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끊어진 사슬, 팔아넘긴 반지, 열쇠공에게 찾아가서 푼 족쇄. 이젠 하다 하다 머리카락까지.
저를 놀리기라도 하듯 벨라는 흔적만 남긴 채 도통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는 부드러운 은색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느슨하게 웃었다. 순간 서늘히 얼어붙는 분위기에 에릭이 숨을 죽였다.
“내 훌륭한 기사들이 우리 벨라 뒤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니는 느낌인데. 나만 그렇게 느끼나?”
“……죄송합니다. 아가씨께서 제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움직이고 계신 모양입니다.”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하고 성의 없이 대꾸했다.
“내가 보기엔 셋 중 하나일 것 같은데.”
에릭은 고개를 숙인 채 날아올 그의 말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짙은 색상의 테이블 위로 그의 손가락이 천천히 까딱였다.
“첫째, 이안 에드레이즈의 발이 정말 빨랐다. 둘째, 벨라가 사라진 것을 보고하러 온 놈의 발이 더럽게 느렸다. 그리고 마지막.”
그는 잠시 말을 끊곤 고개를 들어, 날카로운 시선으로 에릭을 꿰뚫었다.
“네가 나에게 무언가 숨긴 것이 있다.”
고요한 침묵 위로 에릭이 검을 빠듯이 쥐는 소리가 희미하게 번졌다.
스쳐 가는 찰나마다 에릭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으로 점점 꼬여 갔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에릭의 앞으로 다가섰다.
“계속 그렇게 입 다물고 있으면 그 쓸모없는 혓바닥을 뽑아 버리고 싶어지는데.”
그는 에릭이 들고 있던 칼을 빼 들어 주저 없이 목을 겨눴다. 칼에선 노골적인 살기가 비쳤다.
“봐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에릭은 짧은 숨을 내쉬곤 천천히 그의 발치에 무릎을 꿇었다. 이젠 더 이상 숨길 수도 없었고, 그럴 의미도 없었다.
“……아가씨께선, 제가 주인님께 보고드리기 일주일 전쯤에 성을 빠져나가셨을 겁니다.”
“그래?”
그가 비스듬히 웃으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인즉, 벨라가 사라졌다는 걸 일주일 전에 알았으면서 내게 보고하지 않았다는 거지.”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불찰은 실수로 빚어진 일이었을 때 하는 말이고. 마지막으로 물을 거니까 똑바로 대답해. 실수야?”
에릭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날의 일을 상기했다. 이런 사태를 분명 각오했었지만, 상상만 하던 것과 실제로 그 상황에 맞닥뜨린 것은 제법 큰 차이가 있었다. 에릭은 무겁게 입을 뗐다.
“……제가, 이안 에드레이즈를 놓아주었습니다.”
“그러고 나한테는 일주일 뒤에 보고했고.”
“……예.”
긴장에 억눌린 탓인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겨우 답했다. 숙인 머리 위로 차가운 조소가 떨어졌다. 에릭은 체념하듯 눈을 감았다.
목을 겨누고 있던 칼이 거둬지며 살갗을 살짝 베었다.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에릭이 미세하게 움찔거렸다.
“또 한 번 그 새끼를 놓쳤다느니 하는 헛소리를 지껄였으면 지하에 처박아 버리려고 했는데.”
고개를 들자 베인 상처가 벌어지며 아릿한 통증을 불러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작은 상처에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왜 죽이지 않으십니까?
당황스러운 얼굴로 올려다보는 에릭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왜. 죽여 줄까?”
에릭에게 더 이상 할 말은 없었다. 사실을 모두 말했으니 남은 것은 사죄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제 주인의 실낱같은 자비가 제게 향하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벨라와 관련된 일이었다. 도리어 살길 바라는 것이 이상했다.
“제가 잘못한 일입니다. 책임을 물어 주십시오.”
“내가 지금 널 죽이면, 벨라는 누가 찾지?”
그의 물음에 에릭은 그제야 제 방식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 내 자비는 고통 없이 깔끔하게 죽여 주는 것이라고. 뭘 잘했다고 죽여 달라 지껄여.”
그는 들고 있던 칼을 바닥으로 내던지곤 거칠게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죽을 각오로 벨라를 찾아. 못 찾으면 그땐 네 몸이 바스러질 때까지 책임을 져. 어디서 버릇없이 목숨만 내던지고 끝내려고.”
