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다른 짐작 가는 곳이 있으십니까?”
“……글쎄.”
벨라가 소만으로 가지 않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좋지 않은 기억을 새겨 두었으니 더 이상 소만에 대한 환상은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바다요. 바다가 보고 싶어요.”
소만에는 바다가 없다.
우습게도 그 단순한 사실이 여태껏 들었던 어떤 정보보다 결정적이었다.
자연스레 제 형제의 존재가 떠오르고, 바다를 보고 싶다 지껄이던 그녀의 예쁜 입술이 떠올랐다.
그는 제 이마를 짚으며 가볍게 조소했다.
“직접 찾으러 가시기에는 경우의 수가 너무 많습니다. 워낙 연고가 없는 분이라 더욱 예측하기가 힘드네요. 헤버튼이 떠오르긴 하는데…… 너무 뻔하니 그곳으로 향하진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해안가 쪽을 모두 뒤지기엔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겁이 많아 이리저리 숨어 다니는 사냥감을 잡기 위해서는, 우선 곳곳에 덫을 설치하고 포위망을 좁히는 것이 급선무였다.
“에드윈을 통해 전국 신전에 마녀 수색을 강화하라고 지시해. 무조건 체포하되, 최대한 다치지 않도록. 마녀에 대한 즉결 심판도 중지시키고.”
“마녀를 잡아들일 때마다 보고하라고 하겠습니다. 에드레이즈는 어떻게 할까요?”
“전쟁 중에 전열을 이탈한 자다. 군사로서 그딴 선택을 하면 어떻게 되는지 톡톡히 본보기를 보여야지. 전국에 수배령을 내려. 그리고…… 반드시 숨은 붙여서 잡아 와.”
감히 제 것을 훔쳐 달아난 대가는 반드시 혹독히 치르게 할 것이다.
“아, 마지막으로.”
“예.”
“마녀가 보라색 눈을 숨기기 위해 맹인인 척하고 다닐 수 있으니, 눈을 가린 자들도 그냥 지나치지 말고 살피라고 해.”
“……그렇게 지시하겠습니다.”
그는 참 꼼꼼하게도 벨라의 돌파구를 틀어막았다.
* * *
그는 여느 날처럼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으로 들어가 의자에 앉았다. 천천히 차를 따르고 책을 펼쳐 들었을 때, 소심하게 저를 좇는 시선이 오롯이 느껴졌다.
작은 머리통엔 오로지 자신이 새겨 놓은 것들로 가득 차 있을 것이다. 가늘게 내뱉는 숨결 하나에도 저에 대한 공포가 묻어 있겠지.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었다. 오로지 저로 채울 수만 있다면.
벨리아르는 고개를 들어 텅 빈 침대를 마주했다. 그의 눈앞엔 여전히 물기 어린 눈동자로 저를 올려다보는 벨라가 있었다.
“벨라.”
하지만 가만히 불러 보아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작고 가녀린 목소리로 ‘……네.’ 하고 얌전히 대답해야 하는데. 오롯이 제게 집중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아, 참 애꿎게도 불러 댔었다.
“벨라…….”
그러나 지금은 아무리 불러 봐도 그 이름은 주인에게 닿지 못하고 허무하게 바스러졌다.
벨라가 없다.
산책을 보냈었나. 그녀가 이곳에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제 기억을 의심했다. 그게 아니라면 도저히…… 벨라가 없을 리가 없는데.
처참히 끊어진 사슬이 저를 보며 비웃었다.
벨라는 네가 싫어서 도망간 거야. 너도 알잖아. 벨라는 네게 마음 준 적이 없어.
그는 희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오래전 그녀가 저를 배신한 이후로 저는 그녀에게 더 이상 마음을 바라지 않았다.
벨라는 제 것이었고, 제 것이 저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른 이의 것이 되진 않으니까. 벨라에게 바라는 것은, 그저 얌전히 제 곁에 머무는 것뿐이었다.
그게 그리 어려웠을까.
스스로 사슬을 끊고 도망갈 만큼.
그는 품 안에서 붉은 반지를 꺼냈다. 그녀가 이 반지를 팔고 달아났다는 사실이 그에겐 제법 충격이었다.
늘 그녀의 손에 끼워져 있던 반지를 가만히 보고 있으니 잔뜩 뒤틀린 마음이 치밀었다.
당장이라도 벨라를 제 눈앞에 데려와 이딴 반지가 아니라 목에 사슬을 걸고 싶었다. 스스로 빼지 못하도록 빠듯하게 조여 제게 숨을 애원했으면 했다.
