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르자 베른에도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다른 지역의 봄보다 조금 더 쌀쌀하긴 하지만, 떡잎이 자라나고 봄꽃이 피어나니 명백한 봄이었다.
베른의 영지민들은 다른 곳보다 느리게 찾아오는 봄인 만큼 더욱 활기차게 반겼다.
거한 축제까지 열며 떠들썩하게 봄을 맞이했지만, 북쪽 깊이 틀어박힌 공작성은 마치 다른 세상인 것처럼 일 년 내내 한겨울이었다.
그러나, 다시 찾아온 봄은 얼어붙은 성으로 살며시 손길을 뻗치기 시작했다.
정원의 식물을 모두 갈아엎고 새로이 꾸미라는 지시가 내려온 지 일주일이었다. 연일 내린 비 때문에 미뤄 두었던 작업이 오늘에야 시작되었다.
“아니, 아니. 여긴 꽃을 심을 자리니까 이렇게 넓게 파면 안 된다니까요. 이리 줘 보세요!”
“…….”
시에나가 답답한 듯 삽을 뺏어 들어도 사용인은 무표정한 얼굴로 멀뚱히 서 있기만 했다.
수도에서 온 하녀들은 성의 사용인들에게 말 한마디 붙이는 것조차 힘들어했지만 시에나는 예외였다.
그녀는 텅 빈 눈동자 앞에 대고 열심히 삽질을 해 보였다.
“자, 이렇게, 이렇게! 무슨 말인지 알겠죠? 네?”
몇 번을 끈질기게 물으니 사용인은 결국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시에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손뼉을 짝짝 쳤다.
“좋아요. 우리 조금 더 힘내 보자구요!”
사용인은 다시 삽을 든 채 묵묵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시에나의 노력이 아주 헛된 건 아니었는지, 삽질이 전보단 조금 더 섬세해졌다.
이곳저곳 참견하고 다니는 시에나를 보며 제인이 소렐 부인에게 넌지시 말을 붙였다.
“……저 둘 말이에요, 정말 대화가 되고 있긴 한 거예요?”
아무리 봐도 혼자 주절주절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러자 소렐 부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렴 어떠니. 그래도 시에나 덕분에 분위기는 활기차고 좋구나.”
시에나와 늘 티격태격하는 제인 역시 그 말에는 흔쾌히 동의했다.
제인은 성에 온 첫날부터 수도의 저택이 그리워졌다. 아데인 경은 너무 무섭고, 가끔 마주치는 공작님 앞에선 숨 쉬는 것조차 힘들고, 사용인들은 하나같이 생기가 없었다.
왜 유령 성이라고 불리는지 아주 잘 알 것 같은 곳에서 시에나의 활기찬 모습은 한 줄기 햇살과 같았다.
“아, 제인! 꽃은 조심해서 다루라니까! 줄기가 다 꺾이잖아!”
물론, 이렇게 사사건건 트집 잡으며 귀찮게 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아이, 조금밖에 안 꺾였어! 다시 세우면 아무 문제 없다니까.”
“넌 맨날 나보고 칠칠치 못한다고 구박하더니. 네 손길은 너무 억세!”
“오냐. 이 억센 손길 맛 좀 보련?”
제인이 소매를 걷어붙이자 시에나가 꺄악, 하고 비명을 질렀다.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와 함께 본격적인 추격전이 시작되자 보다 못한 소렐 부인이 중재에 나섰다.
“쉿. 이제 그만하고 목소리 좀 낮추렴. 여긴 애플리던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니?”
소렐이 사뭇 엄한 목소리로 경고하며 건물의 높은 곳을 눈짓했다. 지금 가꾸고 있는 정원은 벨라의 침실, 즉 벨리아르의 침실에서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다.
그 의미를 빠르게 눈치챈 둘은 숨을 들이켜며 얼른 소리를 죽였다.
“……혹시 공작님께서 보고 계셨나요?”
시에나는 차마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볼 용기는 없는지 동그란 눈을 굴리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덕분에 소렐 부인은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단속하느라 애써야 했다.