그렇지 않아도 에릭은 온 힘을 다해 그녀를 찾을 생각이었다. 친구를 위해 제 주인에게 반하는 행위는 이쯤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벨라가 그리 쉽게 그의 손을 빠져나갈 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엔 늘 수많은 변수가 존재했다.
* * *
성을 빠져나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도시 내 기사들의 수색이 더욱 강화되어 후드를 뒤집어쓰고 다니더라도 안전하지 않았다. 게다가 곳곳엔 이안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지가 붙었다.
신전에서 나온 기사들은 조금이라도 수상해 보이면 바로 붙잡아 용모를 살폈다.
마녀와 도망친 기사, 둘을 찾기 위한 것이다.
“그거 들었어? 제국에 진짜 마녀가 나타났대.”
“뭐? 정말이야?”
“그래서 기사들이 저렇게 수색하고 다닌다나 봐.”
“어휴, 무서워서 어디 돌아다니겠나. 진짜 불안해 죽겠어…….”
그가 지시한 것이 분명했다.
‘마녀…….’
이대로 신전에 잡혀가면 두말할 것 없이 화형이었다. 그리고, 그가 찾아올 테지. 화형대에 묶여 불에 타들어 가는 저를 무감한 눈으로 지켜볼 것이다. 쓸모없어진 인형을 태워 버리기라도 하듯 말이다.
벨라는 속절없이 치미는 상념을 끊어 내려 애썼다. 하지만 몸을 웅크리고 눈을 질끈 감아 봐도 저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가 끊임없이 저를 따라다녔다.
그녀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제 양팔을 쓸어내리길 반복했다. 가만히 있으면 매서운 한기에 제 심장까지 얼어붙을 것 같았다.
그때, 조용히 다가온 이안이 그녀의 어깨에 모포를 걸쳐 주곤 옆에 앉았다.
“내가 깨어 있을 테니까, 얼른 눈 좀 붙여. 지금 네 상태가 더 별로야.”
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최대한 깊은 숲속으로 들어왔다. 보통 밤이 되면 기사들이 숲까지 휘젓곤 하는데, 지금이 전쟁 중이라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아무리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더라도 매일 밤 깊은 숲속까지 꼼꼼히 수색하고 다닐 의지는 없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해 이안과 벨라는 번갈아 가며 잠을 청했다.
“그럼 잠시만 부탁할게.”
“잠시만 아니고 길게, 푹 자.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일주일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한 벨라는 대답 대신 힘없이 웃어 보였다.
눈을 감으면 어김없이 온통 어둠뿐인 세계에 그와 단둘이 놓였다. 저를 응시하는 붉은 눈동자에서 도망갈 곳이 없었다.
그러다 더는 버티지 못한 정신이 수마에 집어 삼켜지곤 했다. 이어 무의식에 빠져들면 더한 지옥이 기다렸다.
이안은 검을 꾹 쥔 채 누워 있는 벨라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오늘은 다행히 조금 잠을 자나 싶어 안심하던 것도 잠시, 그녀의 얼굴이 설핏 흐트러졌다.
또 악몽을 꾸는 모양이다. 살짝 깨울까 망설이던 때, 그녀가 옆으로 몸을 웅크리며 작게 신음했다.
“으…….”
“벨라?”
그녀는 괴로운 듯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더욱 몸을 둥글게 말았다.
“발…… 발목이 아파…….”
웅얼거리는 소리라 제대로 알아듣진 못했지만, 아프다는 말만은 정확히 들었다. 이안은 곧장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쥐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응?”
“제발…… 제발, 이 족쇄 좀…… 풀어 줘. 발목이 너무 아파……. 무거워……. 무거워서…….”
느릿하고 불분명한 말이었지만 이안은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경련하듯 잘게 떨리는 발목을 바라보는 이안의 얼굴이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벨라, 정신 차려. 이제 족쇄 같은 건 없어.”
빛을 잃은 눈동자가 이안을 보며 울부짖었다. 이안은 벨라를 일으켜 앉히곤 공허한 눈동자를 붙잡으려 애썼다.
