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머릿속이 그저 멍했다. 오로지 마지막 꾸었던 꿈의 잔상만이 남아 희뿌연 해무가 가득 낀 것처럼 몽롱했다. 잔잔한 파도조차 치지 않는 그곳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파? 아니면 어디가 불편해?”
희미하게 입을 벙긋거리던 벨라의 표정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녀는 힘겨운 숨을 길게 내뱉고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무슨 말이라도 좀 해 줘. 짧은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벨라는 그를 외면하듯 고개를 살짝 돌렸다.
마치 저를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에 토기가 치밀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목을 틀어쥐고 멋대로 도망간 것을 질책했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했을까.
아니지, 이렇게 다정한 척 굴다가도 몸이 조금 나아지면 본성을 드러내어 지하에 처박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게 더 현실성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전처럼 두려운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녀의 기억은 배에서 스스로를 찌르고 바다로 잠기던 날에 멈춰 있었다. 그저 긴 꿈을 꾸었을 뿐, 그녀에겐 그날 일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토록 처절하게 발버둥 쳤는데. 무슨 짓을 하든 저는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계기밖에 되지 않았다.
더없이 공허하고, 허무하고, 무력했다.
이제 제게 남은 일은 그의 인형이 되는 것뿐이었다. 얌전히 앉아 영원히 제 것이 될 수 없는 그의 마음을 갈구하며, 언제 버려질까 전전긍긍한 채.
그런 건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지난날 지독하게 삶을 갈망하며 아등바등 살아온 자신이 우습게 느껴졌다. 대체 살아서 뭘 하려고.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두려웠었다. 미련하게 그의 애정을 갈구하기도 했고. 돌이킬수록 덧없는 것들이었다. 세상 소중한 것처럼 끌어안고 있던 삶이 무의미해졌다.
벨라는 텅 빈 눈동자를 들어 올려 그를 바라봤다.
저를 죽이세요.
그리 말하고 싶은데 무언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고 있는 것처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가 제 이마를 어루만질수록, 제 손을 더욱 세게 붙잡을수록, 붉은 눈동자가 하염없이 저를 옭아맬수록, 무형의 손길이 목구멍을 꽉 억눌렀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 이내 굳게 다물고 마는 벨라의 모습에 그의 표정이 서서히 일그러졌다.
“……벨라, 말을 못 하겠어?”
아니라고 말해.
짙어진 눈동자가 간절한 지시를 내보였다.
벨라는 결국 다시 눈을 감은 채 입술을 짓씹었다. 마른 입술은 작은 자극에도 쉽게 찢어졌다. 곧바로 그의 손이 파고들어 찢어진 입술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그녀는 자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일순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벨라는 스스로 어두컴컴한 방 안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도록.
* * *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사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녀는 등에 베개를 받치고 앉은 채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시선 끝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도 모른 채. 이불 위에 차례대로 올려진 종이와 펜이 겨우 눈길을 잡아끌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여기에 써.”
그는 벨라가 말을 하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사흘이 걸렸다.
그동안 어떻게든 그 입을 열게 해 보려 애썼지만,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문 채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계속해서 어르고 달래 봤으나 그녀는 마치 성의 사용인들처럼 자아를 상실하기라도 한 듯 보였다.
의사는 심리적인 문제로 이런 일시적인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여러 의사를 불러들여도 비슷하게 말하니 더 이상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무의미해 보였다.
“심리적인 문제로 생긴 병은 그 마음이 낫길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이 준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감히 가늠할 수 없었다. 제 어리석은 감정에 가려 벨라의 마음이 어떻게 망가져 갔는지 살피지 못했다.
그녀가 종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물끄러미 시선을 내리자 그의 얼굴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억지로 말하려고 하지 않아도 돼. 언제든지, 네가 하고 싶을 때 해.”
내내 어떠한 반응을 보이지 않던 벨라가 펜을 쥐었다. 오랜 시간 움직이지 않았던 몸은 겨우 펜 하나 쥐는 데에도 힘겨운 과정을 거쳐야 했다.
보는 사람까지 답답해질 만큼 느릿하고 서툰 움직임이었으나 그는 기꺼이 그 시간을 감내했다.
펜을 쥔 손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으니 글자를 쓰는 데에도 상당히 많은 집중력을 요했다. 그녀는 힘겨운 숨을 내쉬면서도 꾸역꾸역 글자를 썼다.
마침내 아이가 쓴 듯 삐뚤삐뚤한 글씨가 그의 앞에 내밀어졌다.
[이안은요?]
“…….”
순간 그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죽었다고 사실대로 말할까, 아니면 어딘가에 잘 살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다독여 줄까.
어느 것 하나 내키는 게 없었다.
짧은 한마디에 여러 감정이 휘몰아쳤다. 미안하고, 후회되고, 짜증이 치밀고 화가 났다가, 또 염치없는 질투가 고개를 디밀었다.
너는 이 순간에도 그 녀석을 제일 먼저 찾는구나. 이러니 내가…….
그가 어려운 문제 앞에서 답을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순간, 벨라는 또 한 문장을 써서 내밀었다.
[죽었어요?]
종이 위에 스민 까만 잉크는 그녀의 괴로움을 담담하게 포장했다. 그저 짤막한 편지만 보았다면 아무렇지 않게 구겨 버렸을 텐데, 그에겐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벨라.”
