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와……. 정말 수도의 저택이랑은 비교도 안 되는 크기네요.”
내내 창에 달라붙어 있던 시에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한눈에 담기지 않는 거대한 성을 바라보는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순수하게 감탄하는 모습을 보며 소렐 부인은 남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큼 행동에 더 유의해야 한단다. 절대 경거망동하지 말고. 사고 치지 않도록 항상 행동거지에 조심하고…….”
“우와…….”
드넓게 펼쳐진 정원을 보며 시에나는 또 한 번 탄성을 내질렀다.
“내 말 듣고 있는 거니?”
“그럼요, 그럼요. 무조건 조심할 테니 걱정 붙들어 매셔요.”
그리 답하면서도 시에나는 성 곳곳에 정신없이 시선을 빼앗겼다. 결국, 소렐 부인이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음으로써 잔소리는 막을 내렸다.
“그나저나 공작님께서 저희를 왜 부르신 걸까요……? 여태까지 저택의 사용인들을 성으로 부르신 적은 단 한 번도 없으셨잖아요.”
수십 년간 공작 저에 몸담으며 두터운 신임을 얻고 있는 하녀장, 소렐마저도 베른의 성에 발을 들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시에나를 타박하긴 했지만 소렐 역시 소문으로만 듣던 성이 신기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우리가 공작님의 생각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니.”
“어찌 됐든, 전 너무 기분이 좋아요! 오랜만에 아가씨를 뵙는 거잖아요.”
“아가씨 뵙기 전엔 조금 진정하고 들어가렴. 혹여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되는구나.”
“제가 그렇게 대책 없는 말괄량이인 줄 아세요?”
“그럼 아니니?”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돌아오는 물음에 시에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여태 자신이 친 사고들이 주마등처럼 흘러갔다.
“……뭐, 어쨌든요! 걱정하지 마셔요.”
“시에나, 여긴 애플리던과 다르단다. 공작님께서 지내시는 곳이야. 무슨 뜻인지 알겠니?”
“그만큼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저, 잘할 수 있어요. 아가씨를 뵈면 이렇게 얌전히 인사 올릴게요.”
시에나는 치마의 양 끝을 살짝 잡고선 다소곳이 무릎을 낮추며 천진한 미소를 곁들였다.
“어때요?”
내내 긴장으로 표정이 굳어 있던 소렐 부인은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가씨께서 널 보면 좋아하시겠구나.”
“그럼요.”
그러나 시에나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창백한 안색으로 누워 있는 벨라를 보며 시에나는 꾸역꾸역 울음을 참아야 했다.
* * *
처음 제국과 모르가타 간의 전쟁이 발발했을 땐 온 대륙이 떠들썩했었다. 기실 모르가타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선 이 전쟁에 은근한 기대가 있었다.
이백여 년 전 일어났던 거대한 정복 전쟁을 승리로 이끈 벨리아르 공작의 모습을 생생히 전해 들을 기회이니, 제삼자로선 그저 재미난 불구경일 뿐이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벨리아르 공작이 전선에 합류하지 않은 채 베른으로 돌아갔다는 소식이 퍼졌고, 아쉬워하는 만큼 두 나라 간의 전쟁에도 시큰둥해졌다.
그렇게 관심이 시들해진 지 몇 달째, 다시 한번 거대한 땅을 소란스럽게 달군 소식이 전해졌다.
벨리아르 공작이 모르가타에 방문해 왕자에게 직접 사과의 뜻을 전했다.
단순한 사실은 여느 때처럼 잔가지를 뻗쳐 무수한 소문을 만들어 냈다.
벨리아르 공작이 모르가타 왕자의 손목을 벤 것은 놀랍긴 했지만, 그리 경악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오만하고 잔혹한 공작이 순순히 사과했다는 것은 충분히 경악할 만한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의 행동에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 얘기 들었어? 이번에 벨리아르 공작이 모르가타 왕자에게 사과한 거 말이야. 그거…… 사실은 사랑하는 여인 때문이었대.”
“뭐?”
“놀랍지? 근데, 그게 다가 아니야. 그 사랑하는 여인이 글쎄 그 아끼던 피후견인이라지 뭐야?”
“……먼 친척이라고 하지 않았어?”
“‘먼’이잖아, ‘먼’. 그 정도면 친척이라고 부르기에도 우습지. 어쩐지 그 냉혈한이 피후견인을 너무 아낀다 했어. 나는 진즉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니까?”
“얘도 참. 그게 말이 되니?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인 하나 때문에 그 벨리아르 공작이 허리를 숙였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는데?”
“이 아가씨야,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위대한 건 사랑이란다. 그럼 다른 어떤 이유로 공작의 행보를 설명할 수 있겠어?”
“뭐…….”
“그거 봐, 없지? 분명 사랑이라니까. 그나저나……. 그 여자는 부럽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그러네……. 상대가 벨리아르 공작이라니.”
때로는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소문이 도리어 사실을 가려 주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그는 여인네들의 수다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유유히 거리를 거닐었다. 그가 딛고 있는 땅은 베른에서는 멀리 떨어진, 서쪽의 소도시였다.
원체 유약한 기질의 황제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해서 모르가타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어느 영지에 머물든 그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기에 소도시는 여느 때처럼 평화로웠다.
사람들은 지나가는 그에게 잠시 시선을 빼앗겼지만, 아무도 그가 소문의 벨리아르 공작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까. 잔혹한 성정으로 소문난 그 공작이 소박한 꽃집에 들러 꽃을 고르고 있을 거라고.
