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화
밤바다는 결코 고요하지 않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새까만 어둠 속에서 파도 소리만이 멀어졌다가 가까워지길 반복했다.
철썩, 배에 부딪혀 부서진 파도 방울이 옷소매로 튀었다. 난간을 붙잡고 아래를 가만히 내려다보니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가 저를 집어삼킬 듯 거세게 일렁였다.
“위험해.”
급히 다가온 이안이 그녀를 난간에서 떼어 냈다. 금방이라도 바다에 휩싸여 사라질 것만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었다. 이안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든 채 낮은 한숨을 흘려보냈다.
“안에 들어가 있으라니까, 왜 나와 있어. 바람이 세서 파도가 높아.”
벨라는 열없이 미소 지으면서도 까만 바다를 흘긋거렸다.
“바다가 신기해서 계속 보게 되네.”
“제국 해역을 벗어나려면 상당히 오래 걸릴 거야. 그러고 또 한참을 가야 하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
제국에서 타국으로 넘어가는 밀항은 흔하지 않았기에 반대의 경우보다 비교적 수월한 편이었다.
이안과 벨라는 먼 서쪽 나라와 교역하는 상선에 선원으로 위장해 몸을 실었다. 이 배 안에 무슨 물품들이 실려 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다.
“춥진 않아?”
“괜찮아. 시원하고 좋…… 은데…….”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안은 겉옷을 벗어 그녀의 어깨 위에 둘러 주었다. 워낙 빠르게 지나간 행동이라 벨라는 벙벙한 얼굴로 옷자락만 살며시 쥐었다.
“시원하긴. 너, 손 차가워.”
“그럼 네가 춥잖아. 나 정말 괜찮아.”
얼른 정신을 차리고 그에게 다시 옷을 돌려주려 했지만, 제지하는 손길이 매우 완강했다.
“나야말로 시원해서 좋아.”
터무니없는 말에 말간 미소까지 덧붙이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벨라는 한숨 쉬듯 웃으며 이안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둘 사이로 어색한 침묵이 파고들었다.
“……벨라, 있잖아. 나 사실 조금 후회했었어.”
“……뭐를?”
“그냥……. 내가 한 선택이 과연 옳았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 보니까 후회되는 순간들이 있더라고. 그런데…….”
“응.”
“그냥, 조금 욕심부리기로 했어. 너랑 같이 이 땅을 벗어날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이기적이려고.”
이안은 지난 석 달 동안 벨라가 잠든 모습을 수없이 지켜봤다. 그때마다 벨라는 악몽에 시달렸고, 벨리아르 공작을 찾았다. 그 모습에 같잖은 질투가 나 살며시 잠을 깨우곤 했다.
질투와 함께 엉망으로 뒤섞인 감정 속에는…… 후회가 있었다. 그녀를 성에서 빼내 온 것이 순전히 제 욕심 때문인 것 같아서.
“나는 지금 매우 설레. 아마…… 네가 가고 싶어 했던 사막과 가까워지면 더욱 그럴 거야.”
벨라는 입안의 여린 살을 지그시 깨물었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어.
저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맞아. 나도 그래.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평온히 설렘을 느끼기엔 벨리아르 공작, 그의 존재가 너무도 컸다.
아직도 그 성에서, 그에게서 도망쳤다는 것이 잘 와닿지 않았다. 언제 어디서 그가 나타난다 해도 별로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거의 석 달이 되어 가는데도 제 발목엔 여전히 그가 채운 족쇄가 있었다.
사막의 모래를 밟게 되면 실감이 날까?
지금처럼 불안이 일 때마다 벨라는 품속에 지닌 단검의 존재를 상기했다.
엘리아스가 준 단검은 양날의 칼이었다. 그를 잊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임과 동시에 지금 당장 바닷속으로 내던져 버리고 싶은 두려운 물건이기도 했다.
[그를 죽여.]
저를 재촉하던 그 섬뜩한 목소리는 도통 흐릿해지질 않았다. 성에서 나온 뒤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분명 칼은 제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를 죽이라고.
“그를 죽여야죠.”
“당신의 기억 속에서.”
그를 죽이라는 말이 그 어떤 말보다 무섭게 들렸다. 그것이 어떤 의미이든. 그래서 더욱 필사적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의미로든, 그를 죽이고 싶지 않았다.