보라색 눈동자가 희미한 떨림을 내비쳤다. 벨라는 울컥 치미는 것을 삼킨 채 또 펜을 움직였다.
그는 당장이라도 그 펜을 빼앗고 싶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가 도망가서……. 저 때문에 죽은 거예요?]
조금 전보다 힘이 들어가 잉크가 뭉치는 바람에 애써 쓴 글자들이 흉하게 번졌다. 그 엉망인 글자들이 딱 벨라의 마음 같았다.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지만, 굳이 쓰지 않아도 무엇을 썼는지 무엇을 원망하고 무엇에 또 한 번 상처 받고 있는지는 더없이 뻔했다.
왜 그랬어요? 죽일 필요까진 없었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꾸역꾸역 삼키는 울음 사이로 파묻혔을 물음들이 떠올랐다. 차라리 말로 마음껏 쏟아 낼 수 있었다면 그 괴로움을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었을까.
[혼자 있게 해 주세요.]
저를 보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는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펜을 꽉 쥐고 있는 벨라의 손에서 펜을 빼주고선 조용히 자리를 비켜 주었다.
벨리아르는 문에 기대선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문 너머로 들려오는 그녀의 흐느낌이 고스란히 심장을 저몄다.
“하지만, 저를 지켜 주려다 죽은 건 맞잖아요. 그럼 저 때문에 죽은 거고…….”
“……저 때문이잖아요.”
벨라는 모든 것이 다 저 때문이라고 말했다. 치치가 죽은 것도, 전쟁이 벌어져 애꿎은 사람들이 죽은 것도. 아마 사소한 일들까지 다 제 탓이라고 여기며 아파했겠지.
그러니 이안 에드레이즈의 죽음만은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 허술한 희망을 또 한 번 제 손으로 무너트렸다.
그깟 애새끼라고 무시하며 가만히 놔둔 결과는 결국 이런 파국을 불러왔다.
더 이상 조금의 여지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벨라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안 에드레이즈를 죽인 이유였고, 제 형제를 죽인 이유였다.
앞으로 벨라와 저 사이에 어떠한 불순물도 섞이게 하고 싶지 않아서.
그건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지금 이 순간이 걷잡을 수 없이 엉망이더라도 그건 분명 옳은 선택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작은 흐느낌이던 울음소리가 점점 커질수록 그의 괴로움도 몸집을 부풀렸다. 하지만, 이 역시 자신이 감내해야 할 것들이었기에 피하지 않았다.
그는 엉망으로 엉킨 관계의 실타래를 눈앞에 두고선 잠시 망연자실했다.
다시는 이어붙일 수 없도록 끊어지는 것이 두려워 차라리 엉키는 것을 택했다. 그러니, 이 비틀린 관계를 다시 돌려놓는 것 또한 오롯이 제 몫이었다.
설령 그 길이 끝을 알 수 없이 까마득하고 멀더라도.
* * *
“물이 넘기기 힘들면 이거라도 마셔.”
벨라는 그가 내민 찻잔을 보며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워낙 힘이 없어 그 사소한 표정 변화조차도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았다.
며칠 동안 물이든 음식이든 아무것도 넘기지 않아 그녀는 눈에 띄게 말라 가고 있었다. 메마른 입술이 가뭄 든 땅처럼 흉하게 갈라졌다.
그가 손수 차를 먹여주려 찻잔을 입 가까이 댔다. 벨라는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리며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러나 찻잔은 끈질기게 입가로 따라붙었다.
조금 짜증 난 그녀가 그의 손을 밀쳐 냈다. 맥없는 손길에도 그는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작은 실랑이에 찻물이 바닥으로 조금 쏟아졌다.
그는 결국 찻잔을 내려놓곤 젖은 손을 닦았다. 무겁게 떠다니는 공기 위로 낮은 한숨이 얹어졌다.
“못 먹는 거야, 아니면 먹기 싫은 거야.”
그는 협탁 위에 놓였던 노트와 펜을 그녀의 손끝에 걸리도록 놔주었다.
“쓸 수 있잖아.”
벨라는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노트에 무언가를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를 향해 침묵했다.
벨리아르는 펜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 있는 벨라를 보며 조용히 미간을 좁혔다.
“나한텐 한마디도 써 주기 싫어?”
간단한 대답을 바라는 것조차 그에겐 사치였다. 노트 안엔 보통 하녀를 향한 말들이 짧게 쓰여 있었다.
이렇게 철저히 무시당하는데도 그는 목소리를 높이는 대신 나직하게 물었다.
“내가 나갈까.”
그제야 벨라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화를 낼 거란 그녀의 예상과는 달리,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읊었다.
“내가 나가면 하녀가 물 한 잔을 가져다줄 거야. 남기지 말고 다 마셔.”
그는 가슴께에서 찰랑거리는 그녀의 머리칼을 살짝 쥐었다. 벨라의 어깨가 희미하게 굳어졌다.
“남기면 그 하녀의 목을 벨 거야. 다 마실 때까지 지켜보라고 할 거니까, 버릴 생각도 하지 말고.”
익숙한 협박이었다. 벨라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는 허리를 숙여 머리칼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곧이어 꿈처럼 몽롱한 목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미안해, 벨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