“어떤 꽃을 찾으세요?”
꽃집 주인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느릿한 눈길로 꽃들을 훑어볼 뿐 답을 주지 않았다. 답을 주지 않았다기보단 못했다는 것이 마땅했다.
꽃을 사 주었더니 좋아하던 벨라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꽃집 앞에 서긴 했는데, 그녀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공작님, 저 꽃 한 송이만 사 주시면 안 될까요?”
처음으로 제게 무언가를 사 달라고 청하던 모습은 떠올릴 때마다 저 아래 웅크려 있던 서투른 감정을 살며시 두드렸다.
어떤 꽃이 좋냐고, 직접 골라 보라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땐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당연하게 자신이 그녀의 손에 들릴 꽃을 골랐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 줄게요.]
작게 쓰인 꽃말을 보곤 무심코 고른 꽃이었다. 이름조차 모른 채 성의 없이 고른 꽃을 받고도 벨라는 세상을 다 가진 듯 기뻐했었다.
진열된 꽃들을 살펴보니 그때 그 꽃은 없었다. 색색의 꽃들을 두고서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벨라가 무슨 색을 좋아하더라.
그녀에게 어울릴 만한 꽃을 고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늘 그렇게 골랐고, 그때마다 벨라의 의견을 물을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벨리아르는 길거리 한가운데에서 새삼 깨달았다. 자신은 그녀의 절망과 불행은 가득 쥐고 있었지만, 행복이라는 감정은 티끌조차 닿지 못했다는 것을.
벨라가 좋아하는 게 무엇이지?
그 간단한 물음 앞에서 그는 한없이 무력해졌다. 하여 염치없게도 빛바랜 기억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블루벨 꽃이 있나?”
“마침 오늘 새벽에 딱 들어왔어요. 그런데, 귀한 꽃이라 수량이 많진 않아요. 몇 송이나 필요하세요?”
“있는 대로 모두.”
블루벨은 귀족들 사이에 인기 있는 꽃이라 제법 값이 나갔다. 그런 꽃을 모두 달라고 하니, 주인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사랑하는 분께 드릴 꽃인가 봐요. 예쁘게 묶어 드릴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주인은 허둥지둥 안으로 들어가더니 잠시 후, 제법 솜씨 좋게 만든 꽃다발을 들고나왔다.
벨리아르는 꽃다발을 들고 걷다가 잠시 멈춰 서서는 가만히 보라색 꽃망울을 만지작거렸다.
꽃을 사고 생각해 보니 정말 쓸데없고 멍청한 짓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의 화원에 널려 있는 블루벨을 굳이 이곳에서 사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는 이 멍청한 짓을 후회하지 않았다.
벨라는 분명 이 꽃다발을 받고 기뻐할 테니.
벨리아르는 영주의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지구력 좋은 말을 한 필 내어 오라 지시했다.
원래대로 황제와 함께 마차를 타고 수도에 들렀다가 베른으로 돌아가는 일정은 너무 길었다. 적어도 방금 사 온 꽃다발이 싱싱함을 유지하기에는 말이다.
“에드윈, 나는 바로 베른으로 갈 테니 너는 천천히 귀환하도록 해.”
“무슨 급한 일이 있으십니까?”
진지하게 묻는 얼굴에 대고 차마 ‘꽃이 시들어서.’라는 대답은 할 수 없었다.
“……그래. 급한 일이 있어서.”
꽃다발이 상하지 않도록 고이 포장해 베른으로 달려가면서도 그는 자신이 미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국의 왕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도, 고작 꽃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먼 거리를 쉬지 않고 달려가는 것도.
자신이 망쳐 놓은 그녀의 세상에 조금이라도 색을 입힐 수 있다면.
침실의 문을 열기 전 짧은 기대가 스쳐 지나갔다.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혹시 벨라가 깨어나진 않았을까.
그렇다면 제게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을 리 없으니 헛된 기대라는 걸 알면서도 잠시 소망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요한 정적만이 그를 맞이했다.
그는 그녀의 베개 옆에 꽃다발을 놓아두곤 작은 손을 잡았다. 따뜻하게 온기가 도는 손을 잡는 것만으로 그동안 쌓였던 갈증이 해소되었다.
그는 손끝으로 흰 손등을 살살 매만지며 나직이 읊조렸다.
“내가 너무 늦었지.”
“…….”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도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다녀온 길을 읊어 주었다.
모르가타의 왕자에게 직접 사과하여 평화롭게 전쟁을 마무리했고, 셀리온에 들러 피해 조사도 철저히 했다는 것까지.
이내 손수 사 온 꽃다발에 눈길을 주었다.
“꽃을 사 주고 싶어서 꽃집에 들렀는데,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몰라서.”
전에는 블루벨을 좋아했었는데.
과거의 벨라와 현재의 벨라는 분명 다른 삶을 살고 있음에도 묘하게 닮아 있었다. 무심코 내뱉는 말들이 그러했고, 작은 것들을 지나치지 못하고 눈길을 주는 것이 그러했다.
“일어나면, 무슨 꽃을 좋아하는지 내게 말해 줄래?”
평온하던 그녀의 얼굴이 미세하게 흐트러졌다. 그는 그녀와 맞잡은 손에 살며시 힘을 더했다.
가끔 꿈을 꾸는 듯 이렇게 표정에 변화가 생기곤 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벨라는 아직도 자신이 만든 지옥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