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그러니 그녀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속여서는 안 되었다.
저 몰래 제 형제를 만나고, 그 사실을 숨기고, 조용히 저를 떠날 생각을 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그 악몽 같은 현실이 반복될까 두려워 더욱 그녀를 몰아붙이고 모질게 굴었었다. 그렇게 발악했는데, 그 모든 짓이 결국은 벨라를 낭떠러지로 미는 꼴이었다.
그녀가 없는 석 달은 온전하지 못했다. 믿기지 않았다가, 초조하고 불안했다가, 또 미칠 듯이 화가 났다가.
그러다 배 위에서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분노가 말끔히 씻겨 나가 버렸다. 그저 얼른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작은 몸을 끌어안고, 부드러운 입술에 입을 맞추고, 두려움에 떠는 몸을 다독여 주고 싶었다.
그녀가 무엇 때문에 그리 필사적으로 도망쳤는지 미리 알았더라면…… 그랬다면, 그 아픔을 조금은 덜어 줄 수 있었을 텐데.
왜 제게 말하지 않았을까 싶다가도 자신이 그녀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상기하고선 씁쓸한 마음을 삼켰다.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고개를 묻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그녀의 가느다란 숨소리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너는 나를 위해 매번 희생하고 있었구나. 나는…… 그런 너의 마음을 참 무참히도 짓밟았구나.
“……벨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겨우 버티고 있던 무언가가 처참히 무너져 내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끝내 인정하지 못했다. 끝까지 제가 추측하는 것이 아니길 바랐다. 그저 모두 다 지독한 우연이길. 그 이름도, 그녀가 남겼던 상처도, 다 틀렸으면 했다.
왜 미처 깨닫지 못했을까. 자신은 절대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멀고 먼 길을 돌아 결국은 제자리였다.
뒤늦게 그 마음을 깨달은 지금, 이 관계는 온전했던 모습이 떠오르지 않을 만큼 아득히 뒤틀려 있었다.
제게 주어진 진정한 벌은 벨라였다.
* * *
피가 말라붙은 손으로 가녀린 손목을 쥐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부러질 것 같아 손길이 상당히 조심스러웠다.
손목을 지그시 감싸 쥔 채 일정하게 뛰어 대는 맥박을 느끼며 숨을 내쉬었다. 전해지는 맥박이 약해지면 그 숨 역시 옅어졌다.
그 뒤로 이틀이 흘렀다. 평소엔 짧게 스쳐 가던 하루하루가 지금은 영겁의 시간처럼 길었다.
“……안 오실까 봐 걱정했어요.”
“내가 오지 않았던 적이 있어?”
“며칠간 안 오셨잖아요.”
나를 기다리던 너 역시 이런 마음이었구나.
대놓고 원망하지도 못하고, 속상한 마음만 희미하게 내비쳤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 위로 자조적인 미소가 스몄다.
“……그래서 이리 심술을 부리는구나.”
더한 원망을 쏟아 내도 상관없었다. 눈을 떠 다시 저를 바라봐 주기만 한다면. 아무리 욕하고 때려도 상관없으니 일어나 주기만 바랐다.
아무것도 몰랐을 땐 쉬웠다. 그저 원망하고 미워하고, 부정적인 감정으로 그리움을 덮으면 그만이었으니.
하지만, 영원히 속죄 받지 못할 마음을 떠안은 채 다시 그녀를 기다리는 건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언제가 됐든 깨어나 주기만 한다면 무엇이든 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속으로 끊임없이 속죄를 읊었다.
벨리아르는 이틀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벨라의 곁을 지켰다.
팔과 손은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로 엉망이었다. 그 몸으로 차가운 바닷물에 뛰어들기까지 했으니. 보통 사람이라면 진작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였다.
조용히 들어온 에릭이 여전한 그의 모습을 보곤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언제까지 이러고 계실 겁니까?”
에릭이 평소보다 조금 더 버릇없이 굴어도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텅 비어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저 벨라에게 매여 있었다. 에릭이 긴 한숨을 더했다.
“상처가 심합니다. 계속 그렇게 두면 정말 큰일 납니다. 다시 의사를 부를 테니…….”
“이안 에드레이즈는.”
갈라진 음성이 낮게 깔렸다. 이틀 만에 무언가 입을 연 그는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죽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나중에 벨라가 찾을 수 있도록 적당한 곳에 묘지를 세워. 그리고…… 그리고.”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던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며 주먹을 꽉 그러쥐었다. 겨우 피가 멈췄던 상처가 또 벌어지며 피가 배어 나왔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건 에릭뿐이었다. 그가 내뱉은 숨이 잘게 떨렸다.
“……에릭, 내가 또 뭘 해야 할까.”
뭘 어떻게 해야 벨라가…….