벨라가 옅은 상념에 빠져 허우적대는 동안, 바다의 날씨가 한층 궂어졌다. 해무가 짙게 피어오르고 바람이 더 매서워졌다. 돛의 방향을 바꾸고 내려온 선원이 둘을 향해 외쳤다.
“파도가 더 거세질 테니 안으로 들어가 있으시오! 거기 서 있다가 파도에 휩쓸려 상어 밥이 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말이지!”
가느다란 빗줄기가 콧잔등을 간지럽혔다. 커다란 상선이 파도에 밀려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안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쪽으로 이끌었다.
“들어가자. 바다는 날씨가 변덕스럽대.”
“……응.”
안으로 들어가며 그녀의 눈길이 먼바다를 짧게 스쳤다. 짙은 해무 사이로 무언가가 아른거리는 듯했다.
* * *
깊은 새벽, 고요히 잠든 발코페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맴돌았다.
평화롭던 항구로 군함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장한 기사들이 말을 타고 지나가는 자리마다 마을의 불이 하나둘씩 꺼지고 창문이 닫혔다.
군함은 항구를 벗어나 곧장 바다 위를 내달렸다. 물건을 가득 싣고, 바람에 의지해 항해하는 상선보다 훨씬 빠른 속도였다.
갑판 위에 서 있는 벨리아르에게로 에릭이 다가와 조용히 말을 붙였다.
“배는 서쪽 사막과 연결된 샤하번트와의 무역로로 향한다고 합니다. 출발한 지 제법 시간이 지나서 따라잡으려면 꽤 오래 걸릴 겁니다.”
그러니 들어가 계시라는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혹시나 해서 던져 본 말이었지만, 예상대로 그의 태도는 확고했다.
여전히 그의 시선은 드넓은 바다 너머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 쫓는 배가 나타난다면 파수꾼보다 그가 먼저 발견할 것이 분명했다.
“베일리 남작 영애가 밀항선을 타고 샤하번트로 향한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마음속에 차오른 것은 안도였다. 오랜 시간 잡히지 않으니 혹여 잘못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었다.
그런 불안이 씻겨 내려간 자리엔 잠시 안도가 스쳤다가 이내 분노가 익숙하게 자리를 꿰찼다.
저 멀리 희미하게 배 한 대가 보였다. 항구를 떠난 지 몇 시간 만의 일이었다. 망원경으로 배의 깃발을 확인한 파수꾼이 커다랗게 외쳤다.
“비폴스 상단의 배가 맞습니다!”
목표물을 발견한 군함이 더욱 속도를 올렸다. 상선과 제법 가까워지자 묵직한 뿔피리 소리가 울렸다.
배를 멈춰 세우라는 신호였지만, 상선은 오히려 나머지 돛을 펼치며 속도를 높였다. 상황을 지켜보던 기사 한 명이 다가와 곤란한 듯 말했다.
“배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따라붙는다고 해도 배가 멈추지 않으면…….”
어떻게든 배가 멈춰야 사다리를 놓고 넘어가 수색을 하든 뭘 하든 할 수 있었다. 잠시 상황을 살핀 그는 주저 없이 명령했다.
“발포해.”
“……예?”
상선을 쫓는 이유를 정확히 알고 있는 기사는 저도 모르게 반문하고 말았다. 그러다 순간, 정신을 차리곤 급히 숨을 들이켰다. 다행히 에릭이 끼어들어 그의 걱정을 대신 전했다.
“주인님, 그러다 아가씨께서 다치실 수도 있습니다.”
“위협만 되도록 옆으로 빗겨 쏴. 설령 잘못해서 배가 침몰하더라도 상관없다.”
그렇다고 벨라가 대포에 직격으로 맞을 일은 거의 없을 테고, 조금 다치더라도 자신이 있는 한 죽을 일은 없었다.
결국, 군함이 상선을 향해 비스듬히 방향을 틀었다. 적당한 각이 나오자 사수가 대포 심지에 불을 붙였다.
쾅──!
천둥 같은 대포 소리가 광활한 바다 위로 울려 퍼졌다. 이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포탄이 정확히 상선의 옆으로 떨어졌다. 해수면에 거대한 물줄기가 솟구치며, 앞서가던 상선이 크게 휘청였다.
