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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56)화 (156/180)

156화

벨리아르. 그 이름은 오만과 잔혹함의 온상이었다. 누군가에게 굽혀 본 적도 없고, 거슬리는 것을 참고 넘어가 주는 조금의 나긋함도 없었다.

혹여 그의 그런 모습을 보았다면, 그건 필시 거짓된 가면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건넨 말 한마디가 짙은 잔상을 남겼다. 유독 그 한마디만 끈질기게 머릿속을 맴돌다 보니, 그 순간이 헛된 망상처럼 느껴졌다.

정신이 없는 나머지 잘못 들은 건 아닐까.

얼핏 스친 생각으로 확신이 기울어졌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제게 사과를 건넬 리 없었다. 그 오만한 사람이 고작 저한테.

다시 곱씹어 보니 역시 말이 되지 않는 일이라 벨라는 상념을 끊어 냈다.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말대로 잠시 후, 하녀가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다. 단순히 가져다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녀는 직접 컵을 입에 대 주기까지 했다.

아무것도 목구멍으로 넘기고 싶지 않았다. 무언가를 마시고 씹는 행위조차 귀찮게 느껴졌다. 그래서 모두 거부하고 있었는데, 그는 제가 하는 대로 순순히 놔둘 사람이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물을 받아 마셨다. 겨우 물 한 잔 마시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힘겹게 비워 내고 나니 이마엔 작은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하녀의 손에 들린 투명한 유리잔을 보니 작은 충동에 이끌렸다. 벨라는 하녀의 손을 살짝 두드리곤 노트에 글씨를 써서 보여 주었다.

[컵은 놔두고 가세요.]

컵까지 어떻게 하라는 지시는 없었는지 하녀는 군말 없이 그녀에게 컵을 주곤 방을 나갔다.

그는 자리를 비운 지 세 시간 뒤에 방으로 돌아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세 시간. 그 세 시간 동안 성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 일어났다.

* * *

그가 지켜보는 자리에서 방은 빠르게 정돈되었다. 피가 묻은 침구는 깨끗하게 교체되었고, 깨진 유리잔의 파편들도 작은 조각 하나 남기지 않은 채 말끔히 치워졌다.

방을 정돈한다는 것엔 평소보다 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의 책상 가까이 놓여 있던 무기들은 물론이고 날카롭거나 깨질 만한 물건들은 모조리 없앴다.

서랍의 모서리 같은 뾰족한 곳들도 모두 부드러운 실크로 두툼하게 감아 놓았다.

그리고 창문 역시 그녀의 몸이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의 간격으로 나무판자를 덧대 붙여 놓았다. 그 나무판자조차도 실크로 둘러놓을 만큼 그의 지시는 치밀했다.

바닥의 딱딱한 부분에도 빠짐없이 카펫을 깔아 조금의 다칠 여지조차 남겨 두지 않았다.

마침내 눈을 감고 마구 뛰어다녀도 전혀 다칠 것 같지 않은 방이 완성되었다.

그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부터 이따금 나직한 한숨이 샜다.

벨라는 그를 향해 허공에 무언가 쓰는 시늉을 해 보였다. 그러자 그는 곧장 아까 가져갔던 노트와 펜을 들고 왔다.

노트를 여니 종이 한 장 한 장마다 끝부분이 종이로 싸여 있었다. 펜 역시 전과 같은 날카로운 것이 아니라 끝이 뭉툭했다. 작은 상처조차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벨라는 이상하게 생긴 펜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곤 노트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이안의 죽음을 물은 이후로 그에게 처음 말을 붙이는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만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워 보였다.

[죄송해요. 그 하녀는 잘못이 없어요. 나무라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예요.]

벨리아르는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그녀의 글씨를 훑어내렸다. 좋은 말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아주 작은 기대 정도는 있었다.

또 이런 생각을 할 줄 알았지.

이번에도 당연히 자신을 탓하며 애꿎은 사람을 걱정하고 있을까 봐 그 하녀는 건들지 않았다.

제 목숨은 그토록 쉽게 내던지려 하면서, 여전히 다른 이는 끔찍하게 걱정하는 벨라의 모습이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아무 짓도 안 했어. 못 믿겠으면 지금 당장 데려와서 보여 줄 수도 있어.”

그의 시선이 붕대를 칭칭 감은 벨라의 손목으로 내려앉았다. 힘이 없어 깊숙이 베지 못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왜 그랬어.”

먹먹한 물음은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그사이 벨라는 또 한 문장을 써서 그에게 보여 주었다.

[화가 나시면 저를 죽이세요.]

“…….”

[더 이상 살려 달라고 빌지 않을게요.]

결국 그는 짧게 헛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떨궜다.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모진 말들과 마주할 수 없었다.

“……벨라, 내가 너를 죽이는 일은 없어. 화가 난다고 해서 죽이는 일은…… 더더욱 없을 거고. 아무리 죽여달라고 빌어도 나는…….”

왜 이렇게 잔인한 소리를 하느냐고 그녀를 탓할 수 없었다. 제 손으로 그녀를 죽이려 했던 것도 사실이고, 그저 유희 거리로 가볍게 생각했던 것도 변명의 여지 없이 사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그 대가가 무엇이든 상관없으니, 그녀를 처음 마주치던 순간으로.

총구를 들이밀고 그 간절한 마음을 멋대로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따스하게 안아 주며 보고 싶었다고 말해 주었다면 지금 우리는 달랐을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칼을 겨누어야 하는 그 마음을 일찍 헤아려 주었다면, 아니, 애초에 엘리아스를 살려 두지 않았다면.