그는 나직이 중얼거리다 벨라의 이름이 나온 순간 말을 삼켰다. 목이 먹먹히 잠겨 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알지 못하는 에릭으로서는 그저 안타까운 마음이었다. 막연히 벨라에 대한 마음을 깨닫는 계기가 있었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제 주인을 이토록 무너트릴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우선 상처부터 치료하십시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을 때 주인님의 이런 모습을 보면 어떤 얼굴을 하겠습니까.”
이 순간, 에릭은 처음으로 제 주인이 평범한 사람처럼 보였다.
* * *
연일 내린 봄비에 겨울의 흔적이 다 녹아 없어졌는데도 공작성만큼은 얼음으로 둘러싸인 것처럼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성의 사용인들은 평소보다 더욱 숨죽인 채 존재감을 지웠다. 주인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거스르지 않으려는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에릭 역시 이젠 벨리아르가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모습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심지어 그가 손수 젖은 타월로 그녀의 손을 닦아 주고 있어도 전혀 놀라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벨라는 깊은 잠에 빠진 모습으로 평온히 누워 있다가도 이따금 열이 오르며 숨이 가빠지곤 했다.
그는 제 모든 시간을 그녀의 곁을 지키는 것에 쏟아부었다.
“로드릭 경에게서 온 보고서입니다.”
“소만에서 오는 의사는 언제 도착하기로 했지?”
“곧 도착할 시간이 되었습니다. 도착하는 즉시 이곳으로 안내하겠습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요즘은 제법 바삐 움직였다. 제국 내에서 실력 좋기로 소문난 의사들은 물론이고 타국의 명의들까지 불러들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한결같이 별다른 방법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그는 떠다니는 희망의 티끌조차 버리지 못했다.
벨리아르는 버릇처럼 그녀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로드릭이 보내온 보고서를 훑었다.
그의 미간이 살며시 좁아졌다.
로드릭의 보고서 때문이 아니라, 점점 말라 가는 것이 느껴지는 벨라의 손 때문이었다.
그는 멸할 수 없는 몸이니 생명이 깎이진 않겠지만, 그녀가 깨어나지 못하는 동안 그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절망이 손을 뻗어 올수록 그는 희망의 불씨를 키우려 애썼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 제게 오롯이 원망을 쏟아 낼 수 있도록.
“셀리온에 파견된 군사들을 모두 철수하라고 해.”
“……군사들을 말입니까?”
“그래. 모르가타 쪽에는 내가 직접 서신을 보내겠다. 에드윈에게 차후 일정 비워 놓으라 전하고.”
그 말인즉…….
“……전쟁을 끝낼 생각이십니까?”
“의미 없는 전쟁을 더 이상 끌 필요는 없지.”
“……죄 없는 사람들이 다칠 거예요.”
“……저 때문이잖아요.”
벨리아르는 솔직히 인정했다. 이 전쟁은 온전히 자신의 심술로 벌어진 전쟁이었다.
그날, 그녀의 손목을 잡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왕자의 모습을 본 순간 제 감정을 통제하지 못했다. 그녀의 슬픔을 어루만져 주는 것보다 제 욕심이 앞섰다.
벨라가 깨어났을 때, 아직도 전쟁이 끝나지 않은 채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슬퍼할 테지. 그러니 이 전쟁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의 생각을 눈치챈 에릭이 설핏 인상을 찌푸렸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 단순히 군사를 철수하는 것만으로 전쟁을 끝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제국이 먼저 꼬리를 내린 셈이고, 그렇게 되면 모르가타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하는 건 마땅한 절차였다.
모르가타에서 요구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이 사태를 빚은 벨리아르 공작이 직접 찾아와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
단순히 상상하는 것만으로 에릭은 표정을 굳히며 주먹을 꽉 틀어쥐었다.
“그럼 차라리 원래 계획하셨던 대로 모르가타의 수도를 함락시키라고 명령해 주십시오. 제가 책임지고…….”
“에릭, 나는 분명 네가 해야 할 일을 지시했어.”
“…….”
부드러운 눈빛은 벨라를 향해 있었지만, 에릭에게 내리꽂힌 음성은 결코 유하지 않았다. 에릭은 얼음 창에 몸을 꿰뚫린 것처럼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에드윈과 함께 다녀올 테니, 너는 성에 남아서 벨라를 살피고 있어. 혹시 그사이에 깨어나거나 상태가 불안정해지면 바로 알리도록 해.”
아마 그는 어디에 있든 무슨 상황이든, 벨라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된다면 곧바로 귀환할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벨라가 수도에 있을 때 정을 붙인 하녀들이 있다고 했었지.”
“예. 주방 일을 돕던 하녀 한 명과 친하게 지내셨고 하녀장과도 제법 사이가 좋았습니다.”
“둘을 포함해서 하녀들 몇을 성으로 불러. 벨라가 불편해하지 않을 이들로만 골라서.”
여태 요리사나 정원사 같은 특수한 직군을 제외하고 일반적인 사람을 성내에 사용인으로 들인 적은 없었다.
에릭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답한 뒤 방을 나섰다.
견고하게 성을 감싸고 있던 얼음벽이 조금씩 녹아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