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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다정함은 거짓이다 (146)화 (146/180)

146화

전쟁이 두 달째 이어지고 있었다. 온 대륙이 제국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날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전시는 길게 이어졌다.

이어, 사람들의 예상은 또 하나 빗나갔다. 피바람 휘날리는 참혹한 전쟁터가 될 것이라 예상했던 셀리온은 생각보다 평화로운 날을 이어 가고 있었다.

종종 전투가 벌어지긴 했지만, 서로 최소한의 피해만 본 채 마무리되곤 했다. 그 이유는 로드릭이 이번 전쟁의 총사령관을 맡게 된 데에 있었다.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벨리아르가 셀리온을 눈앞에 두고 다시 베른으로 돌아가 버렸다. 수족처럼 부리는 에릭 또한 그를 따라갔으니 로드릭이 전쟁을 통솔하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벨리아르가 사령탑을 맡지 않음으로써 전쟁의 방향은 크게 기울어졌다.

원래는 곧바로 모르가타의 수도를 함락하는 것이 목표였지만, 애초에 로드릭은 그 작전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았다.

공작에게 서신을 보내 뜻을 물어도 봤으나 며칠 만에 돌아온 답신은 성의라곤 눈곱만큼도 담겨 있지 않았다.

[알아서 해.]

주군의 인장이 찍힌 친필 서신만 아니었어도 구기고 찢고 태우고, 별짓을 다 했을 것이다.

결국 황제에게까지 찾아가 뜻을 청했지만.

“경의 뜻대로 하시오. 벨리아르 공께서 그대에게 군사적인 권한을 일임하였으니…….”

유약한 황제는 벨리아르 공작의 뜻을 조금도, 아주 조금도 거스르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 로드릭은 최대한 제국의 군사와 평민들이 다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전쟁을 길게 끌어 불리한 건 모르가타였다.

그렇게 몇 주가 흐르고, 황제가 벨리아르 공작가를 찾았다. 아무래도 로드릭에게 그런 식으로 답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벨리아르는 팔걸이에 놓인 손가락을 까딱이며 느릿하게 말을 잇는 에드윈을 응시했다.

목소리에 영 힘이 없어서 그런지 듣고 있다 보면 졸음이 몰려올 지경이었다.

“……그래서, 이번 전쟁을 어떻게 이끌어 갈지 답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한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로드릭이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한 번에 밀고 들어가서 끝내는 것보다야 이렇게 서서히 말려 죽이는 것도 나쁘지 않지. 과연 모르가타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궁금하기도 하네.”

모르가타에 주어진 선택지는 많지 않았다. 전쟁에서 이기든 제국에 사과를 받든, 둘 중 하나는 이루어져야 이 전쟁을 끝낼 수 있었다.

먼저 칼을 꺼내 든 건 모르가타이나, 마무리 열쇠는 제국이 쥐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제국은 벨리아르 공작의 것이었다.

“그럼 이대로 둘까요?”

“그렇게 해.”

“예, 알겠습니다.”

그가 확답을 내려 주고서야 에드윈의 표정이 살짝 편안해졌다. 벨리아르는 그런 황제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입꼬리를 휘었다.

“에드윈.”

“……예?”

“더 할 말은?”

“어, 없습니다. 그저, 요즘 심기가 어지럽다고 하시기에……. 제가 무언가 도움 될 만한 것이 있나 싶어 찾아왔습니다.”

에드윈의 대답을 끝으로 잠시 고요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는 천천히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어 부드럽게 휘어지는 입매는 지켜보는 사람의 정신을 속절없이 빼앗아 갔다. 그는 늘 오만하고 우아한 태도로 상대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여전히 눈치가 없구나.”

“…….”

에드윈이 할 말을 찾아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그는 지금 허수아비를 앞에 앉혀 두고 사사로이 담소를 나눌 만큼 여유롭지 않았다.

“폐하를 모셔라.”

그의 한마디에 대기하고 있던 사용인들이 다가왔다. 그러나 황제가 입을 떼자, 잠시 움직임이 멎었다.

“……시스란에서 보낸 공녀가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그중에…… 은발에 파란 눈동자를 가진 여인이 있습니다. 보라색 눈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비슷하여…….”

그가 흘린 헛웃음에 에드윈의 말이 잦아들었다. 이어 서늘하고 낮은 시선이 황제를 억눌렀다.

“에드윈, 맹랑한 짓거릴 하는구나.”

은발에 벽안? 벨라를 잃어버렸단 소식을 듣고선 그 비슷한 대용품이라도 제게 바치겠다는 소리였다.

지금 감히 누구 앞에서 그딴 소릴.

그의 손에 찻잔이 들려 있었다면 거센 악력에 산산이 부서졌을 것이다.

“겨우 그딴 생각을 하여 이리 귀하고 먼 걸음을 하셨습니까, 폐하.”

그는 긴 숨을 내뱉곤 멀뚱히 서 있는 사용인들에게 일갈했다.

“폐하를 모시라 하였는데.”

나직한 목소리에 묻어나는 분노가 선연했다. 에드윈은 조용히 사용인들의 안내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응접실 안에 홀로 남은 벨리아르는 가만히 소파에 몸을 기대어 눈을 감았다. 온갖 잔혹한 생각들로 채워진 머릿속엔 끝내 단 하나의 생명만 남았다.

벨라가 사라진 지 두 달째였다.

