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깊은 새벽, 다리를 절며 걸어온 남자가 에릭을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그의 무심한 눈길이 남자의 다리를 스쳐 올라갔다. 손마디도 몇 개가 없는 남자는 전에 황태자에게 독을 밀수해 주었던 중개상이었다.
저는 다리와 온전치 못한 손, 그리고 외에도 자잘한 흉터들의 원인은 에릭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만든 것이 저였으니.
비밀 장부와 맞바꾼 값비싼 목숨이었다.
배포가 크다고 해야 할지, 그런 일을 겪고도 남자는 에릭 앞에서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았다. 참 악착같은 장사치였다.
“이 늦은 시간에 주인님을 찾은 이유가 뭐지?”
이른 시간인가. 그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공작님께서 사라진 베일리 남작 영애와 기사를 찾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와 관련해서 몇 번 남자를 찾은 적이 있으니 별 새삼스러운 것 없는 이야기였다. 에릭은 살짝 피곤한 기색이 감도는 얼굴로 픽 웃었다.
“내가 지금 한가하게 대꾸해 주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그래서, 본론은?”
남자는 품에서 작은 장신구를 꺼내 보여 주었다.
“플리테라 지부에서 들어온 물건입니다. 밀수품 마차에 몸을 실어 주는 대가로 받았다고 합니다.”
밀수품 마차.
남자의 말을 한 번 곱씹은 에릭은 장신구를 가져가 자세히 살폈다.
이건……. 분명 그녀가 빅센에서 금화로 사들인 장신구 중 하나였다. 그 목록이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살폈기에 웬만한 품목은 눈에 익어 있었다.
“이걸 누가 들고 왔지?”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어 얼굴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목소리가 제법 앳되고 검을 들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망친 그 기사일 확률이 높지 않겠습니까?”
“여자는 없었나?”
“함께 오진 않았지만, 일행이 있다고 했습니다. 제 아내랑 함께 이동한다더군요. 보통 부부가 그리 은밀하게 밀수품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경우는 흔치 않지요.”
에릭은 남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주인에게 보고할 것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마차가 출발하는 장소와 일시는.”
“…….”
순간 돌아오는 답이 없기에 에릭은 고개를 들어 남자를 응시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확고하게 말했다.
“경. 저희는 돈을 보고 일하는 자들이지, 충심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장사치들은 충심도 돈을 받고 파는 자들이다. 본능적으로 이런 정보들이 어떤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지 셈하는 자들이고. 한마디로 남자는 지금 정보를 팔러 온 것이다.
에릭은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원하는 금액의 삼 분의 일을 주지. 나머지는 두 사람을 무사히 찾았을 때 지급하겠다.”
그들이 요구한 것은 수도에서 거대한 저택을 한 채 사고도 남을 정도의 금액이었다.
하지만 고민하고 잴 필요도 없는 사안이었다. 제 주인은 그녀를 찾는 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명했으니.
해가 뜨자마자 에릭이 그의 침실을 찾았다. 평소보다 노크 소리가 빨랐고, 걸음은 성급했다. 벨리아르는 그 사소한 변화를 놓치지 않으며 에릭을 응시했다.
새벽부터 바삐 어딘가를 다녀온 에릭은 살짝 가쁜 숨을 내쉬었다. 손에는 로드릭에게서 온 보고서를 들고 있었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주인님, 아가씨에 대한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에릭도 살짝 당황할 만큼 벨라는 생각보다 그의 손길을 피해 이리저리 잘 빠져나갔다.
심지어는 아예 행적이 끊겨 에릭을 깊은 곤란에 빠지게 한 순간도 있었지만, 말 그대로 순간일 뿐이었다.
“이틀 뒤에 플리테라에서 밀수품이 실린 짐마차를 타고 알로스로 이동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바로 출발하시면, 마차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따라잡을 수 있을 겁니다.”
그는 에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나 외투를 집어 들었다.
“먼저 출발할 테니, 기사들 준비시켜.”
“예, 알겠습니다.”
에릭이 고개를 숙이며 답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이미 그는 문을 나서고 있었다. 에릭 역시 지체하지 않고 곧장 움직였다.
* * *
달이 온전히 떠오른 새벽, 이안과 벨라는 조용히 숲을 빠져나왔다. 약속된 장소로 향하자 짐마차 여러 대와 그 주변을 둘러싸고 호위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다소 험악해 보이는 분위기에 벨라는 후드를 더욱 깊숙이 눌러쓰며 손을 꽉 말아쥐었다. 그녀의 불안함을 눈치챈 이안이 한 걸음 앞서 나갔다.
둘이 모습을 드러내자 입구를 지키고 서 있던 호위 한 명이 곧바로 검을 뽑아 들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이안은 말없이 패를 하나 꺼내 보였다. 거대한 상단의 지부를 총괄하는 자와 거래하며 받은 표식이었다. 남자는 패를 확인하자마자 검을 집어넣었다.
“쫓는 사람은 없었소?”
이안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어내리며 물음을 던졌다.
“일행이오?”
의심스러운 눈초리가 짙어지자, 이안은 살며시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약속한 인원은 둘이었소. 상부에 확인해 보시오.”
남자는 말없이 둘을 번갈아 보다 이내 비켜서며 턱짓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들어와서 잠시만 기다리시오.”
안쪽으로 들어가 한구석에 서 있으니, 검은 복장을 한 사내들이 돌아다녔다. 굳이 둘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을 보니 그리 생소한 광경은 아닌 듯했다.
이안이 그녀를 향해 입 모양으로 ‘괜찮아’라고 말했다. 벨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로 바짝 붙었다.
