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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50)화 (150/180)

150화

“최선을 다해서 할 수 있는 처치는 모두 했습니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리셨고…… 깨어날 수 있을지는…….”

에릭이 손을 들어 의사의 말을 제지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의사는 그의 눈치를 살피곤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의사의 말대로 더 이상 할 수 있는 조치는 없었다. 그저 기적을 바라며 기도할 뿐. 에릭은 조용히 사람들을 물리고 저 역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는 차분히 내려앉은 그녀의 눈꺼풀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든 것처럼 평온한 얼굴이었다. 얕지만 분명 숨을 내쉬고 있고, 일정하게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그 생명이 끊어질까 싶어 벨리아르는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벨라를 응시했다.

익숙한 죽음의 향이 풍겼다. 겉으로는 한없이 평온해 보이지만, 그녀는 깊은 무의식 속에서 하염없이 헤매고 있을 것이다.

그는 벨라가 자신을 찔렀던 칼을 만지작거리며 허망한 웃음을 내뱉었다. 어쩜 이리도 지독하게 반복되는지.

힘없이 늘어진 손에 칼을 쥐여 주었다. 그 손을 붙잡은 채 칼날로 다른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살며시 칼날을 쥐자, 살갗이 베이며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짙붉은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그는 남의 상처를 보듯 무표정한 얼굴로 제 손바닥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당연하게도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그녀에게 베였던 팔이 고스란히 아픔을 전하는데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내 삶을 네게 줄게. 약속해. 나를 죽일 수 있는 건 벨라, 너뿐이야.”

신의 맹약은 이토록 질기고 철저했다. 기어코 다시 한번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받아들일 수 있었다.

벨라, 네가 정말 다시 내게 왔구나.

그 순간, 쇳소리처럼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뇌리를 파고들었다.

[어서 일어나! 당장 일어나서 찌르란 말이야!]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붉은 눈동자가 그녀의 손에 쥐어진 칼과 제 손을 느릿하게 훑었다.

[답답하긴! 그렇게 누워 있을 때가 아니라고! 당장 그를 죽여──!]

처절한 절규 같은 외침이 머릿속을 쾅 울리며 메아리쳤다.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었다. 그는 벨라의 손에서 칼을 빼내 으스러트릴 듯이 꽉 쥐었다.

네놈이었구나.

예전에도 엘리아스가 똑같은 칼을 벨라에게 선물로 주었었다. 그때도, 벨라는 제게 가라고 외치다 결국엔 이 칼로 스스로를 찔렀었다.

“……오지 마. 가. 제발 좀, 가란 말이야!”

“제발, 제발 가라고 하잖아! 꼴도 보기 싫으니까 제발 좀 가란 말이야!”

그의 입술 새로 또 한 번 나직한 조소가 새어 나왔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놀랍도록 상황이 비슷하지 않은가. 마치, 누군가 정성스레 짜 놓은 연극처럼.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복도 벽에 기대어 서 있던 에릭이 살짝 놀라며 그의 뒤를 따랐다. 이렇게 빨리 나올 거라곤 예상치 못했던 탓이다.

“……주인님,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리 늦진 않을 테니까, 내가 올 때까지 벨라 곁에 있어.”

분명한 명령이었다. 에릭은 곧바로 멈춰선 채 성큼성큼 사라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틀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엔 피가 한 방울씩 떨어져 있었다.

* * *

형제는 기다렸다는 듯이 저를 부르고 있었다.

벨리아르는 주저 없이 숲으로 향했다. 그의 허리춤엔 평소 쓰던 것과는 다른 검이 매여 있었다.

숲속 한가운데 놓인 오두막의 문을 열자마자 엘리아스가 태연한 미소로 맞이했다.

“여기서 보는 건 오랜만이네. 벨라도 데려오지 그랬어. 아, 참. 벨라는…….”

챙그랑!

그가 내던진 단검이 엘리아스의 발치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일부러 안타깝다는 듯 눈썹을 기울이던 엘리아스의 표정이 사뭇 굳어졌다.

“성질은.”

“네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발을 들여.”

“너야말로 이렇게 자리를 비워도 되는 거야? 적어도 벨라가 숨이 끊어질 땐 옆에 있어 줘야 하지 않을까? 홀로 무서울 텐데.”

“잘도 이딴 짓거릴 벌이고 입을 놀리는구나.”

엘리아스는 제 단검을 주워 들곤 나지막한 웃음을 흘려보냈다.

“설마, 벨라가 그렇게 된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해? 네가 한 짓들을 생각해 봐. 벨라를 그렇게 만든 건 바로 너야, 벨리아르.”

그가 엘리아스의 멱살을 틀어쥐고선 벽으로 밀쳤다. 엘리아스를 노려보는 붉은 눈동자가 거세게 일렁였다.

“그 입 다물어.”

하지만, 그가 동요할수록 엘리아스의 미소는 더욱 짙어졌다.

“맞아. 옛날에도 지금도, 벨라에게 칼을 주며 너를 찌르게 시킨 건 나였어.”

오래전 어느 날, 엘리아스는 벨라의 실수로 그가 상처 입는 모습을 보았다.

곧장 사라져야 할 상처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모습을 본 순간, 엘리아스는 벨라를 다른 시선으로 보게 되었다.

“……미친 새끼가. 아무리 죽고 싶어 환장했어도 그렇지.”

거센 악력 때문에 숨쉬기가 여의치 않을 텐데도 엘리아스의 여유로운 태도는 사그라지지 않았다.

“난 그저 벨라에게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준 것뿐이야. 내 소중한 친구니까.”

그는 빙긋 웃으며 벨리아르의 눈앞에 단검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바보같이 매번 자신을 찌르더라.”