투둑, 투둑.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그를 불렀다. 창밖엔 가느다란 빗줄기가 비스듬히 내리치고 있었다. 언 땅을 녹이고 새싹을 깨우는 비였다.

그는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초봄을 알리는 비 내음이 훅 끼쳐 들어왔다. 하늘은 멀쩡한데, 그의 머릿속엔 순간 번쩍하고 무언가가 내리쳤다.

그는 곧장 응접실을 빠져나와 정원의 어느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명확한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지 내딛는 걸음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화단 옆에 놓인 무언가를 본 그의 눈동자가 젖은 옷처럼 푹 가라앉았다.

벨라가 만들어 두었던 눈사람이 가느다랗고 촘촘한 빗줄기에 하염없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저건 무엇이지?”

“아가씨가 만든 눈사람입니다. ……저걸 만들며 복잡한 마음을 다독이시던데요.”

“……손재주 없는 건 여전하네.”

그는 나직한 숨을 내쉬며 반쯤 허물어진 눈사람으로 다가가 한쪽 무릎을 굽혀 앉았다. 젖은 땅에 옷이 더러워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눈사람이 온전히 녹아내려 땅으로 스밀 때까지 그 앞에서 벨라를 떠올렸다.

기나긴 베른의 겨울이 지나가고 있었다.

* * *

제국의 영토는 주변 나라와 비교해 막대한 넓이를 자랑했다.

북동쪽의 베른에서 서남쪽의 항구 도시 발코페까지. 평범하게 마차 같은 교통수단을 이용해서 간다면 삼 주 정도가 걸리겠지만, 기사들의 수색을 피해 거의 걸어서 이동하다 보니 발코페의 옆 도시까지 오는 데에 두 달이 넘게 걸렸다.

“이 마을만 지나면 발코페야. 거기서 무사히 배만 타면 제국을 벗어날 수 있어.”

가지고 있는 재물은 충분하니 밀항할 배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드넓은 바다를 건너 저 먼 땅으로 건너가면, 그러고 나면…… 아무리 그라 할지라도 저를 찾기는 힘들 것이다.

“……응.”

벨라는 걸음을 내디디며 멍하니 대꾸했다. 이안의 말이 제대로 실감 나지 않았다.

“……저, 벨라.”

흘끗 그녀의 눈치를 살피던 이안은 조심스레 입을 뗐다. 벨라는 말없이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혹시…… 후회돼?”

“……뭐가?”

이안의 물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충분히 알았지만, 벨라는 순간 당황스러운 마음에 애꿎게 되물었다.

“성에서 도망친 거…… 후회하냐는 말이야.”

이안이 던진 물음이 잔잔하던 그녀의 내면에 크고 간결한 파동을 일으켰다.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대답은 선뜻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마땅한 답을 내어 주지 않자, 이안의 표정이 얼핏 초조함으로 물들었다. 그는 주먹을 한번 꽉 쥐었다 펴며 말을 얹었다. 평소보다 살짝 조급한 말투였다.

“……전국 곳곳의 신전에서 눈동자가 조금이라도 보라색과 비슷하면 마녀라며 잡아들이고 있대. 그 잡혀 간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들었어?”

그녀 역시 지나가며 들었던 소문이다. 벨라는 뻣뻣한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돌덩이가 목구멍을 꽉 틀어막고 있는 듯 목소리가 겨우 삐져나왔다.

“……응.”

“벨리아르 공작이 일일이 찾아가서 잔혹하게 죽였다던데.”

“……소문은 소문일 뿐이잖아.”

말할 때마다 입안이며 목구멍에 가시가 돋친 것처럼 따가웠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니까. 제게 거는 주문이었다.

“벨라, 너도 알잖아. 아니, 네가 제일 잘 알겠지. 그 사람이 얼마나 잔혹한 사람인지 말이야. ……나는 그저 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공…… 공작님은…….”

오랜만에 그 호칭을 입에 올리자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온몸을 훑어 내렸다.

그가 제 몸에 남긴 흔적들조차 모두 사라졌을 만큼 제법 긴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도 뒤를 돌면 그가 서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꿈속에서 저는 그 방에 갇혀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지러운 상념들에 감긴 혀가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뭐라고 말을 이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하던 때, 숲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드넓은 광경이 펼쳐졌다.

바다였다.

“바다…….”

날씨가 흐려 해무에 휩싸이긴 했지만, 드넓게 펼쳐진 바다가 완전히 가려지진 않았다.

“……와, 벨라. 바다야.”

이안의 멍한 감탄이 축축한 바닷바람에 묻혔다.

벨라는 엘리아스가 그려 주었던 바다 그림을 떠올리며 해무 너머의 수평선을 덧그렸다.

언젠가 꼭 보고 싶다고 생각하던 바다를 눈앞에 두었는데 그리 황홀한 기분이 아니었다. 흐린 날씨 때문일까.

살며시 날씨 탓을 해 보았지만, 사실 날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와 함께 보는 바다를 그렸었다. 여느 연인들처럼. 날씨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었다.

‘……연인.’

입술 새로 자조적인 미소가 샜다. 그와 연인이라니. 얼마나 주제넘고 헛된 꿈이었나.

자신은 그에게 그저 흥미로운 사냥감, 예쁜 인형에 불과했다. 그런 존재가 멋대로 족쇄를 풀고 달아났으니 화가 났겠지. 아마 저를 찾으면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고통을 주고 죽일지도 모른다.

엘리아스의 말처럼, 저는 그저 옛 연인의 빈자리를 채워 줄 대용품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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