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그동안 숲이며 한적한 마을이며 도시까지, 어디든 가리지 않고 숨어들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사람들이 전하는 소문도 접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베른의 미친 공작을 두려워하면서도 그에게 관심이 많았다.
신전을 찾아가 마녀를 직접 잔혹하게 고문해 죽인다더라, 황제가 또 그의 앞에서 무릎 꿇고 쩔쩔맸다더라, 하여 그의 심기를 펴기 위해 시스란에서 온 공녀를 선물로 바쳤다더라.
……그 공녀의 생김새가 그가 아끼던 피후견인과 비슷하다더라.
소문은 소문일 뿐이라고 쉼 없이 되뇌면서도 마음은 곧이곧대로 상처를 받아들였다.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어딘가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그녀의 뺨을 적셨다.
“……벨라!”
희미한 외침이 겨우 그녀에게 닿았다. 벨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안을 바라봤다. 빗줄기 사이로 안타깝게 일그러진 이안의 얼굴이 보였다.
저 역시 비에 눈물을 감추고 있으니, 지금 이안의 감정도 못 본 체하며 덮어 두었다. 익숙한 일이었다.
“……가자. 이러고 있으면 감기 걸려.”
한 걸음씩 내디뎌 그에게서 멀어질 때마다 밟아 온 땅이 무너졌다. 끝을 알 수 없는 낭떠러지 너머에서 그는 제 발목에 묶인 사슬을 쥔 채 지켜보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려고 한다면, 저 깊은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져야겠지. 하지만 얼마나, 어디까지 추락해야 하는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과연 그는 제 몸이 부서지기 전에 사슬을 당겨 줄까. 제 상상 속에서 그는 수백 번 사슬을 놓아 버리고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그에게 제 존재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감히 헤아릴 수 없었다.
“……응. 가야지.”
제겐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존재하지 않았다.
* * *
보라색 눈동자. 그 범위는 생각보다 매우 넓고 허술했다. 그녀의 영롱한 보라색 눈동자를 보지 못한 자들은 보라색 눈동자에 대해 어설픈 정의를 내렸다.
파랗거나, 까맣더라도 언뜻 보라색 느낌이 나기만 하면 쉽사리 마녀로 몰렸다. 그러다 보니 그리 흔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물지도 않았다.
그는 여전히 일주일에 한 번꼴로 제국 곳곳의 신전을 방문했다. 베른으로 되돌아오는 그의 손은 늘 비어 있었다.
말을 탄 벨리아르와 에릭이 작은 도시의 성문을 지났을 때였다. 길가 한쪽에 가판대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인 무리의 목소리가 벨리아르의 귀까지 흘러들어 왔다.
“어머, 너무 귀엽다!”
“넌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이런 인형에 방정이니?”
“치, 난 아직도 이런 귀여운 인형이 좋더라. 나중에 할머니 돼도 인형 끌어안고 잘 거다, 왜!”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 봐. 귀엽긴 하네.”
그의 시선이 가판대를 짧게 스쳤다. 어린아이들, 가끔은 저렇게 다 큰 숙녀들의 마음까지 사로잡을 정도로 앙증맞은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벨라도 사 주면 좋아하려나. 자는 사이 머리맡에 놓아두면…….
“…….”
순간 생각이 멎음과 동시에 그가 말을 멈춰 세웠다. 무심코 스쳐 간 생각이 또 한 번 빌어먹을 현실을 상기시켰다.
아, 벨라가 없지.
그 순간, 코끝으로 스미는 공기의 온도가 달라졌다.
그가 갑작스레 멈춘 탓에 무심코 주인보다 앞서가 버린 에릭이 곧바로 말을 몰아 뒤로 물러섰다.
“주인님, 왜 그러십니까?”
그는 말없이 저 멀리 떨어진 가판대로 시선을 두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먼저 가 있어.”
그와 가판대를 빠르게 번갈아 본 에릭은 군말 없이 고삐를 고쳐 잡았다.
“……예, 알겠습니다.”
붉은 눈동자가 가판대 위의 인형들을 느릿하게 훑었다.
곰, 강아지, 다람쥐, 토끼.