저는 늘 벨라에게 너무 물렀던 것이 탈이었다.
애초에 그녀가 달아날 수 있었던 건 걸을 수 있게 두었기 때문이다. 족쇄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걸을 수 없도록 발목을 부러트려 놓았어야 했는데. 뼈는 다시 붙을 테니, 힘줄을 끊어서라도. 그렇게 오로지 제게만 매달리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그 역시 제 잔혹함의 끝이 어디인지 알지 못했다.
인내심은 늘 바닥을 투명하게 드러낼 만큼 찰박거리는데, 잔혹함은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새까맸다.
이왕 달아난 것이라면, 끝까지 제 손에 잡히지 않았으면 한다.
불멸의 몸으로 끝없는 시간 동안 너를 쫓으며 살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러다 질려 버린 네가 결국 나를 죽인다면, 그때에야 우리의 질긴 연이 끊어질까.
지그시 눈을 감자 그녀가 스스로 목숨을 끊던 날이 떠올랐다. 매번 같은 생각이 뒤따랐다.
차라리 그 칼로 저를 찔렀다면 좋았을 텐데.
이기적인 욕심이었다.
* * *
말을 타고 얼마나 달렸을까.
최대한 빠르게 베른에서 멀어지는 것이 목표였기에 이안은 쉼 없이 말을 몰았다. 빅센의 외곽에 진입해서야 서서히 속도를 늦추었다.
이안은 곧장 벨라의 상태부터 살피며 물었다.
“힘들진 않아?”
“……응. 시원해.”
여태 달려오며 수없이 같은 물음을 했고, 벨라 역시 매번 같은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늘 시원해서 좋다고 했다.
외진 길에서 숲속으로 조금 더 들어가니 쉬어가기 좋은 평평한 지형이 나왔다.
작지만 냇물도 흐르고 있었고 앉아서 쉴 만한 바위도 있었다. 졸졸 흐르는 물소리에 벨라가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이안은 먼저 말에서 내린 다음 그녀를 땅으로 내려 주었다.
“여긴 빅센이야. 아직은 쫓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여기서 준비를 조금 하고 가자.”
공작은 지금쯤 셀리온으로 가서 전쟁에 합류했을 것이다. 쫓는 이들이 있더라도 성에 남아 있던 소수의 기사뿐일 테고, 그 정도의 인원으로 빅센까지 쫓기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이안은 스스럼없이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앉아 그녀의 발목을 살폈다. 그 상황이 조금 부담스러웠는지 주춤거리는 그녀의 입에서 곤란한 소리가 삐져나왔다.
“아…….”
그러나 이안은 아랑곳하지 않고 족쇄의 생김새를 살폈다. 사슬을 최대한 짧게 끊어 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흉함이 줄어들진 않았다.
이안은 그녀가 제 표정을 보지 못하는 틈을 타 마음껏 인상을 찌푸렸다. 가녀린 발목을 죄고 있는 투박한 족쇄를 볼 때마다 마음이 수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이것부터 없애야겠다. 많이 불편하지?”
“괜찮아. 계속 있던 거라서…….”
벨라는 우물쭈물 답하며 드레스 아래로 발목을 쓱 숨겼다. 살짝 멍한 와중에도 이안이 족쇄를 자세히 보는 건 꺼려졌다.
이안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그녀와 눈을 맞추며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일렀다.
“지금부터 괜찮다는 말 금지야. 나한테 솔직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 힘들면 힘들다 그러고, 괴로우면 괴롭다고 하고.”
“……응, 노력해 볼게.”
“빅센에 실력 좋은 열쇠공을 알아. 헤버튼이랑 가까워서 몇 번 들렀었거든. 우선, 거기 가서 족쇄부터 풀자.”
정말 풀어도 되는 걸까?
족쇄를 푸는 순간, 어디선가 그가 나타나 제 목을 틀어쥘 것 같았다. 저를 내려다보던 그 붉은 눈동자가 너무 선연해서 점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분명 말을 타고 멀리 온 것이 분명한데, 이상하게 아직도 그의 손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불안이 거셌다.
그는 지금쯤 자신이 사라진 것을 알았을까? 알았다면…… 어떤 반응일까. 화를 내려나. 아니면, 이미 흥미가 식어 별로 신경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가슴 한쪽이 욱신거렸다.
“벨라?”
그녀가 돌연 불안해하는 듯하자 이안은 조심스레 그녀와 눈을 맞추었다. 벨라는 떨리는 손을 살며시 맞잡으며 애써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그러자.”
