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햇살을 머금은 모래알은 부드럽고 따듯했다. 벨라는 맨발로 푹신한 모래 위를 거닐며 자그마한 미소를 머금었다.
“벨라, 사막에 핀 꽃 같아.”
이안은 모래언덕 위에서 사뿐사뿐 거니는 벨라를 보며 멍하니 감상을 내놓았다.
그 말에 그녀는 부끄러워하면서도 말간 웃음을 터트렸다. 쨍한 햇볕이 잘게 부서져 내리며 그녀는 더욱 반짝였다.
무지개처럼 찬란한 날이었다.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여기저기서 모인 외지인들이 모여 만든 마을은 황량해 보이지만 소담한 정이 넘쳤다.
벨라는 양동이를 들고서 모래로 지은 집을 빠져나왔다. 오아시스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에 물 내음이 섞여 들었다.
오아시스에 다다른 그녀는 물가에 쪼그려 앉아 능숙하게 물을 펐다.
‘너무 많은가?’
양동이 한가득 물을 채웠던 벨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을 조금 덜어 냈다. 그러다 물 아래로 무언가 아른거리는 것이 보였다.
가만히 물속을 들여다보니 일렁이는 수면 아래로 보라색이 번졌다. 시간이 지나 수면이 잔잔하게 가라앉고 나니 그 정체가 뚜렷이 보였다.
작은 보라색 꽃이 여러 개 달린 꽃줄기였다. 꽃을 본 벨라의 입가에 어여쁜 미소가 번졌다.
“우와, 물속에 꽃이 피었네.”
그녀는 곧장 물속으로 손을 넣어 꽃을 꺼냈다. 뿌리가 있을 텐데도 꽃은 원래 꺾여 있던 것처럼 쉽게 건져 올려졌다.
“음, 어디서 본 꽃 같은데…….”
보라색 꽃은 기이한 느낌을 불러왔다. 가만히 보고 있으니 세상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시가 벌어졌다. 이대로 땅이 훅 꺼질 것 같은 느낌에 벨라는 꽃이 올려진 손을 말아쥐었다.
“벨라!”
꽃을 버리려던 찰나, 익숙한 목소리가 등을 두드렸다. 뒤를 돌아보자 이안이 크게 팔을 흔들며 저를 부르고 있었다. 무언가 외치는 듯한데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안! 잘 안 들려! 뭐라고 했어?”
“어서 이리 와, 벨라! 거긴 위험해!”
벨라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가 위험하다는 거지?’
오아시스는 그리 깊지도 않아서 별로 위험한 것이 없었다. 대체 이안이 왜 그런 말을 할까, 고민하던 벨라는 무심코 물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곳엔 붉은 눈을 가진 남자가 있었다. 남자는 수면 위에 선 채로 손에 무언가를 감아 들고 있었다. 물속과 연결된 굵은 사슬이었다.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맞닿았다. 그 순간, 잔혹한 악마라도 본 듯 깊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꽃을 꽉 그러쥔 손이 덜덜 떨리면서도 펴지지 않았다. 꽃이 짓이겨지는 느낌이 생생했다.
벨라는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사슬에서 나는 건지, 철그렁거리는 쇳소리가 신경을 긁었다.
이안에게 돌아가려 걸음을 크게 내딛는 순간, 벨라는 중심을 잃고 모래 위로 풀썩 엎어지고 말았다.
“아!”
모래에 쓸린 무릎은 그렇다 치고 애꿎은 발목에서 홧홧한 통증이 느껴졌다. 떨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니 물속과 연결된 사슬이 제 발목을 휘감고 있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사슬을 한 바퀴 감아쥐고선 제게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그가 감아쥔 만큼 사슬이 물속으로 당겨졌다. 나직한 목소리가 목구멍을 콱 틀어막았다. 벨라는 하염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모래 위를 기었다.
이안은 여전히 저 멀리서 제게 손짓하고 있었다.
“이안……!”
아무리 소리쳐도 이안의 목소리는 제게 닿지 않았다. 모래를 바득바득 긁으며 필사적으로 앞으로 나아가려 했지만, 묶인 발목 때문에 제자리에서 버둥거리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이 그에게서 멀어지라 소리쳤다. 아등바등 모래 위를 기다가 발목을 쑥 잡아당기는 사슬 때문에 맥없이 끌려갔다.
“아악! 싫어……!”
기어코 물속에 빠지고 나서야 그는 더 이상 사슬을 잡아당기지 않았다.
몸을 적시는 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이곳이 작열하는 사막임을 순간 잊을 정도로.
그때, 이안의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벨라! 내가 갈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안 돼, 오지 마.
이안이 저를 향해 한 걸음을 떼자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나 오지 말라고 소리치려 숨을 들이켰을 땐 이미 늦었다. 갑자기 이안의 뒤에서 나타난 누군가가 그를 칼로 푹 찔렀다.
“이안! 아, 안 돼……! 안 돼, 이안! 아, 아…….”
이안은 끈 떨어진 장난감처럼 모래 위로 풀썩 쓰러졌다. 새빨간 피가 번지듯 눈앞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어느새 사막의 모래는 사라지고 주위는 온통 물이었다. 발이 바닥에 닿지 않았다.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가 시야를 마구 어그러트렸다.
차가운 바다 위엔 커다란 배가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저를 내려다보는 붉은 눈동자의 남자가 있었다. 추위에 파랗게 질려 가던 그녀의 입술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벨…… 리아르…….”