벨리아르는 비로소 이 모든 것이 엘리아스가 제게 복수하기 위해 그린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 네 모습을 보니까…… 마음이 조금 바뀌었어. 벨라가 변함없이 자신을 찌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아니, 오히려 이게 더 낫네. 앞으로도 몇천 번이든 그랬으면 좋겠어.”

“복수하고 싶은 거면 날 건드려. 왜 벨라를, 왜!”

그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이토록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건 정말 드물었다. 하여 엘리아스는 진정 기쁜 표정을 지었다.

“그게 너를 더 괴롭게 만들잖아.”

벨리아르는 깊은숨을 토해 냈다.

“그러게, 신의 맹약 같은 건 함부로 하지 말았어야지. 어리석게 왜 스스로 약점을 만들고 그래. 그 맹약이 아니었다면 내가 벨라를 이용할 일도 없었잖아.”

이 지긋지긋한 복수의 굴레를 굳이 끊어 내지 않아도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삭아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고 무른 생각이었나.

“나는 너를 죽이지 못하지만,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래서 내가, 벨라를…….”

그가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그대로 엘리아스의 심장을 찔렀다. 덕분에 여유롭게 이어 가던 엘리아스의 말이 뚝 끊겼다.

한층 가라앉은 그의 목소리가 낮은 울림을 퍼트렸다.

“너는 항상 아버지를 죽인 칼을 궁금해했었지.”

“……너는 분명, 아버지를…… 죽이고, 그 칼을……!”

제 심장에 꽂힌 칼을 내려다보는 엘리아스의 말끝이 점점 흐려졌다. 영롱하게 빛이 일렁이는 칼날을 보며 엘리아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내가 분명 말했을 텐데. 너는 내 손에 죽을 거라고.”

분명 일반적인 칼로는 아무리 찔러 봤자 신을 죽일 수 없다.

둘을 창조한 대지의 여신 타라는 제 아들들을 사랑했다. 똑같이 사랑을 주었지만, 그녀는 어둠뿐인 벨리아르를 조금 더 애틋하게 여겼다. 어쩌면 그에게 주어진 운명을 안타깝게 여겼을지도 모른다.

“벨리아르, 이 칼이 네게 희망을 줄 거란다.”

그는 타라의 칼로 테리테스를 죽이고 지상으로 추방되었다. 그때 함께 사라진 줄 알았던 그 칼이 여기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소멸하며 형상이 희미해지는 중에도 엘리아스의 표정에는 그를 향한 비웃음이 가득했다.

“나를 죽인다 해서 벨라의 복수가 되리라 생각해?”

엘리아스는 마지막까지도 비웃음 담긴 말을 또박또박 이어 나갔다.

“아니. 벨라를 그렇게 만든 건 너였고, 벨라의 지옥은 온전히 너였어.”

모든 건 제 어리석은 착각이었다. 벨라가 엘리아스에게 마음을 빼앗겨 저를 배신한 줄 알았다. 이번 역시, 또다시 그녀가 저를 버리고 떠나려는 줄 알았다.

왜 몰랐을까. 벨라는 자신이 내던진 지옥 속에서 처절하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수없이 제게 손을 내밀었는데, 그 손을 잡아 주긴커녕 짓밟기만 했다.

* * *

방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은 가히 엉망이었다. 초점 없이 가라앉은 눈동자며 온갖 상처로 얼룩진 몸은 보기만 해도 눈살이 찌푸려졌다. 그러나 에릭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벨리아르는 침대에 살며시 앉아 그녀에게로 가만히 눈길을 두었다.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답지 않게 여전히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는 자조적인 웃음을 한숨에 섞어 흘려보냈다.

과연 다시 깨어나고 싶어 할까. 그 무엇보다 무서워했지만, 그토록 바라던 안식일 텐데.

“네가 내 곁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뿐이야.”

그는 자신이 했던 말을 수없이 곱씹으며 저를 난도질했다. 그런 말 따위는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벨라는 늘 살고 싶어 했다. 언제나 살려 달라 빌었고, 살려 주는 것으로 만족했다. 그래서, 살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을 너무 과신했다.

오래전 저를 사랑하지 않았던, 저와의 인연을 후회한다고 말하던 벨라는 저를 떠나기 위해 스스로 생명을 버리는 선택을 했다.

“나…… 나 이제 당신 사랑하지 않아. 아니, 애초에 사랑한 적 없어.”

“……나, 당신을 만난 걸, ……후회해.”

그것이 저를 지키기 위한 괴로운 선택이었는 줄도 모르고. 그런 그녀를 한없이 사랑하고, 또 미워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동안 가슴속에 남아 저를 괴롭혔다. 미치도록 그리운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불어온 바람에 점점 묻혔다. 그리움이 묻힌 자리에 여전한 사랑이 뿌려지니 원망이 자라났다.

그 원망이 쑥쑥 자라 제 속을 가득 채웠을 때였다. 그때, 오두막에 앉아 있는 벨라를 보았다.

“이리 온.”

“뭐 좀 먹었니? 이럴 줄 알았으면 먹을 걸 준비해 오는 건데…….”

작은 토끼를 보며 말갛게 웃던 모습을 보는 순간, 또 저속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무채색이던 오두막에 다시 색이 입혀지던 순간이었다. 오래전, 그 안온했던 날들처럼.

따스한 온기로 제 증오를 흐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총을 겨눴었다.

결국 손에 쥐었더니, 점점 욕심이 났다. 그래서 더 괴롭혔고, 더 빠듯하게 쥐려 했고, 그럴수록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깊이 파묻혔다.

애써 외면했던 것이 우습게도, 어느 순간 저는 그녀에게서 벨라를 찾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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