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에릭은 서둘러 짐마차의 문으로 손을 뻗었다. 곧장 문을 열어젖히지 못하고 찰나에 머뭇거린 것은 설마,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곧장 얄팍한 감정을 지워 내고 짐마차를 열었다. 마차 안은 온갖 물품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벨리아르와 에릭의 시선이 빠르게 물건들을 훑었다. 에릭이 가려진 상자를 치우자, 벨리아르의 칼에 찔린 것의 정체가 드러났다.
검은색 털을 가진 짐승이었다. 여신 타라가 사랑했던 동물로 알려진 흑표범은 제국에선 사사로운 포획이 금지된 동물이었다.
사냥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건지, 그의 칼에 찔려 피가 흘러나오는 동물의 사체를 보고서 에릭은 짧은 숨을 흘렸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차 안의 물품을 들킨 호위들은 땅에 꿇어앉은 채 나직이 욕을 지껄였다. 하지만 그들의 걱정과 달리, 벨리아르는 밀수품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는 짐을 옆으로 밀어 보며 꼼꼼히 안까지 확인했다. 그러다 다소 이질적인 보따리가 발견되었다. 주저 없는 손길이 보따리를 풀어 헤쳤다.
안에서 나온 옷은 제법 눈에 익은 것이었다. 에릭 역시 어렴풋이 짐작하며 눈가를 찌푸렸다.
“그건…….”
그는 곧장 옷감을 뒤집어 안쪽을 확인했다. 마담 폴린의 표식과 그 옆에 새겨진 공작가의 문장. 생각할 필요도 없이 이건 벨라의 옷이었다.
물건은 있는데, 벨라는 보이지 않는다.
그가 느릿한 숨을 내뱉으며 그녀의 흔적을 꽈악 그러쥐었다.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온기가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그는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는 호위들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옷을 들어 보였다.
“이것도 밀수품인가?”
“……그, 그것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습──!”
짐승의 피가 묻었던 그의 칼이 또 다른 피로 흠뻑 물들었다. 깔끔하게 병사 하나의 목숨을 끊어 버린 그는, 다음 사람에게로 눈길을 옮겼다.
“대답해. 이런 물건이 왜 이 안에 들어 있는 건지.”
그와 눈길이 스친 호위 병사는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굳이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붉은 눈동자를 하고서 이런 거침없는 행동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은 제국에 단 한 명뿐이었다.
벨리아르 공작.
그의 존재를 알아챈 이들의 머릿속이 수많은 의문으로 복잡하게 엉켰다.
“저, 저희는 정말 아는 것이 없습니다! 조사 때문에 나오신 거라면― 컥!”
그는 무감한 표정으로 또 한 명의 목을 꿰뚫었다. 동료들이 하나씩 죽어 가는 모습을 본 호위 병사들은 분노보다 더 큰 공포에 사로잡혔다. 그의 칼엔 일말의 망설임도, 자비도 없었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끝으로 남은 사람들의 목 위를 가로지르며 덧그렸다. 반듯한 입매엔 나른한 미소가 스몄다.
“아직 말할 입이 다섯 개나 남았네.”
그는 눈앞에 꿇어앉은 자들을 생명으로 보지 않았다. 그저, 벨라의 흔적이 남은 땅 위의 흙 정도. 그녀가 남긴 발자국을 살펴보고 짓이기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차례가 왔을 때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는 순간, 목이 덜렁거리며 땅 위를 나뒹굴었다. 온전히 베지 않고 일부러 반만 베는 건 단순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동료의 처참한 죽음을 목격한 남은 이들은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을 정도로 극심한 공황에 빠졌다.
쓸모없는 것들.
그가 작게 혀를 차는 소리를 끝으로 마차를 지켜야 할 호위 병사들의 목숨이 모두 끊겼다. 그는 칼날을 달빛에 비춰 보며 퍽 아쉽다는 듯 읊조렸다.
“이런,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니.”
이윽고 마부의 목으로 칼이 닿았다.
“히익!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사, 살려만 주시면…….”
“너는 저들과 다르지 않나. 굳이 입을 다물 필요가 없을 텐데?”
마부는 흙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며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무렴요, 예, 예……. 다 말씀드리겠습니다요.”
“살고 싶다면, 그 머리통에 있는 정보를 무엇이든 쥐어짜 내야 할 거다.”
“머, 먼저! ……먼저 출발한 마차가 있습니다!”
그제야 영양가 있는 정보가 흘러나왔다. 한 걸음 뒤에 서 있던 에릭이 준비하듯 검을 고쳐 잡았다.
“마차가 또 있어?”
“예, 예……. 오늘은 초, 총 세 대가 출발했는데…… 그, 그중 두 대가 알로스를 통과합니다. 이 마차 말고 다, 다른 마차가…….”
“정신 차리고 똑바로 말해.”
“그 마차는…… 이, 이 숲길로 가지 않고 외곽 길을 고, 곧바로 통과해서…….”