까딱 잘못했다간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곳이라, 벨라는 불안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곧이어 앞서 이안과 거래했던 사람이 나타나 둘을 마차 뒤로 안내했다.
“이 마차에 짐을 싣고 타시오.”
원래 사람을 태우는 용도가 아닌 짐마차라 편안히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없었다. 하지만 생각보다 더 안의 공간이 열악한 탓에 이안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상자와 포댓자루는 그렇다 쳐도 동물 사체까지 있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 자신은 상관없지만 벨라가 힘들까 봐 마음이 쓰였다.
이번엔 벨라가 그의 생각을 알아챈 듯 입 모양으로 ‘괜찮아’라고 말해 주었다.
둘이 눈길을 주고받는 사이, 마차 문을 열어 주던 남자가 살짝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채근했다.
“얼른 타지 않고 뭐 하시오? 이렇게 미적거리다 괜히 보는 사람이 늘면 서로 좋지 않소.”
결국, 둘은 짐을 안쪽으로 밀어 넣은 후, 비좁은 마차 안으로 몸을 실었다. 퀴퀴하고 눅진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짐마차의 문이 닫히자 새까만 어둠이 내려앉았다. 벨라는 무릎을 끌어안고 둥글게 몸을 만 채 눈을 감았다.
이러고 있으니 문득, 창문 없는 방에 갇혀 그를 기다리던 때가 생각났다. 살짝 숨이 억눌렸다.
이젠 능숙하게 그녀의 불안을 감지한 이안이 곧장 물었다.
“괜찮아?”
“……응.”
벨라는 버릇처럼 대꾸했다.
“알로스만 무사히 지나면, 그 뒤는 좀 수월할 거야.”
무사히…….
과연 무사히 이 땅을 벗어날 수 있을까.
아무리 멀어져도 언제 그에게 목줄을 잡힐까 불안한 마음을 떨쳐 낼 수 없었다.
* * *
매번 알로스로 향하는 마차를 호위하는 그들에겐 너무나도 익숙한 길이었다. 그만큼 자그마한 변화 역시 빠르게 알아챘다. 미세하게 땅이 울리고 있었다.
“……잠깐.”
호위 병사들의 우두머리가 마차를 멈춰 세우곤 칼을 고쳐 잡으며 경계 태세를 갖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말을 타고 달려온 기사들이 들이닥쳤다.
말에서 내린 기사들이 마차를 에워싸고 검을 빼 들자, 순식간에 고요한 숲길이 거센 긴장감에 휩싸였다.
“웬 놈들이냐!”
우두머리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관청에 밀고가 들어간 건가? 하지만 미리 손을 써 두었을 텐데…….
설령 신고가 들어갔다 해도 이리 기사들이 몰려오는 것은 도통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쨌건, 지금은 마차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마차를 지켜라!”
우두머리의 외침을 필두로 단숨에 호위 병사들과 기사들이 칼을 맞대었다. 평화롭던 숲길에 험악한 소리가 낭자했다.
“어이구야!”
갑작스레 전투가 벌어지자 소스라치게 놀란 마부는 황급히 빠져나갈 길을 찾아 눈을 굴렸다.
이대로 있다간 필시 죽는다!
하지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바닥에 풀썩, 고꾸라졌다. 필사적으로 이 혼란 속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엉금엉금 기어가던 찰나, 그의 목덜미로 서늘한 칼날이 내려앉았다.
마부는 뻣뻣이 굳은 목을 겨우 움직여 서슬 퍼런 칼날을 따라 시선을 올렸다. 어스름한 달빛 사이로 붉은 눈동자가 서늘히 빛을 발했다.
“히익!”
마부는 마치 못 볼 것이라도 본 것처럼 몸을 덜덜 떨며 곧장 땅바닥에 엎드렸다.
“사,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십시오…….”
아무리 호위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지만, 훈련된 기사들에 비할 실력은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칼을 맞대는 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는 하나둘씩 바닥으로 무릎 꿇는 호위 병사들을 보며 뒤에 선 에릭에게 지시했다.
“다 죽이지 말고, 숨은 붙여 둬.”
“아, 아이고,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요…….”
마부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그저 나오는 대로 중얼거리며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어 댔다.
벨리아르는 흙바닥에 바짝 엎드려 떨어 대는 마부를 지나쳐 짐마차로 다가갔다. 시야에서 그의 발이 멀어지는 것을 본 마부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 이건 단순히 알로스로 가는 상품일 뿐입니다! 제발, 제, 제발 그냥 보내 주십시오…….”
“보통 이 안에 무엇을 싣지?”
그의 물음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침 넘기는 소리가 스산한 바람에 파묻혔다. 마부는 호위 병사들의 눈치를 살폈다. 곧이어 우두머리가 입을 열었다.
“그저 곡식이나 과일 같은 식료품일 뿐입니다. 수상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
칼등으로 짐마차를 툭툭 건드려 보던 그는 이내 망설임 없이 마차에 칼을 푹 꽂아 넣었다.
“……주인님!”
순간, 당황한 에릭이 조용히 외치며 다가왔다.
그가 칼을 뽑아 들자 자연스레 여러 시선이 칼끝으로 모였다. 날카로운 선단을 타고 흘러내려 칼끝에 고인 액체가 한 방울 톡, 땅으로 스몄다.
어두워서 색이 선명히 구분되진 않았으나 살짝 진득한 그것은 분명, 피였다.
그는 무감한 시선으로 칼끝을 응시하며 고저 없는 목소리로 지시했다.
“에릭, 마차 열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