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예?”
주교가 멍하니 되묻는 모습에 그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귓구멍이 막혔어? 죽이라고. 불에 태우든 목을 치든 알아서 해.”
이어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 버리자, 주교가 다급히 에릭을 붙잡았다.
“……정말 집행해도 되는 것이오?”
혹여 자신이 곡해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에 되물은 것이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만 있던 여자가 창살에 달라붙어 소리쳤다.
“사, 살려 주세요! 저는 정말 마녀가 아니에요!”
에릭은 여자를 흘끗 보곤 건조하게 답했다.
“알아서 하세요.”
귀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에릭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걸음을 뗐다.
등 뒤로 여자가 무어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 귀를 만지작거리며 지하를 벗어났다.
* * *
벨라의 걱정스러운 눈빛이 옷 속에 작은 무기들을 챙겨 넣는 이안을 끈질기게 따라다녔다. 그는 벨라와 눈길이 스칠 때마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싱긋 웃어 주었다.
하지만 원체 걱정 많은 그녀를 달래기엔 역부족이었다. 벨라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같이 가자. 혼자 갔다가 혹시 위험한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해.”
이안은 마지막으로 검을 챙겨 들곤 그녀의 어깨를 꾹 눌러 앉혔다. 그러고는 안쪽의 화톳불을 가리켰다.
“저 불이 꺼지기 전엔 다녀올게. 혹시 내가 너무 오래 걸리면 먼저 이곳을 떠나야 해. 알겠지?”
같이 가자는 말에 대한 완곡한 거절이었다.
지금 머무는 동굴은 숲속 깊은 곳에 있는 데다 겉보기엔 입구가 좁아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곳이었다.
상대적으로 안전하긴 해도 한곳에 오랜 시간 머무는 것은 위험했다. 사실 이안이 늦더라도 먼저 떠날 자신은 없었지만, 벨라는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겠어.”
“다녀올게.”
“조심해.”
온갖 걱정하는 말들이 떠올랐으나 입으로 전한 말은 고작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러나 이안은 그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마음이 담겨 있는지 알기에 기분 좋은 듯 웃었다.
“걱정하지 마.”
그녀가 사막에 가고 싶다고 말한 뒤로 이안은 최대한 안전하게 제국 땅을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현재 그는 수배 중이고, 벨라 역시 마녀를 쫓는 움직임이 강화되어 자유롭게 운신할 수 없는지라 일반적인 방법으로 제국을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게다가 육로를 통해 사막으로 가려면 모르가타를 거쳐야 하는데, 현재 전쟁 중이라 그것은 더욱 불가능했다.
“일단, 다른 나라로 통할 수 있는 항구 도시로 가자. 발코페가 적당할 것 같아.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어.”
“뭔데?”
“발코페로 가려면 무조건 알로스를 지나야 하는데, 거긴 거대한 상업 도시라서 경비가 꽤 삼엄해. 일반적으로 갔다간 검문에 걸릴 확률이 높아.”
“……그럼 돌아가야 하나?”
“아니. 돌아가는 길은 너무 험하고 복잡해. 조금 알아봤는데, 밀수업자들을 통하면 방법이 있을 것 같아.”
그래서 이안이 오늘 밤에 밀수업자를 만나 보고 오기로 했다. 그것도 제법 위험한 일이었지만, 지금으로선 딱히 더 나은 방법이 없었다.
벨라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기대곤 가만히 화톳불을 바라봤다. 요즘도 가끔 빨갛게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다 보면 발작하는 일이 있었지만, 지금 같은 잔잔한 불은 조금 나았다.
성을 빠져나온 지 며칠이 지났더라.
확실히 날짜를 세어 보진 않았으나 십여 일은 훌쩍 넘은 것 같다. 그동안 크고 작게 쫓기는 일은 많았지만, 다행히 공작가의 기사들을 마주치진 않았다.
성에서 나온 뒤로 단 한 순간도 그의 존재가 희미해진 적 없었다. 눈을 감으면 떠오르고, 겨우 잠든 순간엔 꿈결에서마저 저를 제멋대로 휘둘렀다.
“벨라.”
