는 것이 처음이었다.

오랜 시간 누워 있느라 근육이 약해져 있어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그냥 바닥에 발을 대었을 뿐인데 그 어려움이 거세게 느껴졌다.

그래도 자신이 가지 않으면 에릭은 언제까지고 저러고 있을 심산이었다. 그냥 내버려 두기엔 마음이 그만큼 단단하지 못했다.

결국, 한 발자국도 가지 못해 바닥으로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아…….”

푹신한 카펫이 깔려 있어 아픔은 그리 크지 않았지만, 반사적으로 소리가 샜다. 그녀의 짧은 신음에 에릭이 살짝 고개를 들었다. 그 이후로는 그녀가 힘겹게 제게로 가까워지는 모습을 모두 지켜보았다.

벨라는 수없이 넘어지고 일어서길 반복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나중엔 결국 기어가다시피 하며 마침내 에릭의 앞에 도착했다.

아무리 방이 넓다곤 하지만, 몇 걸음 되지 않는 거리를 오며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벨라는 살짝 화가 난 표정으로 펜을 움직였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아가씨.”

그제야 에릭이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이 목소리를 들으려고 그 고생을 했다. 벨라는 짧은 숨을 토해 내며 바삐 글을 적었다.

[얼른 일어나 주세요. 제발요.]

“제가 원망스럽지 않으십니까?”

그 물음에 몰아쉬던 숨이 점차 잦아들었다. 그 물음의 주체가 이안의 죽음이라는 것은 명확했다.

원망스럽지 않을 리가. 이안도 소중한 친구였지만, 에릭 역시 제겐 더없이 소중한 친구였다. 그런 둘이 칼을 맞대고, 결국엔 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장면은 무엇보다 괴로웠다.

에릭이 원망스러웠고, 미웠고, 또 걱정도 되고,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의문도 들었고, 끝내 이런 모습까지 보여 주니 더없이 마음이 불편해졌다.

이안을 죽인 건 분명 에릭의 뜻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절대 주인의 명령을 거스르지 못할 테니.

머리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마음속에 박힌 자잘한 원망까지 뽑아내진 못했다.

[원망스러워요. 하지만…… 제가 경을 원망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저는 매일 아가씨를 찾아올 겁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기다릴 테니, 지금처럼 이렇게 오셔서 일어나라고 해 주십시오.”

[경의 의지가 아니었다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더 이상 이런 건 하지 마세요.]

“아가씨께서 한 번도 넘어지지 않고 제게 걸어오시면, 그때 그만두겠습니다. 그때,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벨라는 물끄러미 에릭을 바라봤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원망하든 미워하든, 그냥 신경 쓰지 않으면 될 텐데. 에릭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것도 공작님께서 지시하신 건가요?]

“아니요.”

에릭은 글을 읽자마자 단호히 대답했다. 그러고도 모자랐는지 말을 덧붙였다.

“더는 거짓말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죠. 정말 주인님께서 지시하셔서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왜……. 그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면, 벨라는 정말 에릭이 이러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예전처럼 아가씨와 산책하고 싶습니다.”

“…….”

순간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 말뜻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은 채 조각조각 부서졌다.

에릭은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 인사를 하곤 방을 빠져나갔다.

“내일 뵙겠습니다.”

내일 찾아오겠다는 사람이 벌써 둘이었다.

그냥 이대로 깊은 바닷속으로 잠겨 버렸으면 좋겠는데, 자꾸만 누군가 제게 밧줄을 던져 댔다.

싫어. 싫다고.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

밧줄을 잡는 것조차 두려운 벨라는 몸을 웅크린 채 그저 울기만 했다.

결심하고 용기를 내는 것, 지금 그녀에겐 가장 힘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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