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그의 말 한마디에 모든 소리가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았다. 천천히 뒤로 돌아서자마자 벨라는 저를 응시하고 있던 붉은 눈동자에 속절없이 붙들렸다.
고요한 시간 속에서 오로지 그와 저만 흘러가는 듯했다. 나직이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가 새까만 바다 위에서도 더없이 선명했다.
벨라는 잘게 떨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래도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벨리아르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작은 행동에도 벨라는 흠칫 놀라며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이리 와.”
부드럽고 완강한 지시였다. 저도 모르게 발을 움직여 그의 손을 잡을 뻔할 만큼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혹시나 정말 그렇게 될까 봐 두려운 마음이 울컥 치솟았다. 벨라는 움찔거리는 몸을 억누르기 위해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벨라.”
그가 다시 한번 나직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 이름이 마치 주문처럼 파고들어 심장을 꽉 쥐었다. 숨이 막히는 것 같아 양손을 심장께로 모았다. 품에 지닌 칼이 누군가를 비웃었다.
[그가 왔구나. 드디어 네 손에 죽으러 온 거야.]
벨라는 헛숨을 들이키며 또 한 걸음 물러섰다. 그녀가 조금씩 멀어질 때마다 그의 표정에 서서히 금이 갔다.
기어코 그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제게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뿐이었고, 그중 도망치는 것을 택했다. 하지만, 그 선택지가 실패했으니 남은 것은 하나뿐이었다.
……엘리아스가 준 칼로 그를 찔러, 서로의 기억을 지우는 것.
가끔 이런 생각을 했었다. 인형에게 마음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그 인형이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감정은 무엇일까, 하고. 터무니없는 상상이었지만 저는 인형의 마음을 알 것 같기도 했다.
인형은 저의 전부인 주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마음이 생겼을 땐,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때라고 생각한다.
주인을 사랑하게 되는 순간, 주인에게 저는 그저 장난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테니까. 주위에 저와 비슷하게 생긴 인형이 여러 개라는 것 또한 알게 되겠지.
그리고…… 그 상태로 주인이 아무리 안아 줘 봤자 인형은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인형은 마음이 없는 모양이다. 쓸데없는 상념 끝에 내린 결론은 그것이었다.
저는 더 이상 그에게로 돌아가 안주할 수도 없었고, 그에게서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러니까 죽이자. 전혀 어렵지 않아.]
그녀는 결국 품 안에서 단검을 꺼내 들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손이 멋대로 움직였다. 벨라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칼을 쥐어 그를 향해 겨누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내내 굳건하던 그의 표정이 무너졌다.
“……벨라.”
속에 뭉쳐있던 상처를 내뱉듯, 그녀의 이름이 아프게 흘러나왔다.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미 무언가에 깊이 찔린 듯한 얼굴이었다.
벨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게 향한 칼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칼을 거두고 싶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탓에 한숨을 토해 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칼의 의지가 너무 완고했다.
“벨라! 안 돼! 내가 갈 테니까── 윽!”
그때 들려온 이안의 목소리에 벨라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피를 여기저기 묻힌 채 엉망이었다. 벨라를 향해 뛰어가려 했지만, 곧바로 제지한 에릭 때문에 신음을 삼키며 주저앉고 말았다.
“……이안.”
칼로 겨우 몸을 지탱한 이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안타까움과 걱정이 가득했다.
에릭은 벨리아르의 눈치를 흘긋 살피곤 그녀의 위치에서 이안이 보이지 가려지도록 앞을 막아섰다.
“검을 버려.”
그러나 이안은 곧장 일어서 에릭을 향해 칼을 고쳐 쥐었다. 에릭이 짜증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않고 미간을 좁혔다.
“어리석은 짓 그만하고 당장 무릎 꿇어. 지금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안 돼?”
“……헛소리하지 마십시오.”
거세게 노려보며 하는 말에 에릭은 답답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다시 경고했다.
“어리석은 짓이라고 했지, 이안 에드레이즈. 아가씨께서 널 보고 계신다. 칼 버리고 항복해.”
여기서 널 헤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전했지만, 이안은 절대 검을 놓지 않았다. 여기까지 어떻게 왔는데. 포기하는 순간 다 끝이었다.
