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이안은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해 주듯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참혹한 상황을 그려 냈다.
기사였던 아버지가 마녀를 쫓기 위해 베른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벨리아르 공작에게 손목이 잘렸고, 그로 인해 제 집안이 어떻게 망가지게 되었는지.
벨라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먼 기억을 끄집어냈다. 베른의 여관에서 묵고 있을 때, 저를 잡으러 왔던 기사 중 한 명이 이안의 아버지였던 모양이다. 그러다 벨리아르 공작에게 잘못 걸려 봉변을 당했고.
그러니까 결국은…… 이안의 아버지가 그렇게 된 것 또한 제 탓이었다. 그냥 모든 것이 제 탓인 것만 같아 괴로웠다.
왜 제 발길이 닿는 곳마다 불행이 일까.
또 한 번 삶이 무의미해졌다.
벨라는 몸을 일으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미안해.”
이안은 사과해 오는 벨라에게 뭐라 말하지 못하고 그저 입술만 달싹였다.
그녀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속 희미하게 박힌 가시 같은 원망을 뽑아낼 수가 없었다. 어디에 박혔는지도 모르는 원망은 이렇게 가끔 저를 찔러 댔다.
이안은 결국 양손에 이마를 파묻고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한테는 이제 너 말고는 더 이상 소중한 게 없어. 네가 날 움직이게 하고, 네가 날 살게 만들어. 그러니까…… 네 곁에 있게 해 줘. 떠나라고 하지 마.”
“나는…… 네가 나 때문에 인생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지금도 충분히 엉망이야. 그래서 충분히 너한테 미안하고……. 지금도 염치없는데, 더 이상 너한테 민폐 끼치기 싫어.”
이안이 그녀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 작은 손이 빛 한 줄기라도 되는 것처럼 간절한 마음이 복받쳤다.
“다 내가 선택한 거야. 꾸역꾸역 널 찾은 것도 나고, 널 그 성에서 억지로 끌어낸 것도 나야. 그리고 난 그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 없어. ……다 내 욕심이야.”
벨라는 저를 붙잡은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그 사소한 모습에도 괜스레 마음이 단 이안은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알아. 널 향한 마음이 이기적이고 그저 맹목적이라는 거. 그걸 너무나 잘 아는데…… 그걸 안다고 해서 놓아지지는 않더라.”
이안이 애원하듯 하는 말들이 돌처럼 쌓여 무겁게 벨라를 짓눌렀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차곡차곡 쌓인 그의 마음이 무너질까 두려웠다. 그래서, 자신이 또 한 번 그에게 몹쓸 짓을 저지르는 꼴이 될까 봐.
“네가 사라지고 나서 깨달았어. ……내가, 내 생각보다 너를 훨씬 더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걸.”
“이안, 나는…….”
“나, 그냥 옆에만 있게 해 주면 안 될까? 뭐든 달라고 떼쓰지 않을게. 그냥……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나 그냥 네 옆에 있게만 해 줘.”
분명 오랜 기억 너머의 저는 악착같이 살고 싶어 했는데.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선택이든 할 만큼. 그런 생각을 했던 제 모습이 아득했다.
살기 위해 제 발로 성역의 숲으로 들어갔던 날, 그땐 꿈에도 몰랐다. 삶과 반대되는 무언가를 이토록 갈망하게 될 줄은.
사막에 가고 싶은 이유는 단순했다.
성에서 제 물건이라곤 손에 꼽을 정도였지만, 하나도 챙기지 못하고 나온 것이 후회되진 않았다. 하물며 어머니의 손수건도 아쉽지 않았다. 다만…….
그냥, 그 모래시계 하나가 지독히도 마음에 걸렸다. 상황이 어쨌건 그가 제게 처음으로 준 선물이었으니까. 그래서 저도 모르게 그 모래시계가 소중해진 모양이다.
“나는…… 나는, 사막에 가서……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모래를 보고 싶어.”
그리고, 그러고 나면…….
누군가 검은 장막을 덮어씌운 것처럼 머릿속이 새카맸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하지.
벨라는 길을 잃은 사람처럼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작은 목표조차 사라진 그녀는 연한 바람에도 모래로 바스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괜스레 불안해진 이안은 황폐해진 그녀의 마음속에 희망을 심으려 애썼다.
“……뭐든 좋아. 가득 쌓인 모래를 보고 나면, 또 하고 싶은 게 생길 거야. 서두르지 않아도 돼.”
* * *
가만히 침대를 응시하고 있던 그는 일순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주저 없는 손길이 가지런히 정돈된 이불을 걷었다. 생각보다 몸이 앞선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텅 빈 침대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서야 그는 제 행동이 얼마나 멍청한 짓이었는지 깨달았다.
벨라가 사라진 지 이 주째로 접어든 날이었다.
그의 일상은 단순했다. 성에 있을 땐 그녀가 썼던 침대를 보며 깊은 상념에 잠기는 것으로 시간을 흘려보냈다.
아직도 벨라가 이불 속에서 꾸물거리는 모습이 어제 일처럼 생생했다.
“공작님, 커튼 좀 쳐 주시면 안 될까요? 눈이 부셔서요.”
소심한 목소리로 제법 기가 찬 부탁을 해 오는 모습도 지금껏 선연하다.
기꺼이 움직여 커튼을 쳐 주고 가만히 내려다보면 제 눈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얌전히 시선을 내리까는 모습마저도 방금 스쳐 간 장면처럼 뚜렷했다.
그는 주인 잃은 침대에 눈길을 고정한 채 뒤의 커튼을 쳤다. 눈치 없이 쨍하게 스며들어 등을 덥히는 햇살이 거슬렸다.