“계속 그렇게 시끄럽게 굴면 나 같아도 바깥을 한번 내려다보겠구나. 그럼 당연히 화를 내시지 않겠니?”
이후로 둘은 입을 꾹 다문 채 정원 가꾸기에 집중했다. 벨리아르 공작의 침실에서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정원은 연한 색감의 수수한 꽃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한창 꽃 심기에 열중이던 시에나의 눈에 낯선 사람이 사용인을 따라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외양에서 풍기는 느낌을 보니 의사인 것 같았다.
시에나는 소렐 부인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속삭였다.
“오늘도 새로운 의사죠?”
“그런 것 같구나.”
삼 일에 한 번꼴로 대륙 각지에서 의사들이 찾아오고 있지만, 아직까지 긍정적인 답을 내놓은 의사는 없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하지만 벨라는 분명 미약하지만 숨을 내쉬고 있었다. 그것이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이유였다.
시에나는 그녀를 닮은 하얀 꽃을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아가씨께서 얼른 깨어나셔야 할 텐데…….”
“곧 깨어나실 거야. 모두가 노력하고 있으니 아가씨께서도 분명 그 마음을 아실 테지.”
“행복한 꿈을 꾸고 계시겠죠? 그래서 아직 깨고 싶지 않으신 걸 거예요.”
“그러니 우리가 어서 정원을 예쁘게 가꾸어 놓자꾸나. 그래야 깨어나셨을 때 더 기뻐하시지 않겠니?”
시에나는 고개를 들어 햇살이 부딪치는 창을 바라봤다. 벨라의 곁을 지키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어렴풋이 비쳤다.
* * *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내려놓은 하녀가 조용히 방을 나섰다. 협탁 위에 놓인 머그잔에서 포근하고 고소한 향이 번졌다.
모든 소리가 잠든 깊은 밤이 찾아오면 그는 항상 따뜻하게 데운 우유를 내어 오라 지시했다.
하염없이 꿈속을 여행하는 벨라 곁에서 우유는 제 온기가 다할 때까지 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다.
벨리아르는 서류를 넘기며 그녀가 따듯한 우유를 마시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장작이 타들어 가는 소리, 가만히 종이가 스치는 소리, 그 사이로 스미는 벨라의 옅은 숨소리.
그는 벨라의 곁에서 영겁처럼 긴 시간을 감내하고 있었다. 모든 순간순간이 끝을 알 수 없는 실타래처럼 길게 늘어졌다.
그가 서류를 손에서 내려놓았을 땐 이미 우유가 차게 식어 있었다. 그는 짧은 숨을 내쉬며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의 무게 때문에 침대 한쪽이 살짝 꺼지는데도 벨라는 깊은 잠에서 깨지 않았다.
“……이제 그만 와 주면 안 될까.”
지친 건 아니었다. 벨라가 저를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수없이 긴 시간도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었다. 자신이 가진 거라곤 무한한 시간뿐이니.
저를 떠나지 않겠다고 확실한 약속만 해 준다면…….
살며시 욕심을 내다가도 일정한 숨소리에 문득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벨라가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그는 벨라의 입술에 입을 맞추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다 다시 느릿하게 눈꺼풀이 들어 올려졌다.
그는 입술을 떼곤 제 손등을 그녀의 입술에 대 보았다. 단정한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확실히 평소보다 뜨거운 숨결이 손등을 덥혔다.
“벨라.”
대답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불안한 마음에 살며시 불러 보았다.
“…….”
당연하게도 돌아오는 대답은 그저 색색 내쉬는 숨소리뿐이었다. 그 숨소리가 점점 일정한 궤도를 벗어나고 있었다.
남이 듣기엔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변화였으나, 온종일 그녀의 곁에서 시간을 보내는 그에겐 확연한 신호였다. 더불어 그녀를 둘러싼 죽음의 향이 더욱 짙어졌다.
협탁 위에 놓인 종을 치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이 들어왔다. 그는 벨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지시했다.
“당장 의사를 데려와!”
평소 그답지 않게 격앙된 목소리였다. 그의 한마디 지시에 성내의 사용인들은 조용히, 그리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용인이 성내에 머무는 주치의를 깨우러 간 동안, 그는 벨라의 손을 붙잡으며 간절히 읊조렸다.