이안은 짧게 숨을 고르곤 에릭을 향해 달려들었다. 검도 뽑지 않은 채 순순히 길을 열어 주었던 저번과는 달리, 에릭은 한 치의 물러섬 없이 검을 맞받아쳤다.
이안이 아무리 밤낮으로 열심히 검술을 연마했다지만, 그렇다고 에릭 역시 평온한 날들을 보낸 건 아니었다. 손에 가득 박인 굳은살이 그 시간을 말해 주고 있었다.
훈련량, 실전 경험, 그리고 검술의 숙련도까지. 이안이 다른 기사들과 비교했을 때 뛰어난 것은 맞지만, 에릭에 비할 정도는 아니었다.
에릭은 벨라가 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 최대한 검을 받아 쳐 내는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벨리아르의 시선 역시 둘을 향하고 있으니 남은 시간은 촉박했다.
“지금이라도 검을 버려. 마지막 기회다.”
“……제게도 기사의 긍지가 있습니다. 기사가 검을 버리는 것이 가당키나 합니까?”
“명심해. 아가씨께 가장 상처가 되는 건, 그 무엇보다 너의 그 고집이다.”
에릭이 말하는 사이, 빈틈이 생겼다. 이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빠르게 틈으로 파고들었다. 이안의 결심 어린 눈빛 끝엔 벨리아르가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에게까지 닿지 못한 채 이안의 몸이 우뚝 멈췄다.
“이안──!”
에릭의 검이 이안의 몸을 관통하는 순간, 벨라의 비명 같은 외침이 뒤따랐다. 이안은 제 몸에 꽂힌 칼을 보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저를 보며 울부짖는 벨라를 보면서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이 그녀의 기억 속에 남겨질 제 마지막 모습이라는 것을 알았다.
“……벨, 라…….”
이안의 몸이 맥없이 무너져 내렸다. 칼이 꽂힌 자리에선 붉은 피가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던 벨라의 눈가로 빠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아, 아…….”
안 돼. 꿈일 거야. 이렇게 이안마저 잃는다고? 말도 안 돼…….
갑판을 적시는 짙붉은 피가 너무도 비현실적이었다. 이안은 쓰러진 채로도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입 모양으로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지만, 목소리가 닿지 않았다.
그녀는 순간, 모든 것을 망각한 채 무작정 이안에게로 달려 나갔다. 하지만 고작 한 발자국 떼었을 때 그의 팔에 붙잡히고 말았다.
“……이거 놔요. 놓으라고요! 이안이, 이안이…….”
그는 벨라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 에릭을 향해 지시했다.
“정리해.”
갑판 위에 서 있던 이들이 조용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사이사이로 벨라의 처절한 울음소리가 파고들었다.
[그를 죽여.]
그 순간, 섬뜩한 목소리가 강렬하게 그녀의 뇌리를 파고들었다. 단검을 쥔 손에 빠듯하게 힘이 들어갔다. 벨라는 그대로 저를 안고 있는 그를 향해 칼을 휘둘렀다.
“주인님!”
또 한 번 눈앞이 붉게 물들었다. 저를 단단히 얽고 있던 팔이 풀어졌다. 벨라는 얼른 뱃머리 쪽으로 뒷걸음질 치며 그와 거리를 벌렸다.
그는 칼에 베인 제 팔에 한번 시선을 주곤 그녀를 바라봤다. 그 눈빛엔 어떠한 원망도 없었다. 그저, 조금 아파 보였다.
“……벨라.”
숨처럼 뱉은 목소리가 나직이 갈라졌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벨라는 그에게로 다시 칼을 겨눴다.
[좋아. 잘하고 있어. 그렇게 하는 거야. 거봐, 쉽잖아.]
칼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녀를 다독이며 여전히 그를 죽이라 종용했다.
분명 칼에 베였는데도 그는 여전히 저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 역시, 그에 대한 기억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엘리아스의 말은 거짓이었다.
당장 칼을 버리고 싶었지만, 도저히 손에 들어간 힘이 빠지지 않았다. 칼을 놓으려 할수록 의지를 배반한 채 손가락이 아플 정도로 칼을 꽉 쥐게 되었다.