까슬한 음성으로 저를 부르고.
“대답해야지.”
다정한 손길로 저를 어루만지며 아이처럼 얼렀다. 진득하니 달라붙는 붉은 눈동자가 대답을 종용했다.
하지만 매번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꿈속에서 꺽꺽댔다. 대답하는 순간, 그가 제 목을 틀어쥐고 저 아래로 처박을 것만 같았다.
그는 대답을 재촉하다 결국은 제 목에 사슬을 걸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빠듯하게 사슬을 조이며 커다란 손으로 제 뺨을 문질렀다.
“이제 돌아와야지.”
악몽에서 깨어나는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숨이 막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가 되어서야 허억, 하고 숨을 몰아쉬며 발작하듯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제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끊임없이 목을 죄어 왔다.
“하아, 하아…….”
저도 모르게 악몽을 곱씹던 벨라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제 목을 더듬었다. 아무것도 없이 매끈한 살을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도 아득한 공포에 숨이 덜덜 떨렸다.
그 악몽을 꾸고 나면 매번 같잖은 생각이 들었다.
죽기 싫다.
살기도 싫고, 죽는 것도 무서웠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늪처럼 진득한 자괴감에 서서히 파묻혔다.
그럴 때마다 엘리아스의 말이 한 줄기 빛처럼 내려오곤 했다.
“이 칼은 기억을 담을 수 있는 칼이에요. 당신이 이 칼로 벨리아르를 찌르면, 서로의 기억이 모두 이 칼로 스며들 거예요.”
벨라는 혼자 있는 틈을 타 살며시 품에서 엘리아스의 단검을 꺼내 보았다.
정말 이 칼로 그를 찌르면, 서로의 기억이 사라지고 아무것도 모르던 때로 돌아갈 수 있는 걸까.
그럼 이렇게 도망치는 게 아니라 온전히 그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그를 찔러야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저더러 그를 죽이라는 거예요?”
“설마요. 이 칼로 찌른다 해도 기억만 사라질 뿐 그는 죽지 않아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여태껏 엘리아스의 말은 모두 믿음직스러웠는데, 이번만큼은 쉽사리 신뢰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죽지 않는다고 말한들 그를 직접 찔러 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었다.
벨라는 검집에서 칼을 꺼내 멍하니 시선을 두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이 제게 말을 거는 듯했다. 다행히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한차례 마른침을 삼킨 벨라는 칼로 제 손끝을 살짝 베어 보았다.
“……아.”
기분 나쁜 통증에 그녀가 작게 신음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살짝만 그었는데도 그대로 살이 베이고 피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가만히 상처를 쳐다봐도 별다른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벨라는 배어 나온 피를 옷자락에 꾹 눌러 닦곤, 칼을 다시 검집에 넣어 이리저리 살폈다.
“……딱히 일반 칼과 다를 것이 없어 보이는데.”
엘리아스의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적어도 제게는, 이 단검은 그저 평범한 칼일 뿐이었다. 그를 해할 수는 없더라도, 저를 죽일 수는 있다는 말이다.
오만가지 생각을 하며 애꿎은 입술만 짓씹고 있을 때, 동굴 바깥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이안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의 몸이 긴장으로 바짝 굳어졌다. 벨라는 곧장 단검을 꽉 쥐었다.
“아…….”
그러나 곧 익숙한 모습을 확인하곤 짤막하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벨라는 얼른 이안에게 다가가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이후, 애써 초조한 기색을 억누르며 물었다.
“위험한 일은 없었지?”
“응. 전혀 위험하지 않았고, 잘 이야기하고 왔어.”
“……다행이다. 걱정했어.”
“이래 봬도 실력 출중한 기사인데 걱정은. 춥진 않았어?”
이안은 짧게 너스레를 떨더니 꺼져 가는 불씨를 보고선 걱정스럽게 물었다.
“베른 날씨에 적응했었나 봐. 이 정도는 괜찮아.”
그는 곧장 화톳불로 다가가 마른 나뭇가지를 더 넣고 불을 살짝 키웠다. 그녀가 불을 무서워하는 것을 알기에 항상 큰불은 지피지 않았다.