그래, 토끼.
죽은 토끼를 보고 그리 슬픈 눈을 했었으니까, 토끼를 좋아하겠지. 돌아왔을 때 침대 위에 놓인 토끼 인형을 보면 무슨 얼굴을 하고, 또 무슨 말을 할까.
그럼 자신이 모질게 굴어도 조용히 울며 저 인형을 끌어안고 잠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가 말에서 내렸다.
* * *
“단장님, 오늘 날씨가 좋습니다. 함께 낚시라도 가시겠습니까?”
“……나는 됐으니, 자네들끼리 다녀오게.”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기사단장 루크는 긴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고개를 젖혀 천장을 바라보는 눈이 느리게 껌뻑였다.
‘언제까지 이런 시골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하지?’
루크는 가만히 날짜를 세어 보았다. 벌써 이곳에 온 지 두 달을 넘어, 석 달째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릴없이 흘러가는 시간은 그 속도마저 빨랐다.
항구 도시 발코페. 모르가타와 해역이 맞닿아 있어, 현재 시점엔 언제 전쟁터로 변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니 군사 작전상 페이트 기사단을 파견해도 전혀 이상한 것이 없었다.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늘 실상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 다른 법이다.
모르가타는 해상까지 전쟁을 확장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다. 덕분에 발코페는 전과 다름없는 평화를 이어 갔고, 파견된 기사들은 마땅히 할 일이 없었다.
검을 들던 손에 낚싯대가 더 오래 들려 있는 것만 봐도 이들의 한가로움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벨리아르 공작의 실권이 강력해지며 교황의 권한은 더욱 위축되었다. 세간에 떠도는 말을 빌려 지금의 상황을 정리하자면, 교황은 끈 떨어진 연이었다.
충심도 그만한 권력이 있을 때 생기는 것이지.
루크는 제 부관이었던 로드릭을 떠올릴 때마다 이를 빠득 갈았다. 어쩌다 운 좋게 공작의 눈에 들어 총사령관을 맡아 전장을 진두지휘하고 있는 꼴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겉으론 권력엔 관심 없다는 듯 뻣뻣하게 굴더니, 영악한 놈!’
이대로 두면 점점 자신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 이제라도 얼른 공작에게 줄을 대 봐야 할 텐데…….
쨍그랑!
그때, 잘 있던 유리 장식품이 갑자기 추락해 산산이 부서졌다.
“어이쿠.”
하지만 정작 사고를 친 장본인은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보며 영혼 없이 탄식했다.
“으어어억!”
뒤늦게 낯선 이의 존재를 눈치챈 루크는 괴상한 소리를 내며 꼴사납게 버둥거렸다. 간신히 남자를 향해 들어 올린 검지가 파들파들 떨렸다.
“다, 당신! 당신 누군가! 어, 어, 어떻게 여기에!”
남자는 여유로운 태도로 소파에 앉아 특별한 것 없는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귀신 처음 봐요? 뭘 그리 놀라고 그래요. 재밌게.”
루크를 응시하는 초록 눈동자가 둥글게 휘어졌다.
“귀, 귀신……. 귀, 귀…….”
루크는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헐떡거리며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무런 기척 없이 방 안에 나타난 남자가 저를 귀신이라고 말한다면 열에 아홉은 이런 반응일 것이다.
남자는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 웃었다.
“농담이에요. 귀신 아니니까, 이리 와서 앉아 보지 그래요. 당신에게 해 줄 말이 있어요.”
불쑥 찾아온 불청객은 상당히 뻔뻔했다. 멋대로 놀리다 멋대로 농담을 끝내곤 담소를 요청했다.
루크는 그사이 서서히 정신을 차리곤 손을 더듬거려 칼을 빼 들었다. 칼을 들이미는데도 남자의 여유로운 태도는 여전했다.
“어, 어디서 보냈지? 당장 정체를 밝혀라!”
“계속 이런 항구 도시에 처박혀 한가로이 낚시나 즐기고 싶으시다면 계속 이러고 있어도 됩니다. 근데, 내가 이런 날붙이를 별로 안 좋아해서.”