칼끝은 지독하게 그를 향했다. 그가 다시 제게로 손을 내밀었다.
“……벨라, 이리 와.”
벨라는 서서히 고개를 내저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울컥 흘러내린 눈물이 시야를 어그러트렸다.
“오지, 오지 마세요……. 제발…….”
이러다 제 손으로 모든 것을 망쳐 버릴까 너무 두려웠다. 아까는 다행히 그의 팔만 베었지만, 다시 다가온다면 그땐 장담할 수 없었다. 이미 칼은 제 손의 의지를 빼앗아 가 버렸다.
그는 자신이 다가갈수록 점점 뒤로 물러서는 벨라를 보며 표정을 구겼다. 높게 친 파도가 그녀의 등 뒤로 튀어 올랐다.
“벨라, 그만.”
[봐, 네게 다가오고 있잖아. 어서 찌르면 돼. 간단한 일이야.]
주춤거리며 반걸음 물러서면 그는 성급히 한 걸음을 내디뎠다. 어쩔 수 없이 거리가 좁아 들고 있었다.
[죽여. 죽이라니까! 당장 그를 죽이라고!]
칼의 외침 또한 거세지자, 벨라는 울음을 삼키며 소리쳤다. ……제발, 제발.
“제발……! 오,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오지 마, 제발…….”
서늘한 바람이 짓궂게 몸을 휘감았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이 뱃머리 끝에 선 벨라는 위태롭게 휘청였다.
“……벨라, 위험해. 어서 이리 와.”
뱃머리에 서 있으니 참혹한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에릭이 옮겼는지 쓰러진 이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만 피가 스며들어 색이 짙었다.
결국, 저 때문에 이안마저 생명을 잃었다. 자신만 아니었다면 헤버튼에서 평범하게 살아갔을 텐데. 제 존재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치밀었다.
서로의 기억을 지운다는 선택지조차 무참히 짓밟혔다. 결국, 오래전부터 제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을 지금에야 깨달았다.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 채 아등바등 살아남은 결과는 처참했다.
저는 그를 죽일 수 없다. 감히, 제 손으로 자신의 세계를 무너트릴 수 없었다. 그 뒤에 주어질 삶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모든 것을 제자리로 돌려놓으려면, 결국은…….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칼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무슨 짓이야! 그를 죽이라니까!]
악착같이 의지를 끌어모아 칼의 방향을 틀자, 거센 목소리가 머릿속을 쾅쾅 울려 댔다.
칼은 죽이고자 하는 목표를 벗어나지 않기 위해 저항했지만, 결국은 또 한 번 꺾이고 말았다.
[이런 어리석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한 고통이 정신을 아득히 물들였다.
“──벨라!”
그의 외침이 먹먹히 귓가를 울렸다.
충격으로 쓰러진 몸이 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추락했다. 벨라는 차갑고 깊은 바닷속으로 잠기며 눈을 감았다. 그 순간까지도 칼을 쥔 손에서 힘을 풀지 않았다.
문득, 어느 날부터 꾸기 시작해 지금까지 저를 지독히 괴롭혀 왔던 꿈이 떠오른다.
‘벨라’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이 사랑하는 그 앞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던. 늘 의문이 남았었다. 그 여인은 왜 가장 행복해야 할 날에, 그런 처참한 선택을 한 걸까.
아, 이 순간에야 그 여인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차마 사랑하는 사람을 해할 수 없어 저를 버리고 마는. 남겨진 아픔이 두려워 그에게 떠넘겨 버리고 만 그 이기심이.
따듯한 온기가 닿자 스르륵 눈이 떠졌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시야에 저를 끌어안은 그의 가슴팍이 보였다. 이런 때마저도 그의 품은 어김없이 안도를 주었다. 이어 흐릿한 상념이 스쳤다.
나는, 또다시 같은 선택을 하고 마는구나. 나는…… 또다시 그를 사랑하였구나. 미련하게도.
누구의 생각인지 알 수 없는, 꿈처럼 몽롱하게 흘러가는 탄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