이런 따스한 햇볕 아래에선 새근새근 잠든 벨라의 모습이 보여야 하는데.
지금쯤 너는 어디에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엇을 하고 있을까.
벨라가 성을 떠난 지 이 주가 흘렀다. 제 눈길을 피해 그놈의 손을 잡고 도망간 지 이 주가 흘렀다. 딴 새끼와 밤을 보낸 지 이 주가 흘렀다.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
그는 내내 손에 쥐고 있던 반지를 으스러트릴 듯이 꽉 쥐었다. 파직, 하는 소리가 나고서야 그는 손에 힘을 풀었다.
달이 부서지고 붉은 루비에 금이 갔다.
그는 나직이 욕지거리를 읊조리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치미는 화를 삭이려 지그시 눈을 감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단 채 저를 올려다보는 벨라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지금 당장 그 작은 몸을 품 안 가득 끌어안고 싶어 미칠 것 같다. 지독한 갈증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울렸다.
“주인님, 에릭입니다.”
“들어와.”
그는 짧게 답하며 책상으로 돌아와 부서진 반지를 던지듯 올려놓았다. 그사이 다가온 에릭의 눈길이 책상 위를 짧게 훑고 지나갔다.
“남동쪽의 자작령에서 마녀를 붙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에릭의 보고에 그는 말없이 외투를 챙겨 들며 문으로 다가갔다. 하도 걸음이 빨라 그가 문손잡이를 쥐었을 때가 되어서야 에릭의 목소리가 닿았다.
“이번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며칠간 무리하셨으니, 조금이라도 쉬고 계십시오.”
“헛소리하지 말고 준비해.”
“이번에도 아닐 확률이 높습니다. 그쪽은 아가씨께서 가실 만한 지역도 아니고, 시기도 잘 맞지 않습니다.”
그가 에릭을 돌아보며 나직이 조소했다.
“내가 너를 어떻게 믿고.”
그는 어떻게 하면 상대방의 마음을 후벼 파는지 잘 알고 있었다. 에릭에겐 그 어떤 말보다 더는 신뢰하지 않는다는 그 말이 가장 날카로운 창이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 * *
그동안 이 넓은 땅덩이를 참 많이도 휘젓고 다녔다. 덕분에 벨리아르 공작이 마녀에 미쳤다는 소문이 저잣거리에 너저분히 돌아다녔다.
그는 제 귀까지 흘러들어온 소문을 곱씹으며 짧게 비웃었다.
‘미친 건 맞지.’
어느샌가 저 역시 벨라에게 물들었던 모양이다. 헛된 희망을 놓지 못하고, 이리 무식한 데다 효율 없는 짓거릴 반복하고 있으니.
그는 치미는 감정을 무던하게 다지기 위해 더욱 말을 빠르게 몰았다.
마차로 가면 며칠은 걸릴 거리를 쉬지 않고 말로 꼬박 달려 하루 만에 당도했다.
이럴 줄 알고 에릭이 신전에 미리 언질을 주었으나, 그를 맞이한 주교는 상당히 당황한 모습이었다.
“오, 오셨습니까? 이렇게 빨리 오실 줄은…….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으니, 우선 안으로…….”
하루 이틀밖에 걸리지 않으리라는 말을 믿지 않은 모양이다. 급하게 뛰쳐나와 허둥지둥 말을 더듬는 주교를 보며 에릭이 조용히 눈가를 찌푸렸다.
그는 말에서 내리자마자 성큼성큼 걸음을 떼며 주교의 말꼬리를 잘랐다.
“마녀는 어디에 있지?”
“예? ……아, 마녀요. 마녀는 지금 지하 감옥에 가둬 두었습니다.”
“안내해.”
“예, 예…….”
주교는 그와 에릭을 흘긋 살펴보곤 서둘러 길을 안내했다.
계단을 밟아 내려갈수록 벨라에 대한 갈망이 거세졌다. 그 역시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지금 붙잡힌 것이 벨라가 아닐 확률이 상당히 높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하지만…… 혹시나, 어쩌면. 그런 우습기 짝이 없는 전제가 그의 걸음을 부추겼다.
지하로 들어가 여자의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스쳐 지나가며 봐도 벨라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감옥의 모습이 제법 우스웠다. 화형에 처하지 않고 이리 가둬 둔 것도 이례적인 일인데, 상태가 제법 말끔했다. 보통 마녀로 몰린 자가 받기엔 과한 대우였다.
마녀를 잡아들이되, 조그마한 상처라도 입혀선 안 된다.
대외적으론 황제가 지시하긴 했지만, 그것이 벨리아르 공작의 뜻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덕분에 그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위해 각 신전에서는 이런 황당한 광경이 펼쳐지곤 했다.
그가 낮게 헛웃음 치자, 눈치를 살피던 주교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말고 잡으라고 하셔서…….”
그가 인상을 구기며 나직한 숨을 내쉬었다.
이번이 대체 몇 번짼지. 계속되는 헛걸음에 그의 얄팍한 인내심이 밑바닥을 드러냈다.
허술하게 쌓아 올렸던 불안과 희망이 무너져 내리고 난 자리엔 견고한 분노가 뻔뻔하게 자리를 꿰찼다.
‘아직도 내 손에 잡힐 생각이 없다는 거지.’
고작 머리카락 한 뭉텅이 던져 놓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짓거리에 속절없이 놀아나고 있었다.
이러다 또 마녀를 잡았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거리가 얼마든 미친놈처럼 쫓아가겠지.
기대하고, 무너지고, 분노하고. 그녀가 사라진 후에 반복되는 마땅한 일상이었다.
그는 갇혀 있는 여자에게서 눈길을 거두며 무감하게 지시했다.
“죽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