남자는 빙긋 입꼬리를 휘며 제게 겨눠진 칼을 슬쩍 밀어냈다.
“앉으세요. 정신 사나워요.”
루크가 긴장한 탓에 힘을 꽉 주고 있었음에도 칼은 너무나 쉽게 밀려났다. 이어 그는 식은땀을 한 방울 흘리면서도 주춤주춤 소파에 엉덩이를 걸쳤다.
“벨리아르 공작의 피후견인이 사라진 것, 알고 있었나요?”
굳이 대답을 바라며 물은 건 아니었다. 소수만 알고 있는 정보였고, 안타깝게도 루크는 그 소수에 들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러 알려 주러 온 것이다.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루크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벨리아르 공작의 피후견인이라면……. 보라색 눈동자를 가진 그 망할 계집애가 아닌가. 그 여자가 사라졌다고?’
번뜩, 그간의 일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뒤로 신전 일엔 일절 관심 없던 공작이 갑자기 마녀사냥을 강화하라고 지시한 것이 이상하다 싶었다. 더불어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건들지 말라던 지시까지…….
‘그 여자를 찾기 위한 수단이었구나.’
무언가를 깨달은 듯 루크의 표정이 바뀌자 남자는 조용히 입꼬리를 휘었다. 이어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 밤 밀항선이 뜰 테니 서둘러야 할 겁니다. 상선들을 잘 살피세요.”
손님맞이가 영 엉망이야. 남자는 작게 혀를 차며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다시 홀로 남은 루크는 뒤늦게 남자의 말을 되짚었다.
새벽, 밀항선……? 갑자기 밀항선은 왜.
순간, 이상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설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허둥지둥 문으로 다가갔다.
“이, 이러고 있을 게 아니지…….”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부관과 마주쳤다. 한 손에 커다란 생선을 든 그는 상당히 뿌듯한 얼굴이었다. 그러다 루크의 상태를 보곤 싱글벙글 웃던 입꼬리가 점점 내려갔다.
“단장님! 이 생선 좀 보십시오. 여태 잡은 것 중에 가장……. 단장님,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안색이…….”
“자네, 지금 당장 오늘 밤 출발하는 밀항선에 대해 알아보게. 그, 정확히는…… 그곳에 베일리 남작 영애가 타는지 확인해야 하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 그 영애가 왜…….”
“아무도 모르게 은밀히 알아봐야 하네. 절대 말이 새어 나가선 안 돼. 알겠나? 시간이 없으니 서둘러 움직이게! 어서!”
“예? ……예, 알겠습니다.”
기사는 어리둥절해하면서도 바삐 등을 떠미는 손길에 허둥지둥 밖으로 나갔다.
초조함에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한 채로 몇 시간이 흘렀다. 깊은 밤이 되어서야 일을 시킨 기사가 돌아왔다.
“확실한가? 얼굴은? 얼굴은 확인한 겐가?”
“사람을 시켜 확인해 보았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공작가에서 도망쳐서 수배 중인 기사 있잖습니까? 이름이……. 아, 이안 에드레이즈. 그 기사와 함께 있는 듯싶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당장 잡아 올까요? 곧 있으면 배가 출발할 겁니다.”
괜히 잡아 두었다가 까딱 잘못하면 그 영애만 갖다 바치는 꼴이 될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우선 감시할 인원만 붙여 두게. 나는 지금 당장 베른에 다녀올 테니.”
루크가 서둘러 나설 준비를 했다. 지금 출발해서 최대한 빨리 베른에 다녀온다 해도 시간이 꽤 걸릴 터이니 서둘러야 했다.
물건을 가득 실은 상선일 테니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한시가 급했다.
“혹시, 벨리아르 공작 각하를 뵈러 가십니까?”
“그렇다만.”
“지금 각하께선 셀리온에 계십니다. 오늘 오후에 당도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루크의 얼굴이 확 펴졌다. 어쩜 이리 일이 착착 풀릴 수가 있을까.
그토록 아끼던 영애이니 찾도록 도움을 준다면 분명 공작의 눈에 들 수 있으리라.
“하늘이 나를 돕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