“괜찮아. 괜찮아, 벨라. 나 봐봐. 네가 지금 누구랑 있는지 잘 봐. 여긴 베른이 아니야.”
“아니라고……?”
“아니야. 아무도 안 쫓아와. 여긴 지금 너랑 나 둘뿐이야.”
벨라는 버릇처럼 고개를 내저었다.
아닌데, 내가 그곳을 빠져나왔을 리가 없는데. 지금도 이렇게 사슬이…….
순간, 발목으로 스미는 온기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제 발목을 칭칭 감고 있던 차디찬 굵은 사슬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소중히 제 발목을 쥐고 있는 이안의 따스한 손뿐이었다.
“내 손, 느껴져? 아직도 발목이 아픈 것 같아?”
저를 바라보는 이안의 눈빛은 새벽처럼 고요하고 차분했다. 처음엔 제법 당황스러워했는데, 이 짓도 매일 밤 반복되니 나름대로 적응한 모양이다.
‘내가 여전히 미친 걸까.’
벨라는 자괴감에 입술을 짓씹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차마 이안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고 미안해서 견디기 버거웠다.
“……미안해. 계속 이렇게 추한 꼴 보여서……. 나 이제 깼으니까, 너 얼른 자. 나 때문에 제대로 쉬지도 못했을 텐데. 미안…….”
“나 원래 잠이 별로 없어서 괜찮아. 벨라, 네가 피곤하지. 내가 깨어 있을 테니까 걱정 말고 조금 더 자.”
슬쩍 눈이 마주치자 이안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싱긋 웃어 보였다. 같이 웃어 주고 싶은데, 굳은 입꼬리가 말을 듣지 않았다.
“지금은 못 잘 것 같아서 좀 앉아 있으려고. 내가 깨어 있을게.”
“그럼 같이 앉아 있을까? 여기, 별도 많이 보여.”
“……그래.”
이안은 둥근 바위 위에 모포를 깔아 그녀의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고개를 들면 뻥 뚫린 나무 사이로 별이 총총 박힌 밤하늘이 한눈에 들어오는 명당이었다.
고개를 젖혀 하염없이 별을 좇는 그녀를 보며, 이안은 며칠 전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서쪽으로 쭉 가면 사막이 나온다고 들었어. 그곳에 가고 싶어.”
“사막은 왜?”
“별다른 이유는 없어. 그냥…… 그 모래가 보고 싶어. ……예뻤거든.”
“벨라, 사막 가서 모래 보고 나면 뭐 할 거야?”
“음……. 그건 생각 안 해 봤는데.”
벨라는 그 대답마저 부끄러웠는지 겸연쩍게 웃었다.
“그러면, 오아시스 보러 갈까? 사막은 물이 다 메말라서 식물도 거의 자라지 않는 곳인데, 어딘가 물이 고여 있는 곳이 있대. 그 주위는 나무도 자라고 풀도 자란다던데.”
능청스레 말했지만, 벨라는 그 말이 뜻하는 바를 곧바로 알아챘다. 이안은 저와 함께 사막까지 향할 생각이었다.
“……있잖아, 이안.”
“벨라, 오아시스 보고 나면 큰 도시도 찾아가 보자. 사막에 지어진 도시는 어떨지 궁금하지 않아? 되게 아름다울 것 같아.”
그녀의 부름에서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건지 이안은 못 들은 척 다른 말을 떠들어 댔다. 하지만 그럴수록 벨라의 목소리는 더욱 단호해졌다.
“앞으로 며칠만 더 부탁할게. 그 뒤로는 나 신경 쓰지 말고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 꽉 다물린 틈새를 꾸역꾸역 비집고 들어왔다.
벨라는 저를 떼어 내고 홀로 갈 생각이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그의 마음속에 웅크려 있던 욕심이 용암처럼 치솟았다.
이안은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입가에 자조적인 미소를 떠올렸다.
“……벨라, 네가 헤버튼을 떠나고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얘기해 줄까?”
이안은 늘 그 시기의 이야기를 피해 왔다. 벨라가 부모님의 안부를 묻게 되면 말을 돌렸고,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넘기곤 했다. 그래서 그때부턴 벨라 역시 더 이상 묻지 않았었다.
“……얘기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 네가 알았으면 좋겠어.”
이안은 그녀가 저를 버리지 못할 이유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설령 죄책감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