그녀가 조용히 곁에 앉았을 때, 이안은 바깥의 일을 전해 주었다.
“사흘 뒤 밤에 출발하기로 했어. 대신 짐마차에 끼어 타야 해서, 좀 불편할 수도 있을 것 같아.”
“걸어서 가는 것보단 훨씬 낫지. 난 다 좋아.”
그녀를 보며 싱긋 웃던 이안은 순간 무언가를 발견하곤 들고 있던 나뭇가지를 내던졌다. 그러곤 곧장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어디서 다쳤어? 베인 것 같은데.”
칼로 직접 벴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벨라는 눈을 바삐 움직여 핑곗거리를 찾았다. 동굴 벽에 울퉁불퉁 튀어나온 돌이 적당해 보였다.
“아……. 여기, 돌에 베였나 봐. 별로 안 아파서 언제 다쳤는지도 몰랐네.”
상처를 자세히 살피던 이안이 설핏 눈가를 찡그렸다. 딱히 그녀의 대답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잠시만 있어 봐.”
이안은 최대한 깨끗한 천을 찾아 조금 찢어 왔다. 그러고는 상처가 벌어지지 않도록 정성스레 묶었다. 벨라는 이안을 가만히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조금 베인 건데, 뭐.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아.”
“네가 다치면 내가 아파서 그래.”
“……너랑 있으면 내가 꼭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아.”
그러자 이안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해? 당연히 너는 귀한 사람이지.”
“날 귀하게 여겨 주는 건 너뿐이야. ……다른 사람들 눈엔 그저 마녀로밖에 안 보일걸.”
“다들 눈이 삔 거지. 이렇게 착하고 아름다운 마녀가 어딨다고. 다들 머리가 어떻게 된 거야.”
언뜻 화가 나서 내뱉은 말에 벨라는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이안의 말과 달리, 자신은 미친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마음대로 흘러가지 않고 헛된 감정에 휘둘리는 걸 보면.
높은 절벽을 보면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을 애써 억눌러야 했고, 잘 걷다가도 무언가 발목을 콱 붙잡는 것 같아 주저앉기 일쑤였다.
애석하게도 칼로 살짝 베어 본 손끝이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안이 그렇게 마음 아파하는 것이 되레 미안해질 만큼, 아프지 않았다.
이 정도면 죽을 만하지 않을까?
그러다가도, 끊임없이 제게 손을 내미는 이안을 보면 죄책감과 자괴감에 짓눌려 괴로웠다.
벨라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버릇처럼 그가 떠올랐다.
절대 저를 죽이지 않을 사람. 자신이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임과 동시에,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옥.
그녀가 나직이 웅얼거렸다.
“이안, 나…… 죽기 싫어.”
꼭 죽어야 하는 사람처럼 하는 말에 이안의 표정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안 죽으면 되지. 살면 돼.”
“내가 살 수 있을까?”
그녀의 물음에 이안은 입술을 한번 세게 깨물었다.
“왜 못 살아. 나랑 같이 사막에 가서 새로운 도시도 구경하고, 오아시스도 보고, 그리고…… 남들처럼 살자.”
남들처럼. 하루하루 소소한 행복에 즐거워하며.
환상 같은 이야기였다.
“나는 끝까지…… 네가 원하는 것을 주지 못할 수도 있어.”
주지 않을 거야.
이안에겐 그 말이 확신처럼 들렸다.
지금도 벨라는 자면서 가끔 벨리아르 공작을 찾았다. 애처로운 목소리로 ‘공작님…….’ 하고 부를 때마다 이안은 그녀를 가볍게 흔들어 깨웠다.
꿈에서 그를 만나는 것조차 달갑지 않았다. 여전히 그에게 묶여 있는 것이 싫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있는데, 넌 왜.
이안은 버릇처럼 고개를 쳐드는 원망을 억누른 채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런 거 안 바라. 내가 원하는 건 네가 행복하게 웃는 것뿐이야. 그거면 돼.”
한쪽은 그저 새까맣고, 한쪽은 닿을 수 없는 무지개를 잡으려 발악하고.
각자 그리는 미래는 어느 쪽이든 비극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