시간이 제법 걸렸지만, 족쇄를 푸는 건 성공했다. 벨라는 갑자기 가벼워진 발목이 어색한 듯 걸으며 계속 제 발을 흘긋거렸다.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뛰고 싶다는 충동을 억누르는 것이 조금 힘들 뿐이었다.
그 뒤로 숨어 다닐 때 필요한 것들을 사고, 남은 금화는 작고 값비싼 장신구들로 바꿨다. 금화를 상자에 넣어 끌어안고 다니는 것보단 이편이 훨씬 안전하고 간편했다.
그렇게 둘은 최대한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볼일을 보고, 다시 숲으로 돌아왔다. 하늘에 어스름이 내려앉고 있었으니 오늘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이안은 넓은 천으로 바람을 막아 줄 간이 천막을 쳤다. 제법 능숙한 손길에 벨라는 바위에 앉아 신기한 듯 이안을 바라봤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굳이 묻지 않아도 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배웠어.”
이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괜히 줄을 한 번 더 묶었다.
벨라의 기억 속 이안은 열심히 검을 휘두르는 것 말고는 영 재주가 없었다. 불 하나 피울 줄 모르던 애가 지금은 저를 가만히 앉혀 두고선 홀로 척척 준비해 내는 모습이 기분 좋은 낯섦을 가져왔다.
벨라는 숲을 한번 살펴보곤 후드를 벗었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긴 머리칼이 흩날려 시야를 가렸다. 머리를 다듬던 벨라는 귀찮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짐이 있는 곳을 뒤적였다.
“이안, 우리 아까 가위 사지 않았어?”
“그거 여기 있어. 가위는 왜?”
가위를 넘겨받은 벨라는 제 머리칼을 뭉텅 쥐고서 곧장 가윗날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화들짝 놀란 이안이 다급히 그녀의 손을 쥐었다.
“벨라! 지금 뭐 하려는 거야?”
“머리 좀 자르려고.”
“……왜?”
“너무 거추장스럽잖아. 눈에도 잘 띄고. 짧게 자르고 후드를 덮어쓰면 더 알아보지 못할 거야.”
“묶으면 되잖아. 굳이 자를 필요가 있을까? 너무 아까운데…….”
벨라가 희미하게 웃으며 단호하게 머리칼을 잘라 냈다. 몇 번의 가위질 만에 허리께에서 찰랑거렸던 머리칼이 어깨에 닿았다. 이안이 안타까운 탄성을 흘렸다.
“아…….”
“머리카락은 또 자라. 나중에…… 또 지금처럼 길게 자랄 거야.”
“……그땐 내가 머리 묶어 줄게.”
그 말에 벨라는 또 한 번 의외라는 얼굴로 물었다.
“머리도 묶을 줄 알아?”
“아니. 그것도 배울 거야. 내가 묶어 줄 테니까…… 다음부턴 자르지 마.”
벨라는 스며 나오는 웃음을 숨기려 고개를 숙였다. 머리 묶는 게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비장한 얼굴로 배우겠다고 선언하는 이안을 보니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자 멀뚱히 서 있던 이안이 덩달아 웃었다. 벨라는 그런 이안을 보며 황당해했다.
“너는 왜 웃어?”
“네가 웃으니까.”
당연하다는 듯이 나오는 대답에 벨라는 살며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지금은 지독한 현실이었고, 저는 결국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머리카락이 다시 길게 자랐을 때, 우린 어디쯤 있을까.
벨라는 속으로 빌었다.
부디, 그땐 이안이 저를 버리고 멀리 떠나 있기를.
그리고, 그가 저를 버렸기를.
* * *
고요한 숲으로 기사들의 발소리가 파고들었다.
“여기 불을 피웠던 흔적이 있습니다!”
누군가 소리치자 에릭이 기사들 사이로 나와 바닥의 재로 다가섰다. 그는 남은 재를 조금 집어 손끝에 비벼 보았다.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으며, 숲의 물기를 머금어 살짝 눅진했다. 적어도 며칠이 지났단 뜻이다.
그리 도움이 되진 않는 흔적이라 그는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장소를 옮기려 했지만, 무언가 눈길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에릭은 검집 끝으로 바위 옆에 있던 수풀을 살짝 걷었다. 그러자 뭉텅 잘린 은색 머리칼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안과 벨라가 머물렀다가 떠난 지 일주일째 되는 시점이었다.
에릭이 둘에게 벌어 준 시간은 딱 일주일이었다.