* * *
“으악! 포가 날아옵니다!”
순탄하게 항해하던 배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허겁지겁 상자를 옮기던 선원들이 대포 소리에 놀라 엎어져, 물건들이 엉망으로 쏟아졌다.
갑판이 포탄에 튀어 오른 바닷물로 흥건하게 젖었다. 크게 휘청이는 배 위에서 선원들이 외치는 소리가 정신없이 엉켰다.
“우, 우리도 쏴 버려! 포탄 어디에다 뒀어!”
“미쳤어? 군함에 포를 쏴서 어쩌자는 거야! 다 같이 개죽음당하고 싶어?”
“그럼 어떻──! 으아악!”
또 한 번 바다가 크게 울리며 배가 휘청였다. 키를 잡고 있던 조타수 역시 화들짝 놀라며 아래로 몸을 숙였다.
“이런, 젠장!”
밖으로 뛰쳐나온 선장이 빠르게 거리를 좁히는 군함을 보며 소리쳤다.
“머, 멈춰! 당장 닻을 내려! 배를 멈추라고!”
결국, 상선이 속도를 급히 낮추고서야 무지막지하게 날아오던 포탄도 잠잠해졌다.
마른하늘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분명 날벼락이었다.
사람들이 몸을 숨기고 있는 선실 안쪽으로 선장의 분한 욕지거리가 마구 흘러들어 왔다. 배의 거센 움직임이 잦아들자 이안은 급히 벨라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무, 무슨 일이지? 설마, 기사들이…….”
“내가 나가서 상황을 좀 보고 올게. 위험하니까, 너는 여기 있어. 절대 움직이지 마. 알았지?”
이안이 검을 들고 일어서자 그녀가 다급히 팔을 붙잡았다.
“아니야. 가지 마, 이안. 괜히 나갔다가 위험해지면 어떡해. 그냥 여기 있어. 응?”
불안한 듯 떨리는 목소리에 이안은 안타까운 듯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하지만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떼어 내고선 최대한 차분히 말했다.
“상황을 알아야 어떻게든 방법을 모색할 수 있어. 정말 조심해서 다녀올게.”
그녀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손을 떨어트렸다. 이어 이안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며 손을 꽉 말아쥐었다. 이럴 때 불안에 잠식되면 곤란했다.
“여긴 없습니다!”
들이닥친 사람들이 선실의 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며 살피고 있는 듯했다.
그들이 무엇을 찾는지는 모르겠지만, 혹시 저를 잡으러 온 것이라면…….
어차피 가만히 있다간 꼼짝없이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붙잡혀 끌려 나가는 것보단 최대한 발버둥이라도 쳐 봐야겠지.
아무리 바다 위라곤 하지만,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든 방법이 생길지도 모른다.
벨라는 머릿속으로 미리 익혀 두었던 선내의 구조를 떠올리곤, 곧장 문을 열고 뛰쳐나갔다.
“저기 여자가 있습니다!”
복도에 있던 병사가 그녀를 발견하자마자 소리쳤다.
벨라는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꾹 붙잡은 채 반대편으로 뛰었다. 여기서 계단을 오르면 바로 갑판과 이어진다.
갑판 위로 나오자 엉망인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들이닥친 기사들과 엉성한 무기를 든 선원들이 거친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상황은 절대적으로 상단 쪽에 불리했다.
벨라는 급히 숨을 몰아쉬며 빠르게 눈을 움직였다. 이미 저를 본 사람이 있으니, 이 난장판 속에서 얼른 이안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눈에 들어오는 건 이안이 아니라 칼을 들고 무자비하게 선원들을 제압하는 기사들의 모습뿐이었다.
그리고 벨라는 그 기사들의 복장에 새겨진 문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벨리아르 공작가. 성에서 지겹게 보았던 그 문장이었다.
후드를 꼭 쥐고 있던 손에서 핏기가 가시며 창백하게 도드라졌다. 벨라의 손이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후드가 벗겨지며, 숨기고 있던 은색 머리카락이 눈앞으로 나부꼈다.
“벨라.”
나직이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등으로 닿았다.
순간, 숨이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