“안 돼, 벨라. 여기서 이렇게 가 버리면…….”
모든 것을 가진 그는 늘 벨라 앞에선 한없이 무력해졌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가지 말라 빌며 붙잡는 것뿐이었다.
이럴 때면 저 역시 영원한 시간을 살아갈 뿐,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지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건 무엇보다 쉬웠지만, 뒤늦게 줄을 던져 봤자 닿지 않았다.
벨라는 지금 어디쯤 있을까.
새까만 어둠 속에 웅크려 있을 그녀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의사가 찾아와 한동안 분주한 조치가 이루어졌다. 그는 한발 물러선 채 가만히 지켜보곤 있었지만, 한눈에 봐도 마땅히 손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의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술만 달싹거릴 뿐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벨라의 불안정하게 헐떡이는 숨소리만이 고요한 방 안을 가득 채웠다. 당장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라 지켜보던 에릭은 결국 조용히 고개를 떨궜다.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엔 괴로워 보이는 그녀의 모습만이 가득 들어찼다. 입술 새로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말해.”
의사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다 겨우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듯싶습니다.”
더 이상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삶과 죽음, 운명과 시간의 순리는 신조차 관여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한낱 인간이 그녀의 상태를 호전시킬 수 없다고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한편으론 제 앞에서 저런 무능한 소릴 지껄이는 의사를 철저히 짓밟아 놓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다.
그 불씨는 벨라의 숨결 하나에 맥없이 사그라들었다.
“……나가.”
낮은 목소리에 모두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그녀가 힘겹게 내쉬는 숨결 하나하나가 모두 날카롭게 벼린 날붙이 같았다. 검이 되어 저를 베고, 창이 되어 저를 찌르고, 도끼가 되어 마음을 거세게 내리찍었다.
그는 조용히 침대에 걸터앉아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열이 올라 평소보다 뜨거운 손에 간절히 힘을 실었다.
이 온기가 마지막 생명을 쥐어짜 내느라 타오르는 절실한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기에.
“……그래, 너는 이 삶을 놓아 버리면 끝이겠지. 근데 난 아니야. 나는……. 네가 죽으면 따라갈 수도 없어.”
네가 있는 곳 어디든 가겠지만, 그곳이 지상이 아니라면 나는…….
“그저 네가 다시 내게 와 주기만을 기다려야 하는데……. 한번 겪어 본 그 시간이 너무 괴롭고 끔찍해서 다시 겪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겁이 나.”
제 심장을 꽉 틀어쥐고 있는 건 오로지 두려움이었다. 두 번이나 같은 실수를 하고 나니 자신이 없어졌다.
그녀에게 수없이 상처 주고 괴로워하는 이런 순간들이 제게 주어진 진정한 벌일까 봐.
이 원죄를 영원히 끌어안은 채 다시 그녀를 기다리고, 그녀를 사랑할 그 시간들이 너무도 두려웠다.
“……내가 너무 늦게 깨달았어. 어리석은 감정에 휘둘려서 사랑하기만 해도 모자란 너를 또, 내가…….”
진심이 더해질수록 목소리가 먹먹해졌다. 그는 고개를 떨군 채 그저 그녀의 손만 간절히 붙잡았다.
지금 분명 괴로울 텐데, 편안히 보내 주는 것이 그녀를 위하는 일임을 알면서도 도저히 이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이 제 욕심이고 이기심이라는 것을 안다.
“……한 번만, 딱 한 번만 내게 기회를 줘.”
이렇게 가 버리면, 또 너를 잃은 후에 내가 어떻게 될지 감히 헤아릴 수가 없어. 한 번만 더 나에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염치없지만, 너는 항상 너그러웠으니 한 번만 더 이렇게 부탁할게. 제발 네게 사죄할 기회를 줘. 그리고 사랑할 기회를 줘.
그는 괴로워하는 벨라를 끌어안은 채 끊임없이 빌고 빌었다.
그의 세상, 그의 신은 온전히 벨라였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