울렁이는 바다가 저를 집어삼켰다. 저 깊은 수면 아래로 꺼지며 그가 제게 뛰어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여전히 제 발목에 묶인 사슬은 그가 쥐고 있었다.
그는 물속까지 뛰어들어 기어코 저를 품에 안았다. 심장까지 얼릴 듯한 추위가 서서히 몸을 잠식했다. 그 순간에 안긴 그의 품은 마치 아늑한 지옥 같았다.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찰나의 온기에 홀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벨라는 따듯함을 찾아 그에게 매달렸다. 기어코 굵은 사슬이 온몸을 칭칭 휘감았다. 온기를 찾아 파고들수록 사슬이 빠듯하게 죄여 그에게 묶였다.
그는 다정한 손길로 저를 끌어안고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이어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네가 도망가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이건 다 네 잘못이야, 벨라.”
그는 잔인하게 속삭이고선 제 목을 틀어쥐었다. 거센 악력에 그녀는 괴로움을 토하며 마구 발버둥 쳤다. 그럴수록 점점 더 아래로, 더욱 깊게 가라앉았다.
“이 세상에 네가 도망갈 수 있는 곳은 없어.”
그의 말 한마디에 겨우 지탱하고 있던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 * *
먼동이 틀 무렵이었다. 어두컴컴했던 하늘에 푸르스름한 동살이 잡혔다.
벨리아르는 괴로움에 허덕이는 벨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넌 이만 가서 눈 좀 붙여. 밤이 늦었다.”
“제가 있는 게 불편하시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깊은 밤에 한바탕 소동을 치른 후, 에릭은 조용히 방으로 들어와 내내 자리를 지켰다. 숨 막히는 적막뿐인 방 안에 말소리가 섞인 것도 처음이었다.
“……네가 있다고 내가 불편할까.”
“그럼 계속 곁을 지키게 해 주십시오.”
“고집은. 마음대로 해.”
벨리아르만큼은 아니겠지만, 에릭 역시 마음속에 커다란 돌덩이를 하나 끌어안고 있었다.
그날 자신이 이안 에드레이즈에게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까지 치달을 일은 없지 않았을까.
“으…….”
그녀에게서 가느다란 신음이 새어 나올 때마다 둘은 숨을 죽였다. 이대로 그녀가 숨을 놓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것 없는 상황이었다. 높은 절벽 위에서 외줄을 딛고 서 있는 듯했다.
벨리아르는 협탁 위의 타월을 집어 들어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을 조심스레 닦아 주었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런 것뿐이었다.
한쪽엔 젖은 타월 여러 개가 쌓여 있었다.
“타월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깨끗한 타월이 동난 것을 본 에릭은 곧장 방을 나섰다. 어느새 해가 거의 올라온 바깥은 희뿌연 안개가 끼어 있었다.
“흐으…….”
동시에 그녀의 신음이 조금 더 짙어졌다. 점점 불안정해지는 모습에 그는 비탄한 숨을 내쉬며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차마 그 모습을 보기가 괴로워 결국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방 안을 뒤덮던 기분 나쁜 향이 매우 옅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보라색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모든 시간이 멈춘 듯했다. 붙잡고 있는 그녀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을 느낀 후에야 그는 다급히 정신을 차렸다.
벨라는 그를 보고선 죽음이라도 맞닥트린 사람처럼 가쁘게 숨을 헐떡이기 시작했다.
“……벨라!”
제정신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상태였다. 사시나무처럼 온몸을 떨며 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모습은 보는 사람까지 괴롭게 만들었다.
그러나 벨리아르는 그 불안에 휘둘리지 않은 채 그녀를 끌어안고서 차분한 목소리로 얼렀다.
“진정해. 천천히 숨 쉬어. 괜찮아.”
“아……. 흐, 으으…….”
“옳지. 잘하고 있어.”
작은 몸이 바르작거리며 그를 밀어내려 애썼지만, 오랜 시간 무의식에 빠져 있던 몸은 하나도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벨라. 잘했어. ……정말 잘했어.”
이내 힘이 빠지며 벨라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때마침 돌아온 에릭이 상황을 보곤 빠르게 의사를 불러왔다.
다행히 큰 고비를 넘은 상태라 걱정은 조금 내려놓아도 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저 지쳐서 잠든 것뿐이라고.
확실히 잠든 그녀의 얼굴은 전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다. 벨리아르는 그제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 * *
“……큰 고비는 넘겼으니……. ……최대한 안정을 취하실 수 있도록……. ……제가 준비해서…….”
낮은 말소리가 귓가에서 흐릿하게 웅웅거렸다. 이어 문이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누군가 다가오는 소리는 묻혔다가, 또 가까이 앉는 소리는 비정상적으로 컸다. 서서히 되살아나는 감각들이 낯설었다.
따뜻하지도 차갑지도 않은 무언가가 이마에 닿았다. 그것은 머리칼을 제치고 들어와 부드럽게 머리를 어루만졌다. 익숙한 손길이었다.
살며시 눈을 뜨자 부연 세상 사이로 붉은 눈동자만이 선명했다. 그의 시선에 얽히는 순간, 벨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또 한 번, 죽지 않았음에 좌절했다.
“……벨라. 정신이 좀 들어?”
“…….”
침을 꿀꺽 삼키자 모래알을 삼킨 듯 목구멍이 따가웠다. 손끝을 까딱이거나 사소한 것 하나하나에도 몸 곳곳이 작열하듯 고통스러웠다.
벨라는 힘겹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세상이 까맣게 물들 때마다 그의 모습이 차츰 선명해졌다.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기억하고,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