한번 치민 후회는 끝을 모르고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이게 제가 원하는 거예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아요.]

무엇을 원망하든 결국, 벨라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내몬 건 변함없이 자신이었다. 우리 사이에 불순물이 섞이지 않았더라도 어리석은 저는 벨라를 지키지 못했을 것이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어요.]

누구한테 향하는지 모를 말이었다. 그 방향이 어찌 되었건, 그의 마음을 내리찍는 말임은 분명했다.

그저 노트에 쓴 글씨만 보았을 뿐인데 처음 지상에 떨어졌던 날처럼 고통스러웠다. 그녀가 제게 칼을 들이밀었을 때보다 펜을 움직이는 지금이 더 두렵고 괴로웠다.

또 무언가 글씨를 쓰기 시작하는 작은 손을 보며 그는 벨라를 품에 끌어안았다. 힘없이 저항하던 몸은 이내 포기한 듯 힘을 빼고 축 늘어졌다.

시간이 지나도 그녀는 그의 허리를 감싸 안지 않았다. 그건 벨라의 작은 욕심이자,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두려움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이젠 더는 부질없는 것이었다.

벨리아르는 그녀의 머리 위로 입술을 묻었다.

“……아프게 해서 미안해. 내가 다 미안해.”

차라리 저를 죽이라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그 또한 벨라를 위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분명 자신이 죽도록 미울 텐데, 한없이 여린 그녀는 감히 저를 죽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차라리, 네가 조금만 더 나빴다면 좋았을 텐데.

그는 그런 벨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저와 다른 온기가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사랑해.

그 말을 하는 것조차 염치없고 미안해서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미안해, 벨라.”

나를 용서해 줘.

그런 흔한 말조차 하지 못하고 그저 하염없이 사죄만 읊조렸다.

* * *

“벨라.”

작게 부르는 소리에도 그녀는 스르륵 눈을 떴다. 깊게 잠들지 못한 채 상념과 무의식의 경계를 떠다니는 중이었기에 굳이 잠을 깨운 건 아니었다.

그는 벨라의 상체를 일으켜 준 뒤, 등에 베개를 받쳐 주었다.

“아침이니까 일어나 있자. 졸리면 이따가 낮에 더 자고.”

아직 해가 높이 떠오르진 않았는지 햇살이 약했다. 딱히 시간에 구애 받지 않는 그는 벨라의 낮과 밤은 철저히 지켜 주려 애썼다.

밤이 되면 무조건 불을 다 끄고 눕힌 채 눈을 감겼다. 그러고는 일정한 숨소리가 들릴 때까지 곁에 앉아 자리를 지켰다. 얕은 잠이라도 들고 나서야 그는 작은 촛불을 켜고 제 할 일을 했다.

그리고 아침 해가 뜨면 지금처럼 잠을 깨우고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배는 안 고파?”

그의 걱정스러운 눈길이 뼈가 살짝 도드라질 정도로 마른 몸을 훑었다. 어떻게든 물은 마시게 했지만, 벨리아르는 계속 그런 방법을 쓰고 싶진 않았다.

“집무실에 있을게. 점심 식사 시간에 맞춰서 돌아올 건데, 혹시 그 전에 내게 할 말이 있으면 누구에게든 나를 불러 달라고 해. 바로 올게.”

이번에도 벨라는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전처럼 그녀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곤 방을 나섰다.

벨라는 그가 나가자마자 무릎을 끌어안으며 몸을 둥글게 말았다.

방 안에 홀로 남게 되자 불편한 안도가 마음을 울렁거리게 했다. 어두컴컴한 망망대해 위에서 파도에 휩쓸리는 작은 나룻배 같았다.

그녀가 떠올리는 바다는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다. 짙은 해무에 휩싸여 검게 일렁이는 바다는 그저 차갑고 두려운 존재일 뿐이었다.

똑똑.

그가 나가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그마한 노크 소리가 그녀를 망망대해에서 끄집어냈다. 벨라가 살며시 고개를 들 무렵, 문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아가씨.”

“…….”

빼꼼히 고개를 내민 사람은 시에나였다. 그녀는 벨라를 향해 배시시 웃어 보이며 애교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들어가도 될까요?”

전혀 생각지 못한 인물이라 벨라는 잠시 당황했다. 얼떨결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니 시에나는 빙긋 웃으며 나무로 만든 트롤리를 끌고 들어왔다. 그 위에는 따끈한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

“좋은 아침이에요.”

그 인사를 듣자마자 수도에서 머물던 어느 날로 되돌아간 느낌이 들었다. 벨라는 저도 모르게 바깥을 흘긋 보곤 노트를 집어 들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수도에 있으려니까 아가씨가 너무 그립지 뭐예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하녀장님을 조금 졸랐죠.”

시에나를 다시 보게 된 건 분명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마냥 기쁜 마음을 누릴 수 없었다. 이유 모를 걱정이 마음 한편을 불편하게 찔렀다.

시에나가 단순히 소렐 부인을 졸라서 성으로 오게 되었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의 허락 없이는 불가한 일이다.

그렇다면 왜. 그는 왜 갑자기 시에나를 성으로 부른 걸까.

“말 잘 들으면 치치를 선물로 줄게.”

그날의 기억이 덮쳐와 불쾌하게 온몸을 적셨다. 그는 치치를 제게 선물로 주었고, 도구처럼 이용하다가 아무렇지 않게 버렸다.

시에나가 곁으로 다가오자 불안한 마음이 거대하게 몸집을 부풀렸다.

시에나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선물처럼 기쁜 일이었다. 이 순간이 그가 준 선물만 아니었다면, 분명 순수하게 기뻐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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