밀수업자들은 한 마차에 모든 물품을 싣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길로 향하지도 않는다. 마부의 말로 미루어 보면, 지금쯤 다른 길로 빠져나간 마차에 벨라가 타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를 빠득 문 그의 턱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곧이어 낮고 서늘한 음색이 잇새로 새어 나왔다.
“당장 쫓아.”
그의 명령과 동시에 곧바로 에릭이 기사들을 이끌고 움직였다.
* * *
마차 안에 웅크린 채 숨죽이고 있으니, 바깥의 소리에 절로 신경이 쏠렸다.
생각보다 출발이 늦어져 의아하던 차에 마부인 듯한 사람이 마차에 올라타는 기척이 느껴졌다. 이어 마차가 살짝 움직이는가 싶었는데, 이내 누군가 다가와 마부를 멈춰 세웠다.
“왜 그러시오?”
“아직 준비가 끝나지 않았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게.”
“거참. 이미 시간이 늦었는데 왜 이리 꾸물대는 것이오? 이러다간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오.”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자네는 무사히 물건을 전달하는 것에만 신경 쓰게.”
“아휴, 그럼 혹시나 늦더라도 나중에 딴소리나 하지 마소.”
결국 마부는 고삐를 놓았고, 마차의 움직임이 완전히 멎었다. 이후에도 들릴 듯 말 듯 불만을 중얼거리는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말 말 그대로 준비가 덜 되어 마차가 출발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일생을 숨어 지내고, 또 도망 다녔던 벨라는 이런 미세한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녀가 이안의 옷깃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이안, 뭔가 이상하지 않아?”
“왜?”
“일부러 시간을 끄는 것 같아. 조금 불안한데…….”
“……그런가?”
“아무래도 조금…… 느낌이 안 좋아.”
그녀의 말에 이안은 밖으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마차 주변을 배회하던 발소리가 서서히 멀어지며 사뭇 고요해졌다.
“……벨라, 마차를 옮겨야겠어.”
이안은 곧장 그녀의 손을 잡고서 살며시 마차의 문을 밀었다. 혹시 잠겨 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과 달리, 쉽게 문이 열렸다. 틈새로 살펴보니 마차의 뒤쪽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가자.”
벨라는 곧장 보따리를 들고 움직이려 했다. 그러나 안쪽에 두었던 보따리가 아무리 당겨도 꿈쩍하질 않았다.
“왜 그래?”
“이게 안 빠져. 틈에 단단히 낀 것 같아.”
그녀의 말에 이안은 다시 한번 바깥을 살폈다. 더 이상 시간을 끌었다간 눈에 띌 위험이 컸다.
“그냥 놓고 가자. 곧 사람들이 이쪽으로 올 것 같아.”
어차피 귀중품은 주머니 속에 지니고 있었다. 보따리에는 옷가지와 생필품 같은 것들이 들어 있기에 돈만 있으면 새로 구할 수 있는 터라 별로 문제 될 건 없었다.
결국, 짐은 그대로 둔 채 둘은 조용히 마차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옆 마차로 옮겨타는 것에 성공했다.
미리 약속되지 않은 마차라 전보다 더 비좁고 열악했으나, 다행히 둘이 몸을 웅크리고 들어갈 공간은 있었다.
이안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긴 했지만, 벨라는 여전히 불안을 떨치지 못한 채 물었다.
“여기 타도 괜찮은 거야?”
“어차피 지금 출발하는 마차들은 각자 다른 길로 가긴 하지만, 결국은 같은 곳으로 향한댔어.”
벨라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마차를 옮겨 타고 나니 조금 마음이 놓이는 것은 사실이었다.
곧이어 마차 주변이 살짝 웅성였다. 누군가 급하게 마차로 오른 듯 삐걱거리며 흔들리기도 했다.
“이 사람아, 왜 이리 늦어! 벌써 출발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이, 왜 이리 성격이 급하시나 그래. 내가 속이 안 좋아서 좀 늦었네. 거 좀 이해해 주시게.”
“쯧, 얼른 출발하게!”
마차는 살짝 빠른 속도로 출발했다.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알로스를 지났고, 검문 또한 무사히 넘어갈 수 있었다.
둘은 잠시 쉬어 가는 틈을 노려 마차를 빠져나가, 다시 숲으로 숨어들었다.
* * *
“알로스를 통과하는 마차를 모두 수색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아가씨의 흔적은 찾지 못했습니다. 애초에 마차를 타지 않았거나, 아니면 중간에 빠져나간 듯싶습니다.”
그가 느른한 숨을 길게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셔 흉곽을 가득 부풀려도 허망한 속이 채워지지 않았다.
서늘한 바람이 텅 빈 손바닥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허한 느낌이 싫어 뼈마디가 새하얗게 도드라질 정도로 거세게 주먹을 그러쥐었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밀려드는 갈증에 그가 헛웃음을 내비쳤다.
“……미치겠네, 진짜.”
눈앞에서 놓치니 더욱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마치 잘고 부드러운 모래알 같았다. 세게 틀어쥘수록 손 틈새로 빠져나가 버리는 모양새가.
제게 절망을 안기는 존재는 오로지 벨라뿐이었다. 그 절망은 유독 쓰고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